외국어 학습은 매우 간단한 활동 같지만,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과정입니다. 만약 외국어 학습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러한 이해에 맞춰 외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년 대부분이 영어 학습에 목숨을 걸어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현실을 본다면, 외국어 학습의 이해가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입니다. 학자들은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발견하면 간단한 모델을 통해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학습을 설명하는데도 몇 가지 모델을 제시해 볼 수 있겠죠.

많은 사람은 외국어 학습을 "지식 획득"의 모델로 이해합니다. 언어는 문법과 어휘로 구성되고, 따라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말은 문법과 어휘를 익히면 된다는 뜻이죠. 이러한 모델을 쓴다면 외국어 학습을 쉽게 체계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초 수준의 문법을 익히고 중급 과정으로 넘어가면 되고, 가장 사용 빈도가 많은 단어 1,000개를 배우고, 그다음 단계의 어휘를 익히면 되는 식이죠. 이러한 모델로 생각할 때는 외국어 실력은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표준화한 시험을 통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토익 등을 비롯한 외국어 능력 시험은 곧 외국어 실력을 보여주는 잣대이죠.

이러한 지식 획득 모델은 외국어 학습 과정에 대한 신비감을 제거하고, 모두가 쉽게 따를 수 있는 학습 과정(문법과 어휘의 암기 학습 및 읽기 쓰기를 통한 연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외국어 학습을 민주화합니다. 즉 외국어 학습이 귀족 자제의 특권이 아닌, 국민이 모두 외국어를 배우는 시대엔 이러한 모델이 유용하다는 말이죠. 최근 취직이나 진학 시 외국어 성적을 평가의 중요한 요소로 보는 곳이 많은데, 이는 이러한 모델이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갈수록 많은 사람이 외국어 학습을 지식 획득으로 보는 모델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외국어 학습이 단순한 지식 획득 과정이라면, 외국어 공부도 다른 공부처럼 노력에 따른 성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는 대한민국 청년 중 영어공부에 목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또한, 영어 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실제로 외국인을 만나면 말 한마디 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외국어 실력이 표준화 시험으로는 평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이는 이 모델을 거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외국어 학습을 보는 또 다른 모델은 "본질의 변화"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모델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은 인간이 자라면서 환경과 문화에서 받는 영향에서 생겨나고, 따라서 외국어를 잘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에 노출되어서 학습자의 정체성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즉, 과거에 나의 정체성이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어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본질을 얻어야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러한 모델에서 조기 외국어 교육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따라서 어린 시절 외국어를 배워야 외국어가 학습자의 본질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죠. 이러한 모델에서는 만약 어린 시절 외국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성인이 되어서라도 외국에서 생활해야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외국 생활이라는 극단적인 체험을 통해 본질이 바뀌지 않는 이상, 외국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죠. 요즘 유행하는 영어 조기 교육이나 외국 어학연수 등은 이러한 모델이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의 변화 모델은 지식 획득 모델 보다 외국어 학습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본질을 변화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외국어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사람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제대로 가르쳤거나, 자녀를 어학연수 보내 본 분이라면 이러한 활동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지식 획득 모델에서는 책을 사서 혼자 공부하든,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든, 외국어를 하는 데 필요한 지식만 획득한다면 누구나 외국어를 잘할 수 있다고 보는데, 본질의 변화 모델에 따르자면 외국어는 일부 부유층의 특권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죠. 또한,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라면, 본질을 여러 번 바꾸기가 어려우므로 두 개나 세 개의 외국어를 배우기는 거의 불가능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여러 개의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이는 본질의 변화 모델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를 동반하는 과정이라면, 외국어 학습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띄게 됩니다. 즉, 나의 본질이 "한국어만 하는 사람"에서 "한국어와 외국어를 하는 사람"으로 바뀐다면, 이러한 변화가 한국인으로 나의 정체성 또한 바꾸어 놓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치적으로 국제관계가 민감한 시기엔 외국어 학습이 대단히 민감한 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불어를 가르치면 아이를 망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지 불어가 나쁜 언어이기 때문이 아니죠).

본질의 변화 모델은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의 본질(essentia)이라는 개념에 근거합니다. 어떤 존재가 그 존재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그 존재 속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내 눈에 보이는 이 의자가 의자인 까닭은 이 의자가 의자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 만물은 본질을 지니고, 그렇기에 우리가 각 사물을 고유의 특징을 지니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죠.

그런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본질에 대한 철학적 회의가 들어오면서 "본질"이라는 개념에 대한 회의가 늘었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가 "물자체(Ding an sich)는 인간이 직접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인식론적으로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를 막아버린 셈입니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주장도 본질의 위상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과학에서는 원자를 구성하는 양자의 세계가 발견되고, 이 세계를 전통적인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심리학에선 인간의 의식 밑에 존재하는 잠재의식이 발견되었고, 칼 융은 인간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집단적으로 연결된다는 이른바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이론을 내세우면서, 결국 인간 심리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말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본질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철학에서도 연구의 초점을 본질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옮겨놓은 현상학(phenomenology)이 생겨났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얼굴, 즉 페르소나(persona)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페르소나란 나의 본질은 아니지만, 내가 외부와 관계할 때는 "나"의 역할을 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은 부유하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영화 속에선 늘 가난한 외톨이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본질이 "부유하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라면, 그의 페르소나는 "가난한 외톨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페르소나는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일종의 페르소나이죠. 이러한 페르소나는 우리의 본모습과 같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이 주는 자유를 누리고자 평소에 할 수 없었던 말도 하고, 실제로는 겪지 않은 일도 겪은 듯 글을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인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외국어 학습에 적용해 본다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 본질을 바꿀 필요는 없고, 가면 하나만 만들면 된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의사가 되었다가 운동선수가 되었다가, 목사가 되기는 어렵지만, 배우가 의사 역할을 했다가 운동선수 역할을 했다가 목사가 되기는 어렵지 않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도 새로운 배역을 소화하기만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습니다.

배우들은 연기할 때 배역에 몰입한다(get into character)는 말을 씁니다. 이는 내가 진짜로 그 배역인 양 행동한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내가 하나의 언어를 배울 때도 그 나라 사람인 양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죠. 이렇게 하면 분명히 외국어를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어를 배우면 그 문화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모국 사람을 만날 때 어색하게 행동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모국에서 온 사람들과 관계할 때는 모국에서 쓰던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죠.

영화 아바타는 이러한 외국어 학습 모델의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미군은 다른 행성에 사는 나비족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기 위해 인간과 나비족의 DNA를 섞어서 아바타를 만듭니다. 이 아바타는 인간이 기계에 들어가 조종하게 되어 있는데, 아바타를 조종하는 인간이 앞서 말한 "본질"이라면 아바타는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죠. 미군이 이러한 기술을 개발한 이유는 지구인의 모습 그대로는 나비족에게 접근할 수도, 언어와 문화를 배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외국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전혀 다른 문화속에 들어가려면 지금 모습으로는 어렵고, 새로운 가면, 즉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엔 표정, 몸짓, 행동, 사고방식 등이 포함되죠. 물론 완벽한 변신은 불가능하겠지만, 배우가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맡았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배역에 몰입하면 됩니다.

이러한 모델의 가장 큰 약점은, 이 모델을 따르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하는데, 페르소나를 만들려면 이미 외국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죠. 예를 들어 내가 일본인 사이에서 일본인처럼 행동하려면 일본인처럼 옷을 입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일본인처럼 말을 해야 하는데, 일본인처럼 말을 못한다면 일본인처럼 행동한다고 할 수가 없겠죠. 즉, 페르소나를 만들려면 언어 능력이 필요하고, 언어 능력을 갖추려면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에 갇히고 만다는 점이 문제입니다(영화 아바타에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를 할 수 있는 나비족이 주인공의 언어 학습을 도와줍니다. 현실에선 나의 언어를 할 수 있는 현지인을 찾기가 쉽지 않겠죠).

이러한 세 가지 모델을 결합해 본다면, 외국어 학습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즉, 처음 외국어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외국어를 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정보를 익히면 되고,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고 난 후라면 현지인의 페르소나를 갖추도록 노력하고, 이렇게 현지인처럼 행동하다 보면 결국 내부에 변화가 생겨 현지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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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