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중심이 이야기에서 이성으로 옮겨오면서 이야기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결국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야기를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학문과 예술 곳곳에서 생겨났는데, 이중 가장 흥미로운 예는 역사학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유럽어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불어의 histoire, 이탈리아어의 storia, 독어의 Geschichte 등). 이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설명한 이래로 역사와 이야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죠. 하긴 일반인이 생각하는 역사란 "어떤 사람이 역사상의 어떤 시점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고, 그래서 어떤 결과가 생겼다."라는 기록이기에, 이야기의 세 가지 요소를 그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역사학계로 번지면서 "이야기 없는 역사"를 추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늘어났고, 이는 결국 아날학파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아날학파에서는 인물, 정치,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역사학을 거부하고, 양적인 자료에 의해 사회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구체적인 인물들이 역사의 한 시점에서 벌이는 사건들이 일으키는 결과," 즉 이야기를 배제한 역사학을 하겠다는 말이니, 이제 이야기와 역사가 분리된다는 말이죠.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아널드 토인비가 역사학에 분업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역사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한탄했을 때 이미 예견할 수 있던 문제입니다.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음에도 이야기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또 다른 영역으로는 문학을 들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듣기 원하는 욕구는 문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어느 민족을 봐도 가장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학작품의 대부분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현대주의 문학을 추구한 제임스 조이스(특히 Finnegans Wake)나 사무엘 베케트(특히 Malone Dies) 등은 실제로 이야기가 사라진 작품을 씁니다. 물론 이야기가 사라진 문학은 대단히 기괴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문학에까지 미친 좋은 예이기에 연구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습니다.

역사학과 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 이야기로부터 독립한 데 비해, 철학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야기로부터 독립합니다. 특히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변의 세계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글을 썼기 때문에 이들의 작품에서 이야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경험을 강조한 경험론자들은 조금 낫긴 하지만(베이컨은 New Atlantis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썼고, 버클리는 플라톤처럼 대화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습니다), 경험론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흄의 저작에서는 이야기가 거의 사라집니다. 칸트를 비롯한 독일의 관념론자들도 이야기를 배제하고 순수한 논리를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철학은 이야기로부터 일찍 독립했을 뿐 아니라 다른 영역보다 이야기의 가치를 일찍 재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키르케고르는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의 한계를 깨닫고 좀 더 인간의 본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을 찾고자 노력하는데, 그의 작품 중엔 이야기의 형태이거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 책이 많습니다(예를 들면 Stages on Life's Way나 Fear and Trembling). 니체도 이성 중심의 철학에 대해 반발하여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모색하였는데, 그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철학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철학과 다시 결합한 좋은 예입니다. 이처럼 철학에서 이야기의 부활은 20세기에 들어 프랑스로 이어져 사르트르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소설을 쓰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죠.

20세기에 들어 이야기가 부활한 가장 좋은 예로는 영화를 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야기가 파괴된 시기에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대중에게 끊임없는 이야기를 공급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영화사의 초기부터 대중은 악당을 응징하는 영웅,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는 남녀 등 매우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열광하였고, 결국 이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가장 잘 만든 미국의 영화산업은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학계에서 벌어진 이야기 파괴 현상은 영화계를 피해 가지 않았고, "이야기(내러티브)를 탈피한 영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60년대 이래로 많이 있었지만, 결국 영화의 주류는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 중심의 영화가 맡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화를 만들려면 많은 자본이 필요하고, 이러한 자본을 얻기 위해선 대중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 때문이죠. 어쨌든 이로 말미암아 영화는 다른 현대 예술이 대중의 외면을 받는 사이에 대중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TV 드라마도 이야기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미국 드라마건 한국 드라마건 뚜렷한 줄거리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예외가 있다면 미국에서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트콤 사인펠드인데, 사인펠드에는 가끔 이야기가 없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The Chinese Restaurant가 좋은 예인데, 중국음식점에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이 에피소드에는 상황은 있지만, 줄거리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해체된 것이죠. 극 중 사인펠드와 조지 코스텐자가 방송국에 가서 시트콤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도 "이야기가 없는 극을 만들고 싶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이 작품을 만든 사인펠드와 래리 데이비드(조지 코스텐자는 래리 데이비드의 분신이죠)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사인펠드는 지극히 대중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현대 예술계의 흐름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습니다(또 하나의 파격적인 사인펠드 에피소드인 The Betrayal은 시간의 역순으로 극이 진행됩니다. 같은 형식의 영화 Memento 보다 몇년이나 먼져 나왔다는 점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합리성에 밀려 사라지던 이야기는 합리성에 대한 실망과 대중예술의 발달이라는 두가지 원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으며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번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P.S. 연재를 시작해 놓고 글을 제 때 올리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출장이 있었고, 시차 적응 등으로 정신이 없다 보니 글을 쓸 여유가 잘 없었네요. 다음주에는 꼭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변함없이 블로그에 찾아와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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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