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야기는 지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이야기의 인격성과 구체성 때문입니다. 역사의 초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이 지역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다."라는 인격의 구체적인 활동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세상을 통합해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 있는 별을 묶어 만든 별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인류는 별자리를 통해 무질서해 보이는 하늘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별들을 인격 단위로 무리지어 묶어놓고 나니, 하늘에는 수많은 연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난무하였고, 이러한 별들의 움직임을 총괄하는 질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상을 통합하는 지식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했고, 결국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비인격적, 물질적 실체가 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본 탈레스나 공기라고 본 아낙시메네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리토스 등은 이러한 좋은 예죠. 이렇게 인격이 없는 물질에서 세상의 근본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과학의 발달을 낳습니다. 과학은 연구의 대상이 비인격적이어야 하는데, 만약 연구의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라면 변덕을 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죠. 또한, 과학은 보편적인 법칙을 찾고자 노력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과학에서 하나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이 대상이 기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므로 새로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단서로 작용할 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인과관계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직관에 반하지만, 논리적인 결론을 더욱 중요시합니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는 이유는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하늘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오고, 따라서 직관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지구가 해 주위를 돈다는 것이 과학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인 인격성, 구체성, 직관적인 인과관계와 대척점에 서 있고, 그래서 대부분 민족은 전통적인 이야기에 얽매여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물론 그리스인들도 하루아침에 이야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이야기의 전통은 철학계에서조차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탈레스만 해도 "만물은 신들로 가득하다."라고 말했고, 초기 철학자 중 한 명인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격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였기에 전형적인 이야기의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적 가르침을 이야기(예화)를 통해 설명함으로 이야기와 철학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과 이야기를 결합했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철학에 종속시킨 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역사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였고,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인간을 만든 셈이죠. 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동원했고, 그가 창조한 이야기는 이성에 의해 창조된 도구라는 점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이야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인(당시의 시인은 서정시인이 보다는 이야기꾼에 가깝습니다)을 추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은 그가 이야기와 철학이 충돌할 때는 철학이 이야기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플라톤에서 발견되는 철학과 이야기의 불안한 동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이야기의 완벽한 소멸로 끝이 납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야기는 분석의 대상(그의 저서 시학이 잘 보여주듯)이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을 나누는 동반자는 아니었고, 결국 합리적인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은 이야기와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에서 시작된 합리성의 전통은 서양의 철학과 과학을 낳았고, 이 둘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서양문명의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유럽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제거하고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니 사람들은 이야기가 그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이야기를 다시 찾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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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상을 통합하는 지식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했고, 결국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비인격적, 물질적 실체가 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본 탈레스나 공기라고 본 아낙시메네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리토스 등은 이러한 좋은 예죠. 이렇게 인격이 없는 물질에서 세상의 근본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과학의 발달을 낳습니다. 과학은 연구의 대상이 비인격적이어야 하는데, 만약 연구의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라면 변덕을 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죠. 또한, 과학은 보편적인 법칙을 찾고자 노력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과학에서 하나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이 대상이 기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므로 새로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단서로 작용할 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인과관계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직관에 반하지만, 논리적인 결론을 더욱 중요시합니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는 이유는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하늘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오고, 따라서 직관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지구가 해 주위를 돈다는 것이 과학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인 인격성, 구체성, 직관적인 인과관계와 대척점에 서 있고, 그래서 대부분 민족은 전통적인 이야기에 얽매여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물론 그리스인들도 하루아침에 이야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이야기의 전통은 철학계에서조차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탈레스만 해도 "만물은 신들로 가득하다."라고 말했고, 초기 철학자 중 한 명인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격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였기에 전형적인 이야기의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적 가르침을 이야기(예화)를 통해 설명함으로 이야기와 철학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과 이야기를 결합했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철학에 종속시킨 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역사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였고,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인간을 만든 셈이죠. 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동원했고, 그가 창조한 이야기는 이성에 의해 창조된 도구라는 점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이야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인(당시의 시인은 서정시인이 보다는 이야기꾼에 가깝습니다)을 추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은 그가 이야기와 철학이 충돌할 때는 철학이 이야기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플라톤에서 발견되는 철학과 이야기의 불안한 동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이야기의 완벽한 소멸로 끝이 납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야기는 분석의 대상(그의 저서 시학이 잘 보여주듯)이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을 나누는 동반자는 아니었고, 결국 합리적인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은 이야기와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에서 시작된 합리성의 전통은 서양의 철학과 과학을 낳았고, 이 둘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서양문명의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유럽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제거하고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니 사람들은 이야기가 그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이야기를 다시 찾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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