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200개 이상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그중 어떤 나라는 대단히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대단히 가난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나라는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원이 많은 나라는 부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는 자원이 풍부함에도 대단히 가난합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자원이 거의 없지만,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축에 드는 나라입니다. 물론 사우디 아라비아 등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가 부유한 예도 있긴 하지만, 몇 년 전 저유가 시대엔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실이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음을 생각할 때 석유만으로 국가의 부를 유지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수준으로, 유럽과 비교해서 절반 정도이기 때문에 사우디 아라비아를 대단히 잘사는 나라고 분류하기도 어렵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기 때문에 부유하다는 주장도 존재합니다만,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아닙니다. 우선,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착취한다면, 부유한 나라는 어떻게 부유해져서 남의 나라를 착취할 수 있게 되었는지가 설명이 안 됩니다. 즉, 이러한 주장은 "왜 가난한 나라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은 될지언정,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해져서 남의 나라에 착취당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답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역사를 볼 때 착취를 하는 나라와 착취를 당하는 나라는 정해져 있지 않고, 시대가 지나면서 늘 바뀌기 마련입니다. 중세 시대엔 유럽이 가난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에게 억눌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인이 아랍인을 억누르게 됩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주변국을 착취했지만, 근대 이후엔 서구 열강과 일본에 착취당하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처럼 중국이 대미 무역흑자를 계속 낸다면, 미국은 중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착취이론은 이처럼 착취를 당하던 국가와 착취를 하던 국가의 입장이 바뀌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죠.
한국인은 국가간 경제력의 차이를 노력의 차이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열심히 일하는 나라는 잘살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나라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 말은 직관적으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많은 경제학자는 이러한 설명을 거부합니다. 우선, 개인은 노력하는 사람이 돈을 벌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국가 단위로도 이러한 논리가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죠. 또한, 요즘 처럼 양극화 현상이 심한 사회에선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초기 자본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가정 출신보다 훨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국가도 많고, 이런 나라에 함부로 "너희가 가난한 이유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난한다면 너무 잔혹한 태도일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나라에 가 보면 게으른 사람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이는 그 나라의 실업률이 높기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한국인도 가난하던 시절에는 외국인들로부터 "게으른 국민"이라는 비난을 들었지만(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이, "아침에 일찍 깨는 사람이 없어 조용한 나라"라는 해석도 있더군요), 지금은 잘살게 되면서 어느 나라보다 근면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독일인들도 가난했던 19세기엔 게으르다는 평판이 있었다는군요. 이러한 이유에서 제프리 삭스 교수나 장하준 교수 등은 경제수준의 차이가 노력의 차이에서 온다는 해석을 거부합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차이를 경제수준 차이의 원인으로 보는 해석이 있는데, 이는 막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가 대표적입니다. 베버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섞여 사는 독일에서 개신교도가 가톨릭교도보다 부유한 원인을 개신교의 교리가 자본주의를 낳았고, 따라서 개신교도는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열심히 돈을 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책을 쓰던 19세기엔 이러한 해석이 상당히 그럴듯했는데, 지금 독일의 경제 상황을 보면, 가톨릭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남부는 부유한 데 비해, 개신교가 강한 북부는 남부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뒤떨어집니다. 국가 간의 경제력을 봐도 과거엔 영국 등 개신교 국가가 훨씬 부유했지만, 지금은 이탈리아 등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와 대등하거나 앞설 정도로 경제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또한, 동아시아가 가난하던 시절엔 유교가 경제발전을 가로막는다는 해석이 유행했지만, 동아시아가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유교야말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습니다. 요즘은 BRICs 4개국의 경제발전이 눈부신데, 이 네 나라의 문화에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찾는 해석도 곧 등장하겠죠.
결국, 크게 놓고 보았을 때, 인류는 아직도 경제의 발전과 후퇴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도 <경제학의 향연>(Peddling Prosperity)에서 미국이 2차대전 이후에 유지하던 "경제의 마술"을 잃어버린 원인에 대해 "알 수가 없다."라고 설명합니다. 미국처럼 경제학자들이 늘 경제활동에 대해 연구하는 나라도, 왜 수십 년간 잘되던 경제가 갑자기 나빠졌는지 알 수 없다면, 경제활동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지 않은 나라의 과거사를 근거로 그 나라가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진 원인을 찾기는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자신의 무지를 화려한 수사로 포장해 마치 모든 경제현상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듯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 결과 대중은 "나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이해하고, 따라서 이들이 정부에 제안한 정책을 따르면 꼭 경제가 살아나겠지." 하는 환상을 갖게 되죠. 하지만, 지금 정부에 조언을 하는 경제학자들은 작년에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년에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온다고 예측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간은 매우 단순한 현상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잦은, 매우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계몽주의가 남긴 유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한다면, 미래에 대해 함부로 예측하기 보다는 겸손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겠죠. 경제에 대해서도 "미래는 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엔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를 모두 경계하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계몽주의와 경제학 연재를 마칩니다. 조금 무겁고 딱딱한 내용이라 재미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즐거운 주말 되시고,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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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원이 많은 나라는 부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는 자원이 풍부함에도 대단히 가난합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자원이 거의 없지만,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축에 드는 나라입니다. 물론 사우디 아라비아 등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가 부유한 예도 있긴 하지만, 몇 년 전 저유가 시대엔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실이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음을 생각할 때 석유만으로 국가의 부를 유지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수준으로, 유럽과 비교해서 절반 정도이기 때문에 사우디 아라비아를 대단히 잘사는 나라고 분류하기도 어렵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기 때문에 부유하다는 주장도 존재합니다만,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아닙니다. 우선,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착취한다면, 부유한 나라는 어떻게 부유해져서 남의 나라를 착취할 수 있게 되었는지가 설명이 안 됩니다. 즉, 이러한 주장은 "왜 가난한 나라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은 될지언정,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해져서 남의 나라에 착취당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답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역사를 볼 때 착취를 하는 나라와 착취를 당하는 나라는 정해져 있지 않고, 시대가 지나면서 늘 바뀌기 마련입니다. 중세 시대엔 유럽이 가난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에게 억눌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인이 아랍인을 억누르게 됩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주변국을 착취했지만, 근대 이후엔 서구 열강과 일본에 착취당하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처럼 중국이 대미 무역흑자를 계속 낸다면, 미국은 중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착취이론은 이처럼 착취를 당하던 국가와 착취를 하던 국가의 입장이 바뀌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죠.
한국인은 국가간 경제력의 차이를 노력의 차이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열심히 일하는 나라는 잘살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나라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 말은 직관적으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많은 경제학자는 이러한 설명을 거부합니다. 우선, 개인은 노력하는 사람이 돈을 벌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국가 단위로도 이러한 논리가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죠. 또한, 요즘 처럼 양극화 현상이 심한 사회에선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초기 자본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가정 출신보다 훨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국가도 많고, 이런 나라에 함부로 "너희가 가난한 이유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난한다면 너무 잔혹한 태도일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나라에 가 보면 게으른 사람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이는 그 나라의 실업률이 높기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한국인도 가난하던 시절에는 외국인들로부터 "게으른 국민"이라는 비난을 들었지만(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이, "아침에 일찍 깨는 사람이 없어 조용한 나라"라는 해석도 있더군요), 지금은 잘살게 되면서 어느 나라보다 근면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독일인들도 가난했던 19세기엔 게으르다는 평판이 있었다는군요. 이러한 이유에서 제프리 삭스 교수나 장하준 교수 등은 경제수준의 차이가 노력의 차이에서 온다는 해석을 거부합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차이를 경제수준 차이의 원인으로 보는 해석이 있는데, 이는 막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가 대표적입니다. 베버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섞여 사는 독일에서 개신교도가 가톨릭교도보다 부유한 원인을 개신교의 교리가 자본주의를 낳았고, 따라서 개신교도는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열심히 돈을 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책을 쓰던 19세기엔 이러한 해석이 상당히 그럴듯했는데, 지금 독일의 경제 상황을 보면, 가톨릭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남부는 부유한 데 비해, 개신교가 강한 북부는 남부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뒤떨어집니다. 국가 간의 경제력을 봐도 과거엔 영국 등 개신교 국가가 훨씬 부유했지만, 지금은 이탈리아 등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와 대등하거나 앞설 정도로 경제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또한, 동아시아가 가난하던 시절엔 유교가 경제발전을 가로막는다는 해석이 유행했지만, 동아시아가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유교야말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습니다. 요즘은 BRICs 4개국의 경제발전이 눈부신데, 이 네 나라의 문화에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찾는 해석도 곧 등장하겠죠.
결국, 크게 놓고 보았을 때, 인류는 아직도 경제의 발전과 후퇴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도 <경제학의 향연>(Peddling Prosperity)에서 미국이 2차대전 이후에 유지하던 "경제의 마술"을 잃어버린 원인에 대해 "알 수가 없다."라고 설명합니다. 미국처럼 경제학자들이 늘 경제활동에 대해 연구하는 나라도, 왜 수십 년간 잘되던 경제가 갑자기 나빠졌는지 알 수 없다면, 경제활동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지 않은 나라의 과거사를 근거로 그 나라가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진 원인을 찾기는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자신의 무지를 화려한 수사로 포장해 마치 모든 경제현상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듯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 결과 대중은 "나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이해하고, 따라서 이들이 정부에 제안한 정책을 따르면 꼭 경제가 살아나겠지." 하는 환상을 갖게 되죠. 하지만, 지금 정부에 조언을 하는 경제학자들은 작년에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년에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온다고 예측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간은 매우 단순한 현상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잦은, 매우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계몽주의가 남긴 유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한다면, 미래에 대해 함부로 예측하기 보다는 겸손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겠죠. 경제에 대해서도 "미래는 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엔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를 모두 경계하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계몽주의와 경제학 연재를 마칩니다. 조금 무겁고 딱딱한 내용이라 재미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즐거운 주말 되시고,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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