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을 때는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비난을 듣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지만, 서거 이후엔 좌파와 우파의 반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좌파는 그의 정책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던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단체, 개인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가 떠나갔다는 사실에 대해 큰 슬픔을 표현하는 데 비해, 우파는 "정적이 제거되었다."고 좋아하거나, 그의 죽음이 그들에게 정치적 위기를 불러오지 않을지 걱정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죽고 나니 누가 진짜 친구이고, 누가 진짜 적인지 분명해진 셈이죠.

평소에 그를 비난하던 좌파도 그를 인정하는 까닭은 그가 진정한 "바보"였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바보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지만, 한국의 바보는 자신의 이익을 악착같이 찾아 먹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책은 여러 가지 논란을 낳았지만, 최소한 그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소수의 우파를 제외한 국민 전체가 인정하고, 그래서 대다수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입니다.

바보 노무현의 존재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대단히 충실한 한국 사회라는 배경 때문에 더욱 돋보입니다. 굴곡이 많은 현대사를 거치면서 한국인은 "나를 보호하는 존재는 나 자신뿐이고, 내 이익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믿음이 굳건해졌습니다. 조선 말기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기에 국민을 돌보지 않았고, 조선 정부를 몰아낸 일본은 다른 민족이기에 한민족을 핍박했고, 일본이 떠나가자 또 다른 남의 나라 미국의 군대가 점령군처럼 찾아왔고, 독립정부를 세우자마자 전쟁이 나서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종신독재를 꿈꾸며 국민의 뜻과 어긋나는 정치를 벌였습니다. 이렇게 수십 년간 끔찍한 핍박과 고난을 겪고 난 한국인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한 투쟁을 벌일 각오가 된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로 거듭났고, 정이 많은 한국인 고유의 성품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잘살아보세"를 구호로 "가난의 한을 풀고 싶은" 국민의 정서를 자극했고, 경제발전의 성공으로 경제수준이 올라가자 "나도 이 기회에 팔자 고쳐보자."는 심리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강남이 개발되고 복부인이 생겨나면서 이사 몇 번 하면 집이 한 채 생길 정도로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자 나의 부동산 투기로 손해볼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고 너도나도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었습니다. 생존기계에게 남에 대한 배려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던 것이죠.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은 다시 어려움을 겪고, 한국인의 생존본능은 다시 한 번 자극을 받게 됩니다.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직업을 잃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힘을 합해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내 자식은 실업의 위험이 없는 안전한 직업을 얻도록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시경쟁만 배로 심해집니다. 2000년대 중반 풍부해진 유동성을 바탕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부동산 투기로 큰돈을 벌던 1970-1980년대 추억이 살아난 한국인은 다시 한 번 부동산 투기에 기대를 걸었고, 건설업계 출신으로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친화정책을 펼 것으로 기대되던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이기적인 태도는 가족 이기주의를 낳았고, 가족 이기주의는 지역 이기주의로 이어져서, 손바닥만한 나라지만 동과 서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고, 결국 정치판은 정책대결의 장이 아니라 지역 이기주의의 장으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절대적인 세를 과시하는 어떤 정당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판세가 굳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죠.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인구가 많은 지역 출신이지만, 그 지역 정치지도자가 원칙을 버리고 여당과 합당을 하자 "야합에 반대한다."며 합당을 거부하고 당을 떠났습니다. 그는 지역적으로 대척 관계에 있는 정치 지도자와 손을 잡고 고향에서 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보기 좋게 떨어져 버렸죠. 거기서 그의 정치 인생이 끝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결국 2002년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는 지역이라는 특권을 포기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정치 지도자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력의 특권도 포기하였습니다. 한국은 결국 정치, 경제, 언론, 법, 종교 지도자들이 혈연과 학연으로 연결되어 지배계층을 이루는 나라이고, 이들은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해 나갑니다. 한국의 지배계층은 전통적인 명문가문 출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굴곡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즉, 최고의 생존기계라고 할 수 있죠. 이들에게 "직위에 따른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는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편법으로 자식을 직원으로 채용해 세그을 포탈하기도 하고, 법을 어겨가며 편법으로 재산을 상속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생존경쟁이 몸에 뱄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도울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그들이 힘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나쁜 특성이 있습니다. 그들의 빈곤 대책은 "너희도 우리처럼 생존경쟁에서 이겨라. 그러면 문제는 해결된다. 너희가 가난한 것은 너희가 노력을 안 하기 때문이고, 너희처럼 노력을 안 하는 인간은 도움을 받을 자격도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가난한 사람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지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중 최초로 한국을 지배하는 계층과 대립각을 세웁니다. 그는 다른 정치인처럼 지배계층에 동화하고, 그들의 위한 정책을 펴는 대신, 지배계층을 공격함으로 사회의 비주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지배계층과 대립한 결과 그는 국회의원 대다수에 의해 탄핵을 당합니다. 당시 두 개의 거대 정당이 힘을 합쳐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가 탄핵을 극복하고 돌아왔지만, 한국의 지배계층은 끝까지 그를 미워했습니다. 언론은 연일 정부를 흔드는 보도를 쏟아냈고, 검사들은 그의 권위에 도전했고, 경제계는 "좌파 정부 때문에 투자를 못 하겠다"고 불평했습니다. 이렇게 지배계층이 그를 흔드니 결국 국민의 마음도 그를 떠났고, 그는 매우 인기가 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죠.

하지만, 그의 죽음을 계기로 돌아볼 때, 그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은,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지역적, 신분적 특권을 포기하였고, 이익을 쫓기 보다 신념을 쫓았고, 권력을 누리기보다 국민 전체를 생각했습니다.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은 정파와 관계없이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사실은 그가 참된 "바보"였다는 사실을 잘 증명합니다.

이제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보여준 희생의 정신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정신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밝게 타오르는 불로 남을 것입니다. 그가 남긴 이 불을 꺼트리지 않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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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아르바이트생인데, 시급이 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마 지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새로 지를 물건을 찾아볼 것이고, 미래에 대비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저축을 늘리기 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보기에 매우 정상적이고, 상식에 맞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인간이 단위 소득의 증대에 대해 지출이나 저축의 확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우 최근에 들어 생겨난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단위 소득이 증가하면 노동량이 감소하는 반응이 나타났고, 따라서 전체 소득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시급이 늘었으면 과거와 똑같이 일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행동 아니냐?"라고 따지시겠지만, 전통적인 사회에 살던 사람이라면 "시급이 늘었으면 일을 적게 하고도 같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데, 일을 줄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냐?"라고 따질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우리가 자본주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경제활동을 삶의 일부분, 그것도 매우 작고 하찮은 일부분으로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직업관을 보여주는 사농공상이라는 분류를 봐도, 돈을 가장 적게 만지는 선비가 가장 대접받았고, 돈을 많이 만질수록 격이 떨어져, 결국 돈을 가장 많이 만지는 상인은 가장 비천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돈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던 시대에는 돈을 많이 벌려는 노력은 곧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대부분 사람은 돈은 적절히 벌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당시엔 농사가 경제의 중심이었기에, 돈을 많이 벌고 싶어도 그럴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죠.

돈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돈을 벌려는 노력에 대한 멸시는 많은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해서 결국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바꾸는 능력을 얻게 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어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고대 그리스의 미다스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맘몬(돈의 신)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고,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돈을 사랑하는 저주스러운 마음(auri sacra fames)이 인간을 어려움에 빠트린다고 말했습니다. 유럽 중세 신학자들이 물질을 향한 탐욕(avarice)을 교만과 함께 가장 끔찍한 죄로 인정한 것은 당시 사회의 물질관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돈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막스 베버는 미국의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이러한 새로운 태도의 예를 찾습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해서 열심히 돈을 벌라."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르침은 우리가 보기엔 당연한 말이지만, 돈을 벌려는 노력을 죄악시하는 전통적인 사회의 가치관을 뒤엎는,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돈을 중요시하는 태도를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Der Geist Des Kapitalismu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정신이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진정한 자본주의가 탄생한 것이지요.

자본주의 정신을 옹호하는 이론적 토대를 놓은 사람은 바로 애덤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노력할 때 결국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 모두가 부유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과거엔 돈을 벌려는 노력이 이기심의 표현이기에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돈을 벌려는 노력은 모두를 유익하게 하기에 사회가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하게 되었죠.

사회가 돈을 긍정적으로 대하자, 전통적으로 돈에 대한 욕심을 부정적으로 보는 교회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고, 가능한 한 많이 저축하고, 가능한 한 많이 베풀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교회가 돈을 많이 벌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자면, 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상업이 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떠오르면서, 돈을 벌면 신분 상승이 가능한 시대가 열립니다. 이러한 때에 생겨난 속담이 바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라는 말이죠. 이 말은 "돈을 버는 일은 천하다."라는 말과, "돈을 열심히 벌라."라는 말 사이에 충돌이 느껴지는데, 이는 당시 진행되던 가치관의 변화 때문입니다. 게다가, "돈을 벌면 신분이 올라갈 수 있다"는 뜻까지 담고 있기에 당시 시대 상황에 잘 맞는 말이죠.

이처럼 돈을 적극적으로 버는 태도가 도덕적이고 올바른 태도로 인정되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열심히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전통의 가치인 공동체나 가정, 겸손과 절제는 무너졌고,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지요. 특히 "기독교"라는 전통이 돈을 중시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견제한 서구와 다르게(물론 20세기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교회가 자본주의에 편입되는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한국은 전통의 모든 종교(유교, 불교, 샤머니즘)가 무너져내린 공백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들어왔고, 이로 말미암아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자본주의 정신이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중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고,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막는 역할을 포기한 지난 20-30년 동안 사회 전체가 급격하게 자본주의화 하면서, 물질 이상의 가치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고, 남에게 큰 피해를 주더라도 나만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돈을 열심히 벌려는 자본주의 정신이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자본주의 정신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인류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편적 풍요"(universal opulence)에 한 발짝 다가섰습니다. 과거엔 부유한 왕, 부유한 귀족은 있었어도, 국민 대부분이 부유한 나라는 찾아볼 수 없었죠. 그에 비해 지금은 웬만한 선진국에선(미국 제외) 어느 이하로 가난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이는 자본주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신은 풍요와 함께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도덕도 예의도 염치도 모르고, 돈만 벌면 된다는 천박한 인식은 자본주의 정신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장 경제 체제에서 살아가지만, 자본주의 정신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 정신이 좋아서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괜찮겠죠. 자본주의 정신을 거부한다고 우파들이 말하는 "빨갱이"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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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시장

경제 2009/05/28 05:58
마르크스가 기초를 놓은 공산주의와 다르게, 자본주의는 한 명의 이론가가 만든 이념이 아니고, 따라서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기 전까지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당시엔 누가 "나는 자본주의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르크스가 당시의 불공평한 경제체제에 대해 비판하면서,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경제구조를 "자본 중심의 경제"라는 의미에서 "자본주의"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는 이름이 없는, "현재 경제가 흘러가는 모습"에서 "추구하거나 배척할 수 있는 이념"으로 거듭나죠.

많은 사람은 자본주의의 핵심을 자유시장경제(free market economy)로 규정합니다. 시장은 자원(resources)을 분배하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즉, 온갖 재화, 서비스, 돈 등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데, 이러한 재화, 서비스, 돈을 누가 얼마만큼 가질 것인지를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한국에서 1년에 생산되는 쌀 중 얼마를 개인이 소비하고, 얼마를 쌀과자 제조회사가 소비하고, 얼마를 막걸리 제조업체가 소비해야 할까요? 시장경제에서 이러한 문제는 시장이 가격을 통해 결정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각 가정의 쌀 소비량이 는다면 소매용 쌀 판매가 늘 것이고, 쌀과자가 인기라면 쌀과자 제조회사가 돈을 더 주고라도 더 많은 쌀을 소비할 것이고, 막걸리 판매가 는다면 막걸리 제조회사가 쌀을 많이 사들이겠죠. 만약 시장이 자원을 분배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시장을 부정하기 때문에 정부(엄밀히 말하면 정부의 통제를 받는 위원회)가 시장을 대신해 상품의 가격과 생산량을 정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각 상품의 특성과 소비자의 심리를 자세히 읽기가 어려워서 쓸모없는 제품을 많이 생산하거나, 인기가 높은 제품을 적게 생산하는 예가 많았죠.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시장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국은 전통적으로 정부가 특정 분야(과거의 중공업에서 최근의 건설업까지)를 지원해주는 정책을 쓰는 국가입니다. 이처럼 정부가 지원하는 분야는 시장의 결정과 상관없이 자원이 모이겠죠. 이러한 모습은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90년대 미국 경제의 성장은 미국 정부가 IT 산업을 밀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첨병을 자처하는 한국의 보수 언론은 자유시장경제를 절대 신뢰하고, 정부의 간섭을 극도로 경계하지만, 작년 가을 경제위기가 닥치자 한결같이 정부에 "경기 활성화 정책을 내놓아라"고 닦달을 했습니다. 즉, 이들도 경우에 따라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죠. 따라서 공산주의자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시장 경제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도 인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정도에 대해선 의견이 나뉘죠.

흥미로운 사실은, 요즘은 공산주의자들도 시장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지만, 어느 나라보다도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데 열심입니다. 북한도 정부가 배급을 포기한 지 오래고, 북한 주민들은 미약하게나마 존재하는 시장에 의존해 생활하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세상에 시장경제를 완전히 거부하는 사람은 매우 흔치 않다고 봐도 됩니다.

이는 역사를 놓고 볼 때 매우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시장은 인류 역사상 늘 존재하였습니다. 한국만 봐도 조선시대든 고려시대든 시장이 없는 시대는 없었죠. 그리고 이러한 시장은 늘 자유로웠지, 누가 "당신은 쌀을 한 가마니를 팔아야 하고, 당신은 비단 한 포를 사야 한다"고 규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느 곳이나 정부의 간섭과 세금 징수는 존재했지만, 이는 간과할 수준이었고, 상거래의 자유는 늘 시장의 중요한 특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시장을 부정하면서 시장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잠시 생겨났지만, "시장이 없는 경제"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지금은 공산주의가 탄생하기 이전처럼 모두가 시장을 인정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만 존재한다고 자본주의는 아닙니다. 시장은 자본주의의 형식이자 필요조건이지, 자본주의의 완성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로 만드는 것은 산업혁명과 함께 탄생한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내일은 이에 대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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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당시의 많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 심취했지만, 이와 동시에 개인을 억누르는 집단주의의 위험에 대해 깊이 깨달았고, 전체주의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고 경고하기 위해 1984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가 창조한 미래의 세계에서 시민은 정부의 사실 날조에 근거한 선전에 세뇌되어 암울한 현실에도 정부에 저항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이 소설 속의 독재정부는 국민을 조종하기 위해 Newspeak을 이용합니다. Newspeak은 영어와 비슷하지만, 정부의 정책과 어긋나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문법을 단순화하고 어휘를 줄인 언어입니다. 소설 속의 독재정부가 Newspeak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람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는데 언어가 단순해지면 생각도 단순해지고, 따라서 생각이 단순한 국민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기에 정부에 함부로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가 국민을 속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언어를 파괴하고 나면 국민은 정치자의 잘못을 지적할 방법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정직한 정치가일수록 언어를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써서 국민의 비판을 막아버립니다. 그에 비해 정직한 정치가라면 속일 필요가 없기에 말이 시원시원하게 나오기 마련이죠.

정치가 언어를 파괴하는 예는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라크 침공"을 "이라크 해방"으로 표현한 부시 행정부도 그러한 예죠.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문화 혁명"이라고 부른 중국 정부도 언어를 파괴한 예입니다. 하지만, 언어 파괴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부는 바로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언어파괴는 대통령 취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출퇴근 시간대 직행열차 운영 등 각종 세부사항에 대해 시시콜콜 정책을 쏟아내던 인수위는 영어조기교육 등 민감한 사항에 대해 발표를 했다가 여론이 안 좋으면 무조건 "오해다." 한마디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서 처음부터 이명박 정부는 "오해정부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자신도 "통신비 인하" 공약을 내걸었다가 "통신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통신비가 싸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통신비를 절약하는 방법은 통신비를 올리는 것이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정부가 통신비 인상을 추진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믿기지 않겠지만, 제가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에 쓴 이명박 정부, 양치기 소년이 되려는가?에 보면 좀 더 자세한 상황이 나옵니다). 미국과 쇠고기 수입 협상에서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임하겠다"는 말은, "문제 있으면 안 사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뜻으로 밝혀지면서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촛불시위가 절정에 이르자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촛불 시위를 바라봤다"는 그의 감상적인 발언은, 결국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공격 앞에서 의미를 잃고 말았죠. 그리고 떠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깍듯이 예우하겠다"는 말은... 이건 뭐 말할 가치도 없군요.

이명박 정부의 언어사용은 단지 화려한 수사를 넘어 언어의 본질을 뒤흔드는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환경을 보전하는 대신 개발함으로 환경을 파괴하면서, 이러한 작업을 "녹색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환경 보호론자들이 좋아하는 Green이라는 말을 가져다 환경을 파괴하는 데 써 버리는 것이지요. 정부가 이런 식으로 언어를 파괴한다면, 도대체 정부의 어떤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부가 "경제가 회복되었다"고 말하면 믿어도 될까요? "한국이 선진국이 되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언어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 간단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언정, 언어의 유희를 즐기지도 않고, 문학작품을 읊조리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성의 반영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처럼 언어를 파괴한다면 인간성도 따라서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간성이 파괴된 인간은 정의감은 없고 본능만 남기 때문에 권력자가 아무리 불의를 저질러도 본능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권력자에게 반항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권력자라면 인간성이 파괴된 인간을 다스리기가 훨씬 편한 법이지죠.

하지만, 진정한 인간성이 남아있는 인간이라면 이처럼 언어가 파괴되는 현상을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해야 올바른 언어이고, 올바른 인간이지요. 지금 한국에 어둠이 짙게 깔린 형상이지만, 이러함 어둠 속에도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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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의 재림

정치 2009/05/25 17:52
많은 국민에게 큰 슬픔을 안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집권세력엔 두려움으로 작용했나 봅니다. 뉴스를 들으니 정부는 분향소가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부근을 경찰버스로 에워싸고 경찰들을 주둔시켰더군요. 얼마 전까지 대통령이셨던 분이 돌아가셨고, 시민이 자발적으로 추모하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정부 눈에는 이들 시민이 "잠재적 시위꾼"으로 보였나 봅니다. 하긴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말처럼, 실력도, 인기도, 정당성도 없으면서 살아 있다는 이점 하나로 버티는 사람은 죽은 사람조차 무섭기 마련이겠죠.

이명박 정부는 "실용"을 구호로 내세우고 집권했지만,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통치이념은 "공포"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내게 해서 정부의 정책에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지요. 정부는 공포심을 일으키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우선, 도심에 전경버스를 배치하고 수많은 경찰을 주둔시킴으로 육체적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이는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대학 캠퍼스에 경찰을 주둔시킨 것 만큼이나 시민에게 심리적 압력을 가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두 번째, 미네르바 구속에서 보듯, 정부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법적으로 공격합니다. 이는 이미 수많은 블로거가 블로그를 폐쇄했거나 비공개로 바꾼 데서 보듯 파급 효과가 큽니다. 세 번째, 강만수 장관, 어청수 청장이 아무리 욕을 먹어도 한동안 경질하지 않았던 예에서 보듯, 여론을 무시함으로 "정부를 위해 궂은 일을 한 사람은 정부가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알림으로 정부 구성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국민과 대치하도록 격려하고, 국민은 "아무리 정부로부터 피해를 당해도 결국 나만 억울할 뿐이구나"라는 절망감에 빠지도록 합니다.

지금 상황은 70-80년대 군사정권 당시 정부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당시 군사정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정당성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국민을 다스리는 유일한 길은 공포심 유발뿐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정부에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므로 많은 사람이 감히 정부를 비난하지 않도록 압박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고문은 없다고 하지만, 고문만큼이나 무서운 고소, 고발, 세무조사 등으로 사람들을 압박하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국민은 정부에 대해 비판하기를 겁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겁한 정책이고, 빨리 사라져야 할 정책이지 결코 정상적인 정책이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정부는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찼고, 따라서 국민은 정부를 비판할 권리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당시엔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를 억누루고자 광화문 네거리를 막아버릴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죠. 이처럼 정당성에 자신이 있는 정부는 결코 공포정치를 실시하지 않습니다. 서유럽 대부분 국가도 국민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고소, 고발을 통해 국민을 겁주는 예는 극히 드뭅니다. 물론 이탈리아는 예외적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지 않은데, 이는 이탈리아가 워낙 정치적 후진국이기 때문이고, 서유럽에서는 흔치 않은 상황입니다.

물론 이명박 정부도 선거로 당선된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정당성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손님으로 초대받아 남의 집에 들어간 사람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손님의 자격을 잃듯, 정당하게 선거로 뽑힌 정부라 할지라도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정책을 펴는 순간 정당성을 잃기 마련입니다. 정당성을 잃으면 국민이 두렵고, 국민이 두려우면 국민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정책에 의존하기 마련이죠. 지금 이명박 정부가 그런 모습이고, 대한문 주위 봉쇄는 이러한 두려움의 표현일 뿐입니다.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떠나간 분이 아쉽고 그리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픈 마음뿐이죠. 그러한 애절한 마음을 무시하고, 끝까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만에 하나 벌어질 시위의 가능성" 조차 제거해 버리려는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정말 역겹기 그지없습니다. 자신들이 정당하다면 아무리 많은 시민이 모인들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워낙 국민의 뜻과 먼 정치를 펼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자신들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면 반정부 시위를 벌일 것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과연 이러한 현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답답하기만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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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접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참으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 검찰조사를 받는 중이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끝까지 꿋꿋이 싸워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시다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누구보다도 많은 욕을 먹었지만, 사실 이는 많은 부분 언론의 왜곡 때문이었고, 실제로 자료만 놓고 봤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실용적으로 낭비 없이 국가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우파에겐 좌파라고 비난을 들었고, 좌파에겐 우파라고 비난을 들었지만, 그는 이념에 따르기 보다는 자신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었고, 그러한 결정들은 이념의 관점이 아니라 현실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의 정책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바는 많았지만, 어차피 완벽하게 나와 뜻이 맞는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를 삼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을 한 후 자신이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개인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저를 버려달라"는 그의 말은, 그가 자신을 "버려질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는 뜻이죠. 하지만 많은 국민은 여전히 그를 국가의 어른이자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았고,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아끼고 사랑한 국민에게 이러한 사태는 너무도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떠나갔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쉽게 사라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분이 못 다 이룬 개혁의 꿈이 한국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만을 바랍니다.

P.S. 여러분 중엔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도 있고 반대자고 있겠지만, 고인에 대한 예의를 잊지 말아주시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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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의 인터넷에서 가장 창조적 에너지가 넘치는 부분은 바로 만화의 영역입니다. 과거의 만화는 거의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화실처럼 한 명의 만화가가 여러 명의 문하생을 두고 많은 작품을 생산해내는 방식이었는데 비해, 요즘 인터넷을 주도하는 만화는 주로 한 명의 젊은 만화가가 지극히 개인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씨름하며 창조해내는 방식이기에 훨씬 생동감 넘치고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습니다. 과거엔 만화로 세상과 만나려면 만화책을 출간해야만 했고, 이는 대단한 실력을 인정받아야 가능했기에 자연히 실력을 쌓을 때 까지는 남의 밑에서 열심히 문하생으로 활동하는 일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아이디어만 좋으면 장난 같이 그린 만화로도 인터넷에 발표해 큰 인기를 끌 수 있고, 따라서 젊은이들의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죠. 물론 지금도 대부분의 만화가는 만화만 그려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터넷 만화 붐이 지속될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활발하게 창조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지만 만화를 그리려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만화의 인기가 높다는 증거입니다. 만화는 아이들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른 중에서도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예를 들어, 미드 빅뱅 이론에 보면 이공계 석박사들이 모여 만화가게(comic book store)에 자주 놀러가죠). 그러면 왜 만화는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요? 왜 소설은 읽기 싫어하는 사람이 만화는 돈을 내면서라도 사서 보려고 할까요? 물론 "만화는 웃기니까"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그린 아트 슈피겔만의 <쥐> 처럼 웃지기 않는 만화도 많습니다. 만화의 인기에 대한 질문은 "만화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처럼 인기가 많은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낳기 마련이죠. 하지만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만화의 본질에 대해 연구한 사람은 적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콧 맥클루드의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는 만화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만화로 구성된 이 책은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만화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깊고 철학적인 탐구를 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만화를 "순차적 예술", 만화의 매력을 "간략화를 통한 감정이입의 용이성"에서 찾는 맥클루드는 다양한 만화를 추상성, 현실성, 언어성이라는 세 축을 기준으로 배치하는데, 이는 대단히 의미 깊은 작업으로 보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은 "만화를 그냥 그리면 되지, 뭣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부정적으로 보겠지만, 이는 매우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한 명의 만화가 뒤에는 만화가가 되기 원하는 수백명의 만화가 지망생이 있습니다. 이들은 만화를 잘 그리는 방법을 배우기 원하고, 만화를 잘 그리는 방법을 배우려면 만화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만화가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만화의 이론 정립이 필수적이고, 이런 책은 만화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어떤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그 일을 잘 하도록 가르치는 능력이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차르트도 귀족 자녀에게 키보드 연주를 가르쳤는데, 영 학생들의 실력이 늘지 않아 학부모들의 불만이 많았다죠. 이처럼 많은 사람은 실력은 있지만, 그 실력을 남에게 전달해줄 능력은 없습니다. 이는 대부분 자신이 하는 일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자신이 하는 일을 이론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줄 수 있고 그 일을 객관화할 수 있기에 이론적 발전에 기여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론적인 토대를 쌓아가면서 일하려면 훨씬 시간이 많이 듭니다. 예를 들어, "리더십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냥 리더가 돼서 조직을 이끌어 보면 훨씬 리더십을 빠르게 키우겠죠. 하지만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리더가 해야 될 일, 리더가 하면 안 되는 일에 대해 훨씬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장기적으로 본다면 더 훌륭한 리더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유럽에서 일하면서 배우는 것 중의 하나는 일할 때 이론적 토대를 쌓는 훈련입니다. 유럽인들은 보통 어떤 주제에 대해 가르칠 때, 그 주제의 정의부터 시작합니다. 정의는 곧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예를 들어, 앞에 소개한 <만화의 이해>도 "만화란 무엇인가?"란 정의를 내리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에 비해 한국인은 "그거? 대충 아는 일이잖아. 정의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어떻게 그 일을 잘 하는지부터 시작하자."고 말하는 경우가 많죠. 즉, 유럽인은 What? 부터 시작하는데 비해 한국인은 How?부터 시작하는 셈입니다. 물론 How?부터 시작하면 빨리 앞서갈 수는 있지만, "지금 내가 이 일을 왜 하지?"라는 의문이 들면 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고 나면 What?에서 시작한 사람에게 뒤처지기 마련이죠.

전에 여기서 정원 공사를 돕게 되었는데, 같이 일하던 사람이 "일을 너무 빨리 하지 말고, 잠깐 물러서서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모라"고 충고하더군요. 땅을 파는데 너무 많이 판 것은 아닌지, 평탄화 작업을 하는데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았는지 보려면 잠시 일을 멈추고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봐야겠죠. 마찬가지로 다른 일을 할 때도 일의 속도만 생각하지말고, 일의 전체적인 상황이나 큰 그림을 생각하며 일할 때 결국은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이론적 고민, 본질에 대한 고민은 바로 이처럼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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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이정환님의 블로그에 보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언론인 1위로 블로거이자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 2위로 허핑턴 포스트라는 팀블로그 형태의 사이트를 창업한 아리아나 허핑턴이 뽑히는 등, 25명의 중요 언론인 중 블로그 관련자가 5명에 이를 정도로 블로그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글이 올라왔더군요. 역시 미국에서 블로그는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 전통적인 TV 방송국이나 신문사 만큼이나 중요한 주류사회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긴 전설적인 테크 칼럼니스트인 데이빗 포그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전파하는데 앞장서는 세스 고딘 등도 열심히 블로그를 운영할 뿐 아니라, 이들의 블로그가 엄청난 독자를 확보하였다는 사실을 봐도 블로그의 주류 진입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과 비교하면, 한국의 블로고스피어는 참으로 낙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운영한 것이 2007년말부터인데, 1년 반이 지난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더 후퇴하면 후퇴했지, 크게 발전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는 곧 전국민이 블로그를 만들고, 스타 블로거는 외국 처럼 엄청난 수익을 얻는 시대가 오리라는 흥분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블로그는 하나의 틈새 영역(niche)이 되어 버렸기에 일반인은 블로그를 생소해하는 분위기고, 블로그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도 2008년초까지는 다음 블로거뉴스에 송고해서 베스트도 여러 번 뽑히고 해서 잘 알지만, 하루에 만 명씩 찾아오는 블로그도 한달에 광고 수익 30만원 벌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 천 명 찾아오는 정도로는 생활비는 커녕 용돈도 안나온다는 뜻이죠. 그러니 "전업 블로거"는 미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물론 블로거로 인기를 끌고, 이를 바탕으로 책을 내거나 강의를 해서 생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블로그 운영이 아닌, 작가와 강사로 생활비를 버는 것이기에 "전업 블로거"라고 하기가 어렵겠죠.)

블로고스피어의 침체는 한국적 인터넷 환경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미국은 기업가가 새로운 흐름에 맞는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주류 언론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일반인이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창의성을 살려 인기를 끌고, 이는 좋은 컨텐츠의 대량생산으로 이어져 더욱 사용자가 늘어나는 선순환을 보입니다. 짧은 글을 쉽게 올리는 트위터라는 서비스가 생겨나고, CNN 등 주류 언론이 이를 받아들여 트위터로 소식을 전하고, 일반인 사용자들 중에서도 트위터를 통해 재치있는 글을 올리는 사람이 늘고, 이처럼 주류 언론과 적극적인 일반인 사용자가 늘면서 트위터에 등록하면 흥미로운 짧은 글을 많이 접할 수 있기에 갈수록 사용자가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좋은 예입니다. 페이스북이나 flickr 등도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성공을 거두었죠.

그에 비해, 한국은 대부분의 서비스가 미국 서비스의 한국판 개념으로 시작하기에 독창성이 없고, 서비스를 시작해도 주류 회사나 언론이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려고 하지 않고, 일반인 중에서라도 이러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사람이 적고, 이처럼 주도적 사용자들이 적으니 컨텐츠가 쌓이지 않고, 결국 일반인들은 실망해서 서비스 이용을 포기하고 마는 악순환이 자주 발생합니다. 블로그도 미국에서 나온 개념을 한국에서 받아들인 예인데, 일단 블로그가 관심의 대상이 된 후에도 조중동이나 KBS, MBC, SBS 등 주류 언론은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자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해 생색만 내면서 공짜 컨텐츠를 얻는 전략을 썼고, 일반인은 처음엔 조금 호기심을 느꼈지만 블로그 방문자 수도 많지 않고 광고 수익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열심히 운영하는 사람이 늘지 않았고, 이렇게 해서 좋은 블로그 컨텐츠가 많이 생산되지 않자 블로그에 대한 관심도 줄고, 블로고스피어 자체도 위축되어버렸죠.

한때 많은 공공기관, 기업이 블로그 도입에 관심을 보였지만, 한국 문화에서 주류 조직이 블로그를 운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블로그는 아무나 찾아와 블로거와 댓글로 소통하는, 참으로 평등한 매체인데(그에 비해 신문은 읽고 난 후 기자나 편집자에게 즉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일방적 매체이죠), 주류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블로그를 통해 찌질한 댓글을 달지도 모르는 익명의 다수를 만나기를 꺼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류 기업가나 언론인 중에서 제대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죠. 게다가, 모 언론사의 대기자는 자신의 칼럼에 대해선 댓글도 못달게 막아놓을 정도로 "나는 잘났으니 너네는 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말을 듣지 않겠다"는 식의 권위주의가 아직도 지배하는 한국의 언론계 특성상, 노벨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이 악플러와 싸우며 블로그를 운영하는 미국의 모습은 정말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죠.

물론 한국에도 박경철님이나 이찬진님 처럼 사회적으로 유명하면서 블로그도 제대로 운영하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사실은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싸이월드는 흥미롭게도 미국의 인터넷 서비스가 성공한 과정을 그대로 밟았다는 점(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보다 먼저 나온 Social Network 서비스->유명인들도 미니홈피를 개설->일반인도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활동->대부분의 사람이 싸이를 하니 싸이의 유용성이 커지면서 결국 큰 인기)에서 중요한 예입니다. 즉, 싸이월드는 한국에서도 주류 사회와 일반인 적극 활동가의 참여로 인해 성공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셈이죠.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라는 말은 하드웨어와 통신망을 기준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받아들이는 마인드와 컨텐츠의 양과 질을 따져보면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라기엔 매우 부족한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사용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새로운 서비스가 많이 나오고, 주류 사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서비스의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일반인이 늘어야 한국도 서비스 부족, 컨텐츠 부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은 독일 공휴일이라 저도 하루 쉬고, 금요일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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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에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찰스 폰지(Charles Ponzi)는 빠른 시일 안에 큰 돈을 벌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다 모두 실패하고, 결국 전과 기록과 빚만 남은 우울한 처지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어느날 스페인에서 날아온 편지에 동봉된 국제우편회신 쿠폰을 본 그는 돈을 벌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원래 국제우편회신 쿠폰은 다른 나라로 편지를 보낼 때, 답장용으로 쓰라고 넣어 보내는 증서인데, 1차대전을 거치며 각국의 환율이 크게 변했지만, 국제우편회신 쿠폰의 가격은 아직 환율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폰지는 미국 달러를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한 이탈리아로 보내 국제우편회신 쿠폰을 사고, 이를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시 빚에 쪼들리던 폰지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행할 돈이 없었기에 투자자를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는 투자자를 만나면서 "소수의 고액 투자자를 찾기 보다, 다수의 소액 투자자를 찾는 편이 쉽다" 는 사실을 깨닫고, "90일 만에 투자금을 두 배로 돌려 줍니다"고 광고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읍니다.

엄청난 수익률을 내건 탓에 투자자는 빠르게 늘어납니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국제우편회신 쿠폰 사업은 결국 실행이 어려운 것으로 드러나고(예를 들어, 국제우편회신 쿠폰을 미국으로 가지고 온다고 해도 이를 우표로 바꿀 수 있을 뿐, 현금화하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은행의 주식을 사들이는 등 새로운 수익사업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이 아무리 많은 수익을 올린다고 해도, 투자자에게 약속한 고수익을 내기엔 부족했습니다. 결국, 그의 사업은 "Robbing Peter to pay Paul"(피터에게 돈을 훔쳐 폴에게 돈을 갚는) 방식으로 굴러갔는데, 이러한 방식이 유지되려면 투자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늘어나야만 하기에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업 방식에 대한 의혹이 커지면서 당국의 수사가 시작되고, 그의 사업 방식이 밝혀지면서 폰지의 사기는 끝이 나게 됩니다.

폰지 사기(Ponzi's Scheme)라는 책을 쓴 Mitchell Zuckoff는 폰지가 처음부터 사기를 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투자자를 모으는 과정에서 워낙 과장된 수익을 약속하였고, 게다가 원래 사업계획이 틀어지니 사기로 변질해 버렸다고 설명을 합니다. 즉, 폰지가 욕심을 내지 않고 작은 자금을 마련해 다른 나라 국제우편회신 쿠폰을 사왔다면 우표를 기업에 할인 판매하는 방식 등으로 작은 수익을 낼 수 있었겠지만, 큰 돈을 벌 욕심에 지키기 힘든 약속을 하였기에 결국 자멸하고 말았죠.

1997년 알바니아는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고수익을 보장하는 방식의 사기에 말려들어 크게 어려움을 겪습니다. 원래 알바니아는 공산주의 국가였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정보통제가 심해서, 대부분의 국민이 "알바니아는 지상낙원"이라는 말만 믿으며 살던 곳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오자 국민은 극도의 혼란을 겪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부 사기꾼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돈을 투자하면 빠른 시일 내에 큰 수익을 올리게 해주겠다"고 국민을 유혹했고, 국민은 "이제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으니 우리도 큰 돈을 벌어보자"는 욕심에 이들에게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알바니아 정부까지 국민에게 이러한 투자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였으니, 국민들은 더욱 안심하고 투자에 나설 수 있었죠. 하지만 폰지 사기가 늘 그렇듯,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수익을 돌려주지 못하면서 피라미드는 무너져 내렸고, 인구가 3백만 명 밖에 안 되는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이러한 금융 사기로 말미암은 피해액이 12억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국민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정부는 무너졌으며, 전국이 내전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후로 알바니아가 평온을 되찾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죠. 자본주의의 단맛을 빨리 보려던 알바니아인들은 혹독한 수업료를 낸 셈이죠.

알바니아의 예를 본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하고 비웃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뒷사람의 돈으로 앞사람에게 갚는" 수법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주식시장의 급등하는 주식이죠. 주식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투자지만, 욕심을 부리는 순간 투기가 됩니다. 이러한 욕심은 기업의 가치와 상관없이 급등하는 종목으로 모여들기 마련이죠. 처음에 만원에 거래되던 주가가 갑자기 만 오천원으로 뜁니다. 그 기업의 수익을 볼 때 이는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면 주가는 오히려 더 빠르게 오르기 마련이죠. 만 오천원이 며칠 만에 다시 이만 원이 되고 나면 "지금 사서 폭락하기 전에 팔아치워야지"하는 생각으로 사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죠. 즉, 폭탄 돌리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국, 더 이상 새로운 투자금이 흘러들어오지 않으면 오만원까지 올랐던 주가는 다시 만원으로 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나중에 투자한 사람은 먼저 투자한 사람이 큰 수익을 올린 만큼 큰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지금 세계 각국이 추진하는 경기 부양책도 이러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실물경제가 정말 살아나는 중이라면 지금 투자해도 되겠지만, 실물경제는 여전히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정부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투기자금이 몰려드는 시장에 들어간다면, 이는 먼저 들어간 투기꾼들의 용돈을 대주는 셈일 뿐입니다. 물론 정부로서는 경제를 살리려고 경기부양책을 쓰는 것이지만, 의도가 좋다고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폰지에게 속은 투자자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정말 정부가 제시하는 청사진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를 잘 판단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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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흔히 하는 불평 중 하나가, 남자는 여자를 너무 외모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남자들도 그리 부정을 하지 않죠. 오히려 그렇게 따지는 여자들에게 남자들은 "예쁜 게 좋을 걸 어떡하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왜 남자들은 이렇게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일까요? 왜 많은 남자는 여자의 미모가 배우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느끼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유전자에 숨어 있습니다. 유전자는 자신을 배가하려는 욕구로 똘똘 뭉친 존재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The Selfish Gene)라는 표현을 썼죠. 유전자가 자신을 배가하려면, 즉 대대로 유전자를 퍼트리려면 유전자가 형성한 인간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 좋은 배우자란 마음이 착하고 일 잘하는 배우자가 아니라, 건강한 2세를 낳고 키우는데 도움이 될 사람을 뜻합니다. 남자가 보기엔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가 그러한 배우자죠. 만약 심한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지닌 여자와 결혼한다면, 내 유전자와 배우자의 유전자가 섞인 자손도 심한 결함을 타고나서 결국 금방 죽어버릴 가능성이 크겠죠. 따라서 남자의 유전자에겐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가 최고의 배우자감이겠죠.

요즘은 유전자 이상 여부를 확인하려면 유전자 검사를 받으면 되겠지만, 과거엔 그러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외모만 보고도 유전자의 건강을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얼굴의 균형이 안 맞는 여성보다는 얼굴의 균형이 잘 맞는 여성이 건강한 유전자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크고, 피부가 거친 여성 보다는 피부가 말끔한 여성이 건강할 가능성이 큽니다. 남자는 이처럼 건강한 유전자의 증거를 보이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몸매도 그렇습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육감적인 몸매란 사실 여성 호르몬이 잘 작용해서 빚어진 몸매입니다. 이렇게 여성 호르몬이 잘 작용한 사람은 임신과 출산도 잘할 가능성이 크죠. 제가 아는 어떤 산부인과 의사는 여성의 몸매만 보고도 "이 여자는 임신이 힘들겠다"고 진단을 하더군요. 그만큼 체형과 임신능력은 관계가 깊습다. 사실 몇 십 년전만 해도 여성들은 다른 여성의 뒷모습만 보고도 "애를 잘 낳을 여자"인지 아닌지 쉽게 구분했습니다. 의사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아이를 쉽게 낳을 수 있는 여자는 좋은 신붓감이었던 시절의 일이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남자들이 좋아하는 몸매는 크게 봐서 아이를 잘 낳는 몸매입니다.

남자가 건강한 유전자를 소유한 여자, 여성 호르몬의 작용으로 아이를 잘 낳을 여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면, 여자는 아이를 잘 챙겨줄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기 마련입니다. 원시시대에는 남자가 사냥 능력이 없다면 아이들이 굶주리고, 따라서 몸이 약해져 쉽게 병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가 공급자의 능력이 있는지를 중요시하기 마련이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들이 남자의 직업 보고 결혼하면 남자들은 "속물"이라고 야유를 보내지만, 여자에게 이러한 선택은 남자가 예쁜 여자와 결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대부분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의 공급에 유지하여 살았기 때문에, 무능한 남편은 아내와 자식을 굶주리게 하고, 따라서 유전자가 영원히 유지되는 데 큰 방해물이 되겠죠. 반대로 유능한 남편은 아내와 자식에게 충분한 물자를 공급해서 자손이 배가하는데 크게 이바지를 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자는 유능한 남자를 배우자로 선택하는 본능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성이 유능한 남자를 좋아하다 보니, 남자들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반응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것도 유전자의 반응인데, 여성에게 선택되어야 유전자를 퍼트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죠. 한때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끈 "Who let the dogs out"이라는 노래는 개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 자기 능력 과시하려고 설치는 남자에 관한 노래입니다. 파티가 열리면 남자들은 말로든 춤으로든 능력을 입증해서 여성들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죠. 이처럼 "여자가 유능한 남성을 좋아하고, 남성은 여성에게 유능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상황은 오늘날 세계가 겪는 경제위기의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윌리엄 보너와 라일라 라지바는 Mobs, Messiahs, and Markets에서 "미국 남성들이 유전자를 퍼트리려는 본능 때문에 빚을 내서 불필요하게 큰 집과 비싼 차를 사들였기에 경제위기가 닥쳤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과장된 주장일지 모르지만, 경제를 움직이는 원인을 합리적 선택이 아닌 유전자의 본능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보통 유능한 남자라면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공격적인 사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렇게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남자의 외모(각진 턱, 온몸에 난 털 등)에 대해 특별히 끌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여성이 좋아하는 남자는 자상하고 잘 배려해 주는 사람이죠. 이는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남자는 가정을 잘 돌보지 않기에 자녀 양육에 신경을 잘 쓰지 않고, 따라서 유전자를 물려받은 다음 세대의 생존에 기여하지 못합니다.그에 비해 자상한 남편은 자녀를 잘 돌보기 때문에 자녀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여자는 자상한 남자에 대해 끌리는 본능이 자랐죠. 또한,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남자는 모험심이 많아서 전쟁터에서 겁 없이 설치다 일찍 죽어버릴 가능성이 크고, 이는 가족의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도 여자는 자상한 남자를 좋아하는 본능이 생긴 것이죠.

이처럼 남자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이나, 여자가 유능하고 자상한 남자에게 끌리는 마음은 모두 "유전자의 자기 복제 욕구"에 근거한 본능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능은 아주 오래전에 형성이 되었고, 지금은 유전자의 욕구와 연관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아이를 아예 낳지 않으려는 젊은이도 많은데, 이들은 건강한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잘 돌볼 사람과 결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예쁜 여자, 유능한 남자를 배우자로 맞으려는 욕구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성형수술로 외모를 예쁘게 바꾼 여성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기엔 수술전보다 전혀 나아진 것이 없는데, 남자는 성형수술로 예뻐진 얼굴에 대해 매력을 느낍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인이 처한 곤경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즉, 유전자의 본능(자기복제)이 인간의 본능(예쁜 여자, 유능한 남자와 결혼하고픈 마음)으로 표현되고, 인간의 본능은 인간의 행동(예쁜 여자, 유능한 남자와 결혼해서 건강한 2세를 봄)을 낳아 결국 유전자의 본능이 성취되는 것이 과거의 인간이었다면, 현대인은 유전자의 본능(자기복제)은 변함이 없고, 유전자의 본능에 기초한 인간의 본능(예쁜 여자, 유능한 남자와 결혼하고픈 마음)까지는 변함이 없지만, 이렇게 본능을 따라 행동해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함으로 유전자의 본능(자기복제)은 실현되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의식의 수준에서는 욕구충족(원하는 배우자를 만남)이 되는데, 유전자의 수준에선 욕구충족(건강한 2세를 통한 자기복제)이 안 되는 현대인이 많다고 볼 수 있죠. 어쩌면 현대인에게만 나타나는 근거 없는 불만, 불안 등은 불만에 빠진 유전자가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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