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를 읽는 독자라면, 조선일보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이라기 보다는, 정부와 여당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기관지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 것입니다. 정부에서 무슨 발표를 하면 "정부에서 이렇게 주장을 했다"고 보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발표는 올바르다" "우리는 정부의 말을 믿어야 한다" 하는 식으로 정부의 주장을 뒷바침하는 후속보도를 내보내기 때문이죠.

며칠전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즈 (FT)가 Sinking Feeling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경제위기에 대해 보도를 하자 정부가 나서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조선일보는 정부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여 FT의 보도를 반박하는 글을 기사, 사설, 기자 블로그 가릴 것 없이 다방면으로 실은 것도 조선일보의 충성도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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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FT의 보도에 대한 반발로도 모자라, 오늘은 인터넷 머릿기사로 "FT에서 면피성 기사를 실었다"는 기사까지 올렸습니다. 사실 FT는 한국 경제 사정에 대해 다각도로 보도를 하는 것 뿐인데, 조선일보는 "FT의 첫번째 보도는 왜곡이고, 그렇다면 두번째 기사는 왜곡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기사가 분명하다"고 해석을 해버린 것이지요. 아, 조선일보가 따로 연재소설을 싣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것이었군요.

이명박 정부가 FT의 보도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여 조선일보를 동원해 공격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최근에 청와대가 자랑할만한 유일한 업적은 이명박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을 내보낸 것입니다. 청와대가 이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냐 하면 "청와대 핵심 관계자"로 유명한 모씨는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에 대해 "아날로그화법으로 IT감성 어루만졌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고, 조선일보는 이번 라디오 연설을 대공황 위기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행한 라디오 연설인 노변담화에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여권이 들떠 있는데 (사실 KBS의 반발을 억눌러가며 사람들이 잘 듣지도 않는 라디오 연설 한 것이 들뜰 이유는 아닌데, 요즘 여권에 좋은 일이 없어 작은 일 하나에도 대단히 감격하는 듯 싶습니다), 유력 경제지인 FT에서는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에너지 10% 아끼면 국제수지 적자를 없앨 수 있다'는 식으로 절박하게 말하면 국민이 패닉에 빠진다" ("But it is hard for ordinary Koreans to avoid a sense of panic when the government unveils ever more desperate-sounding measures: yesterday, for example, Mr Lee urged people to ration energy consumption and overseas spending. "If we cut down on energy by 10 per cent, we will not post a current account deficit," he told radio listeners.)고 평가했습니다. 즉, 청와대는 대통령이 연설하면 국민이 안심한다고 믿었는데, FT는 대통령 연설이 국민을 패닉하게 하는 실수라고 지적한 것이지요. 이러니 청와대에서 난리가 난 것도 당연합니다.

또한 FT의 보도를 보면, 한국 정부가 지난 두 달간 환율 방어를 위해 400억 달러를 썼다고 하는데, 이는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 보유고를 쓸어 넣다가는 몇달 안가 외환이 바닥나는 사태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정부로서는 감추고 싶은 사실인데 FT가 적나라하게 들쳐내 버린 것이지요.

이처럼 FT의 기사는 정부가 감추고 싶은 사실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한국이 내년 6월까지 갚아야 하는 단기 자금이 1750억달러인데, 이중 800억달러는 외국 은행의 한국지점과 관련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안될 것이고, 약 1000억달러 가까운 금액이 문제인데, 이 금액에 대한 대출연장이 되지 않을 경우 문제가 큽니다. 또한 한국의 은행 예대율 (예금대 대출 비율)이 높다 (즉, 은행이 예금을 받은 것 보다 빌려준 돈이 많다)는 사실은 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대외 채무는 4000억달러 수준인데, 이는 금액으로 보나 GDP 비율로 보나 1997년 외환위기 당시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내 언론이 자주 다루지 않지만, 한국 경제의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FT는 16일 원화의 가치 폭락을 보도하면서 한국의 크레딧 디폴트 스왑 (Credit Default Swap, CDS)이 330 베이시스 포인트로 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는 천만달러를 빌릴 때 부도를 방지하는 조건으로 내야 하는 금액이 33만달러에 달한다는 말이죠. 일본은 CDS가 35베이시스 포인트밖에 안되는데, 한국은 이 수치가 거의 열 배나 높습니다. 이는 한국의 부도 가능성이 일본에 비해 거의 열배나 높다고 평가된다는 뜻입니다.

정부는 FT가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엔 왜곡 보도가 아니라 너무 적나라한 보도라서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참고로, FT는 다른 주요 경제지 (The Economist나 Wall Street Journal)와 마찬가지로 우파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좌파언론이 쓴 기사라면 "빨갱이의 정부 흔들기"로 몰아가겠는데, 우파 경제지에서 나온 보도라 정부로서도 몹시 당혹스러운 듯 싶습니다.

정부가 정말 경제 위기를 헤쳐나가려고 한다면 조선일보 사설 동원해서 FT랑 싸우지 말고, 문제가 무엇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할찌를 알려야 할 것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때 사람들은 외환위기 자체에 대해서도 충격을 받았지만, 얼마전까지 "아무 문제가 없다"던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외국 기관에 돈을 빌리러 가는 모습에서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매한 국민은 속일 수 있을찌 몰라도 크레딧 디폴트 스왑 같은 시장의 반응은 절대 속일 수 없는 법입니다. 자꾸 "소통의 문제"로 몰아가지 말고, 정직하게 문제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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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