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09/06/30 육체와 정신 (5)
  2. 2009/06/27 아동기가 없는 아이들 (3)
  3. 2009/06/26 노란 양말 (10)
  4. 2009/06/25 이란인의 참모습 (1)
  5. 2009/06/24 독재와 인터넷 (2)
  6. 2009/06/22 격화하는 이란의 반정부 시위 (9)
  7. 2009/06/20 불신의 시대 (4)
  8. 2009/06/19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4)
  9. 2009/06/18 지식의 객관화 (9)
  10. 2009/06/17 이탈리아식 피자 만들기 (1)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저는 블로그에 올릴 글의 아이디어를 주로 산책할 때 얻습니다. 집안에 가만히 있을 때는 생각이 안 떠오르는데, 밖으로 나와 걷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런 일이 늘 반복되다 보니 '과연 왜 산책을 하면 아이디어가 떠오를까?' 하는 의문이 생기더군요. 그런데 얼마 전 John J. Ratey와 Eric Hagerman가 쓴 Spark: The Revolutionary New Science of Exercise and the Brain 라는 책을 읽다 보니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해질 뿐 아니라 두뇌가 건강해진다는 주장을 담았습니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면 두뇌가 자극을 받아 기억력이 좋아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오를 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치매 등 정신의 문제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운동이 두뇌에 워낙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운동으로 육체가 건강해지는 것은 부수효과일 뿐이고, 정말 중요한 효과는 두뇌가 건강해진다는 점이다."라고 까지 주장합니다.

이 책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공부는 두뇌발달에만 유익하고, 운동은 육체발달에만 유익하다고 생각하죠. 만약 머리 좋은 학생이 운동도 열심히 한다면 "공부하지 않고 왜 시간낭비하냐"고 꾸짖겠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공부를 하는 틈틈히 운동을 해야 두뇌도 잘 발달하고, 따라서 공부도 더 잘되기 마련이죠.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는 태도가 퍼지기 전엔 육체 훈련도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가 많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교육도 문학과 철학뿐 아니라 육체의 단련을 중요시했죠.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라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용맹한 군사였고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닐 정도로 몸이 튼튼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철학자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죠. 유럽에서 계몽주의 영향으로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관점이 지배하게 되면서 점차 정신을 개발하는 사람은 육체를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고, 많은 철학자는 운동에 등을 돌리고 연구실에서 사색만 하는 삶을 즐겼습니다. 그 결과 근대 이후로 지식인은 곧 유약하고 머리만 발달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죠.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영국의 스포츠계를 이끈 것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엘리트라는 점을 볼 때, 육체와 정신을 함께 개발하는 전통은 유럽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둘로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육체와 정신 중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기가 쉽죠. 정신이 육체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이 원하는 대로 육체를 부려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적 성공을 하기 위해 잠을 포기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굶기를 밥 먹듯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산다면 정신은 만족할지 몰라도 육체는 정신에 의해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할 뿐, 전혀 돌봄을 받지 못하죠. 이렇게 육체를 학대한다면 그 결과 육체는 정신에 반항하여 각종 반란을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알레르기부터 암까지, 육체가 정신을 괴롭힐 수 있는 수단은 대단히 많죠. 결국, 정신의 일방적인 지배는 육체의 파괴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에 비해 정신을 무시하고 육체의 만족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남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까지 돈을 벌어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은 돈을 위해 정신 건강을 포기한 셈이죠. 이런 사람은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 입고 살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 망가져버린 영혼은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죠. 이런 사람은 각종 공포증, 신경쇠약, 강박관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정신에 대한 육체의 학대는 정신을 황폐화하는 법이죠.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 보는 관점은 이처럼 큰 문제를 일으켰고, 그 결과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웰빙이라는 개념도, 단지 몸에 좋은 음식만 먹자는 뜻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온전한 건강을 추구하자는 뜻이죠. 즉, 음식에 신경을 쓸 뿐 아니라 착실하게 운동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는 등 삶의 전반적인 태도와 습관을 바꾸자는 운동입니다. 이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일으킨 문제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하는 것이죠.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독립된 실체로 생각하는 태도는 계몽주의가 남긴 가장 잘못된 유산 중 하나입니다. 건강한 삶을 살려면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돌봐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정신과 육체 중 돌봄이 필요한 영역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이를 잘 돌보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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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황제라고 불리던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를 아끼는 전 세계 많은 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도 제 또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그의 음악을 듣고, 그의 춤을 따라 추며 자랐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에 그의 음악을 접한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뮤지션인지 알겠지만, 최근에 자라난 사람은 그의 음악보다는 그의 기이한 행동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문을 더 많이 접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얼굴이 뒤틀렸고,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이제는 빚에 쪼들리는 파산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죠. 한때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던 대스타가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이클 잭슨은 광고를 촬영하다 화상을 입는 등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삶에 일어난 안 좋은 일의 상당 부분은  그 자신이 초래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재능을 바탕으로 많은 인기과 재산을 얻었지만, 나이가 많아질수록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드러냈고, 이로 말미암아 과거의 명성이 많이 퇴색했죠.

마이클 잭슨이 스스로 삶을 망친 것은 그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서 성공했으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게 어린 꼬마가 연예계에서 성공한 것은 50살 먹은 어른이 아이들 사이에 골목대장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 세계에서는 대단한 부러움을 사겠지만, 당사자는 나이와 맞지 않는 일이기에 만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성인이 되면서 Off The Wall로 재능을 인정 받았고, Thriller로 세계 음악계를 석권하며 팝의 황제로 우뚝 섭니다. 하지만, 그가 음악계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할지라도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그의 마음에 큰 공허감을 남겼고,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공허감을 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능적으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상하기 위해 택한 행동들은 대부분 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싸구려 언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죠.

인간에게 어린 시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소나 개 등 동물은 태어나서 1년쯤 지나면 거의 완전히 자라지만, 인간은 완전히 자라나는데 육체적으로는 15년 이상, 감정적으로는 20년 이상이 필요합니다. 과거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일을 시켰지만, 현재 대부분 국가는 아동 노동을 법으로 금지합니다. 이는 아이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뛰어놀거나 공부하지 못하고 일만 하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는 어른이 되지 못하기에 결국 국가적으로 손해란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아동 노동 금지 원칙이 거의 지켜지지 않는 두 분야는 연예계와 스포츠계인데, 특히 한국의 연예계와 스포츠계에선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교육이나 휴식을 보장하지 않고 지나친 일을 시키는 예가 많죠).

매리 윈(Marie Winn)은 아동기가 없는 아이들(Children without Childhood: Growing Up Too Fast in the World of Sex and Drugs)에서 요즘 아이들은 아이로서 누려야 할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어른의 세계에 지나치게 빨리 노출되고, 그 결과 불행한 어른으로 성장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아동기가 사라져가는 중요한 원인은 인터넷과 TV의 보급으로 어른들만 알아야 할 지식이 아이들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이죠. 이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성에 대해 일찍 눈을 뜨면서 아동기의 특징인 "성에 눈뜨지 않은 상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양에선 10대의 임신 문제가 심각한데, 임신을 한다면 더는 어린이일 수 없고, 따라서 어른이 될 준비는 안되었지만 어린아이일 수도 없는 사각지대에 처하는 10대가 많습니다. 또한, 사회적 경쟁이 심해지면서 어린 아이들도 아무 생각 없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지고, 일찍부터 남보다 앞서기 위한 경쟁에 뛰어드는 현실도 아동기 실종의 중요한 원인이죠. 원래 한국의 아이들은 경쟁이 심한 가운데 자랐지만, 요즘은 서양에서도 아이들 간의 경쟁이 점차 심해지는 분위기입니다.

과거에 유럽에선 아이들을 노동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투쟁이 심했고, 그 결과 20세기에 여러 나라의 아이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껏 뛰어놀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아이들은 심한 경쟁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동기를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이전 상황으로 돌아온 것이죠.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도 슬프고, 이 아이들이 나중에 불행한 어른으로 자라날 것도 안타깝습니다. 아이가 아이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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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양말

문화 2009/06/26 05:18
독일에 정착한 지 두 달이 넘어가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군요.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한국 음식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인터넷 곳곳에 올라와 있는 맛있는 한국 음식 소개나 사진을 접하면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물론 유럽 대도시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한국 음식을 구할 수 있겠지만, 저는 워낙 시골에 사는데다가, 부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기 때문에 냄새가 강한 음식을 먹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서양 음식을 먹는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죠.

한국 음식 생각을 참기 어려울 때는 '김치를 인터넷으로 주문해볼까?'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김치를 먹으려면 한국식 쌀로 밥을 해서 한국 음식 반찬과 함께 먹어야지, 서양 음식에 김치만 추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즉, 한국 음식을 먹으려면 제대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든지, 아니면 전혀 안 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음식을 제대로 만들어 먹으려면 한국에서 수입한 재료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한국식으로 밥을 하려면 한국 전자밥통이나 압력솥도 구해야 하겠죠. 그러니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살면서 한국 음식을 먹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외국에 살아도 한국인이 가정을 이루고 산다면 한국식 재료와 주방용품을 갖추어 놓고 한국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졌기 때문이죠.

음식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문화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따라서 문화의 한 요소만 가져다가 다른 문화에 이식하기는 매우 어렵죠.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는 기존의 문화와 융합하지 않기 때문에, 문화 전체를 바꾸지 않는 이상 이러한 요소가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은 집안에서 신발을 벗는데, 서양인은 집안에서도 신발을 신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에 한국인이 집에서도 신발을 신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 한국의 장판은 맨발로 밟도록 만들어졌기에 신발로 밟으면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습니다. 그리고 바닥이 더러워지니 그 위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자기도 어렵겠죠. 또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잘 수 없다면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온돌의 장점도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깔끔한 성격상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는 것을 참지 못하겠죠. 즉,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하려면 바닥에 카펫이 깔린 집에서, 침대에서 잠을 자고, radiator로 난방을 하고, 더러워도 크게 신경을 안 쓰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선 집안에서 신발 신고 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죠.

이처럼 외국에서 문화의 한 요소만 받아들이기는 매우 쉽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외국 문화가 유입되기도 하지만, 마치 인간의 몸이 외부의 변화에 반응하지만 결국은 균형상태(equilibrium)로 돌아오듯, 문화도 고유의 색깔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198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를 휩쓸 때, 사람들은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세대가 성인이 되고 나면 모두 미국 사람처럼 살리라고 생각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세계 각국의 문화는 언제보다 고유한 색깔이 뚜렷합니다. 이는 미국의 문화가 잠시 각 나라에 침투하긴 했지만, 고유의 문화를 조금 바꾸는데 그쳤지, 문화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지는 못했기 때문이죠.

어떤 사람이 노란 양말을 선물 받았는데, 구두가 양말과 어울리지 않아 노란 구두를 신게 되었고, 바지가 구두와 맞지 않아 노란 바지를 입게 되었고, 결국 모든 옷을 노란색으로 입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외래문화란 이야기속의 노란 양말과 같습니다. 하나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다 보면 문화 전체의 색깔이 바뀌는 것이죠. 만약 외래문화가 고유문화를 바꾸지 못한다면 외래문화는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구두를 신은 사람의 노란 양말처럼 특이한 요소로 남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한국에서 저는 노란 양말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제가 추구하는 작고 창의적인 조직은 한국의 조직문화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이었고, 따라서 한국의 조직은 저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긴 저를 받아들인다면 마치 노란 양말을 선물 받은 사람처럼 조직 전체의 색깔을 바꾸어야 할 테니 조직의 지도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겠죠. 어쨌든 저는 외국에서 새롭게 꿈을 펼치게 되었으니 억울하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많은 부분이 한국문화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일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문화의 성격이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래도 의미 없을지 모르는 글을 계속 올리는 까닭은 언젠가 이러한 내용이 한국에 도움이 될 때가 오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문화란 늘 변화하기 마련이고, 특히 세계적인 흐름은 모든 나라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법인데, 제가 제시하는 방향이 시대의 흐름과 맞는다면 언젠가 한국문화도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이리라고 믿는 것이죠. 그러한 먼 훗날을 바라보며 쓰는 글이기 때문에, 글에서 제시하는 방향과 한국사회의 방향이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아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글을 쓰겠습니다. 부디 한국문화가 좋은 전통은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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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인의 참모습

해외 2009/06/25 04:21
 최근에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사람은 이란의 소식을 접할 일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미국인에게 이란은 갈 수 없는 나라, 갔다간 잡혀서 고문받고 감옥에 갇히는 위험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죠. 이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갈등의 역사 때문에 생겨난 인식입니다.

미국과 이란의 악연은 1978-79년의 이슬람 혁명(이란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이란을 다스리던 팔레비 국왕은 2차대전 중 영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왕위에 올랐고, 따라서 처음부터 외세와 결탁한 지도자였습니다. 그 후, 국민이 선출한 모하마드 모사덱(Mohammed Mossadegh) 총리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외세를 배격하자 미국은 모사덱을 몰아내고 팔레비 국왕의 권력을 강화해줬죠. 이렇게 든든한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팔레비 국왕은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란을 서구화, 근대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하지만, 팔레비 국왕의 독재에 반발한 이란 국민은 혁명을 일으켜 국왕을 쫓아냈고, 혁명을 주도한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죠. 이처럼 반미감정을 바탕으로 혁명에 성공한 이란 정부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과 대치합니다. 이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국민의 신뢰를 잃은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강력한 미국 건설"을 주장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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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대통령은 이란을 견제하고자 이란과 전쟁 중인 이라크를 지원합니다. 사진은 레이건 대통령이 보낸 특사 로널드 럼즈펠드(훗날 조지 W. 부시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을 지내며 이라크 침공을 지휘함)가 바그다드에서 후세인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미국이 한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미국이 2000년대 초반 전쟁을 일으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한때 미국의 지원을 받던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군요.

하지만, 레바논에서 미국인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자 미국은 인질을 구하기 위해 이란과 협상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느라 무기가 많이 필요하던 이란은 인질 석방의 대가로 무기판매를 요구했고,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무기 판매 대금의 일부를 니카라과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던 반군을 지원하는 데 씁니다.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이지요. 겉으로 이란을 그렇게 비판하던 미국 행정부가 뒤로 이란과 무기 수출 협상을 벌였음이 드러나면서 레이건 행정부는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이란은 미국인의 머리속에서 다시 한 번 안 좋은 사건과 연관되었죠.

미국 이외의 나라 사람들이 이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루시디에 대한 호메이니의 처형 명령이었습니다. 1988년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는 사탄의 시(Satanic Verses)를 발표하는데, 당시 이란의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 책이 무하마드에 관해 불경건한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모슬림들에게 루시디를 죽이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문학작품의 내용을 문제삼아 작가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모습에서 서양인들은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불관용의 태도를 보았죠. 또한, 몇 년전엔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쓸어버려야 할 나라"라고 발언함으로 이란이 호전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긴 하지만, 실제 이란인들의 태도는 이란 정부의 호전적인 태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저는 몇년 전 프랑스에 살 때 아랍계 프랑스인이 혼자 이란에 들어가 현지인들을 인터뷰한 비디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9/11 사태가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비디오에 나온 이란인들은 "미국이 이 사건을 핑계로 이란에 쳐들어오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더군요. 하긴 얼마 후 미국이 9/11과 연관성 등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란인들의 걱정이 꼭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 비디오의 내용과 비디오를 촬영한 프랑스인의 말을 근거로 판단해보니 이란인들은 반미 감정이 별로 심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에 대한 호감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부가 어떤 나라에 대해 적대행위를 한다고 해서, 국민도 동일한 태도를 보일 이유는 없겠더군요. 오히려 정부가 자꾸 "미국은 나쁘다"고 강조할수록 이란인들은 미국이 더 좋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죠.

요즘 이란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늘 정부 발표를 통해 보던 호전적인 모습뿐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이란인들의 모습을 엿볼 기회죠. 부디 이란이 대다수 이란 국민의 바램대로 정의롭고 자유로운 나라로 탈바꿈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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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몇 년 전 이집트를 여행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카이로에서 머물던 호스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인데, 위성 접시 안테나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집트에 위성 접시 안테나가 많은 이유는, 이집트가 케이블TV라는 단계를 건너뛰고 위성방송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케이블TV가 제대로 발달하려면 케이블망을 심고 지역마다 신호를 배분해줘야 하기 때문에 대단히 많은 기초비용이 들어갑니다. 그에 비해 위성방송은 방송국에서 위성으로 전파를 보내고, 각 가정이 위성 접시 안테나를 설치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초기 투자 비용이 훨씬 적고, 따라서 케이블TV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위성 방송은 발달하게 된 것이죠. 비슷한 이유에서 아프리카에는 유선전화보다 휴대전화가 더 빠르게 확산중이라고 합니다. 드넓은 초원에 곳곳마다 전화선을 까는 것보다, 휴대전화 기지국을 하나 세우는 편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죠.

중동, 아프리카 하면 통신 기술이 낙후된 지역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이야말로 전통적으로 비싼 통신 서비스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나라는 우편제도가 불완전하기에 우편물이 자주 분실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분실 우려가 없는 이메일 서비스가 인기를 끌기 마련이죠. 또한, 정치적 자유가 제한된 나라는 언론의 자유도 제한되기 마련인데, 그럴수록 사람들은 공식 언론기관이 아닌 인터넷을 통한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물론 가난한 나라 사람은 집에 컴퓨터를 갖다 놓고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할 돈이 없겠지만, 그런 나라는 인터넷 카페가 발달하기에 부담 없이 인터넷을 쓸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북아프리카를 여행해보니 웬만한 지방 소도시에도 인터넷 카페는 꼭 있더군요. 그것도 7-8년 전 경험이니 지금은 인터넷 카페가 늘었던지, 아니면 개인의 컴퓨터 소유가 늘었을 것입니다.

인터넷의 보급은 단지 편리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권력구조를 바꿀 수 있습니다. 독재자는 늘 정보의 흐름을 장악함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마련인데(그래서 쿠데타가 발생하면 방송국부터 장악하기 마련이죠), 인터넷은 본질상 하나의 중심부가 없는, 전형적인 불가사리 조직이라(Ori Brafman과 Rod A. Beckstrom가 쓴 The Starfish and the Spider참조) 정보의 흐름을 중앙에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터넷은 독재권력에 큰 위협이 되기 마련이죠. 중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는 체제에 위협이 되는 인터넷 사이트의 연결을 끊는 방식으로 인터넷을 통제하기도 하지만, 이는 자유로운 소통이 기본인 인터넷의 정신과 상충하기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가 발달할수록 인터넷에 의존하는 경제활동이 늘기 마련이고, 정부가 인터넷의 자유로운 사용을 막는다면 경제활동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함부로 인터넷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경제의 발전을 막고 독재국가란 오명을 얻으면서까지 인터넷을 통제하느냐, 아니면 권력 유지를 위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인터넷을 통제하느냐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죠.

현재 이란에서 진행되는 반정부 시위는 인터넷이 독재권력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란 정부는 국내외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활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막는 중이고, 따라서 세계 유수의 언론조차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국내 언론은 당연히 정부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시위사태에 대해 자세히 보도하지 않겠죠. 하지만, 이란인들은 트위터 인터넷을 통해 시위 진행 소식을 주고받으며 정부의 언론통제에 맞서고 있습니다.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한국인들처럼 "지금 소수의 폭도가 소동을 일으켰지만, 군에 의해 완전히 제압되었다."는 발표를 그대로 믿는 수밖에 없겠죠.

지금 이란 사태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는 것은 트위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http://twitter.com/Oxfordgirl 에는 현지소식이 영어로 계속 올라옵니다.) 트위터는 인터넷 뿐 아니라 휴대전화로도 글을 올릴 수 있기에 어디서나 새 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카메라가 달린 휴대전화를 든 사람이 시위 현장에서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트위터로 소식을 전하면 이는 빠른 속도로 많은 사람에게 전파가 됩니다. 정부가 이를 일일이 막기는 어려운 일이죠. 이는 곧 국민이 정보를 유통할 능력을 얻는다는 뜻이고, 정부의 정보독점에 대한 도전으로 작용하죠. 이란 정부가 인터넷을 검열한다는 소식은 있지만, 아직 인터넷 사용을 제한한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만약 사태가 더 심각해진다면 트위터 사이트 등의 접속을 막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트위터가 막히면 사용자들은 이와 비슷한 다른 사이트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 접속을 전면 통제하지 않는 이상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인터넷의 발달로 독재정부는 점차 설 자리를 잃는 중입니다. 만약 진정 국민을 섬기는 정부라면 인터넷을 통한 국민의 의사소통이 두려울 필요가 없겠죠. 부디 독재가 사라지고 세계 어느 나라나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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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이란 국민의 시위가 점차 격화하고 있습니다. 이미 경찰의 발포 등으로 십여 명이 사망하였고,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잦아지는 추세를 볼 때 사상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입니다. 관망하던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도 점차 시위대를 격려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시위대는 더욱 고무되는 분위기입니다.

이번 사태는 6월 12일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이 승리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촉발되었습니다. 많은 국민은 극우파 강경론자인 아마디네자드에게 염증을 느꼈고, 이에 따라 개혁을 주장하는 미르 호세인 무사비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막상 선거 결과는 아마디네자드의 승리로 나왔으니 많은 국민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이란은 고대 페르시아의 전통을 물려받은 유서 깊은 나라입니다. 2차대전 중 영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왕위에 오른 레자 팔라비 국왕은 친서방, 근대화 정책을 추구하는 독재 정부를 이끌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1978년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고, 한때 서양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이란은 정치와 종교가 결합한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합니다. 이슬람 혁명의 결과 호메이니는 이란의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가 되는데, 최고 지도자는 종교 지도자일 뿐 아니라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실질적 국가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지금 이란의 최고 지도자는 하메네이인데,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의 선거 승리를 "알라의 뜻"으로 인정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시위가 격화할 때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미지수입니다. 만약 그가 끝까지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하다가 시위로 정부가 무너진다면 그의 권위도 추락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1978년 이슬람 혁명이 이룩한 정치 체제에 금이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시위대가 "최고 지도자 타도"를 외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반대로, 그가 종교지도자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해 정부를 옹호함으로 시위를 억누르는데 성공할 수도 있겠죠.

이란에서 개혁파 지도자가 인기를 끈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97년 무명의 성직자 모하마드 하타미(Mohammad Khatami)는 개혁을 주장하며 선거에 나와 70%의 놀라운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하지만, 그는 보수파의 견제에 밀려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물러났죠. 하타미는 올해 대선에 다시 출마하려다 포기하였고, 대신 그의 친구 무사비를 지지하였습니다(그래서 무사비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엔 무사비와 하타미가 함께 나옵니다). 즉, 무사비에 대한 국민의 지지지는 단지 무사비가 인기가 높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대표하는 개혁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렇게 시위가 격화하는 가운데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시민의 모습을 촬영한 비디오가 유튜브에 공개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피가 많이 나는 끔찍한 동영상이라는 사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났지만, 눈에 보이는 사진이나 동영상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는 점에서 이 동영상은 이번 사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이 여성은 인터넷에서 네다(Neda)로 불리는데, 미국의 타임지(TIME Magazine)는 이를 '목소리, 부름'을 뜻하는 이란어(Farsi)라고 해석한 데 비해  , 프랑스의 Le Figaro는 이 여성의 이름이 정말 Neda Soltani라고 보도했습니다. 세계적 언론도 정확한 사태 파악이 안된 것이죠. 분명한 사실은 많은 이란 국민이 이 여인을 정부의 억압에 희생된 대표자로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도 박종철이라는 한 학생의 죽음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듯, 막연한 "독재"가 독재의 피해자로 구체화할 때 여론의 큰 흐름이 바뀌는 법이죠.

서양을 등에 업고 독재를 추구하던 팔라비 국왕을 내쫓은 이란 국민은 이제 부정선거로 권력을 연장하려는 정부에 대해서도 심판을 내리기 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한때 국민이 지지해서 권력을 잡았더라도, 이를 빌미로 국민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정부는 언젠가 국민으로부터 따끔하게 혼이 나야겠죠. 오바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 회견을 끝맺으며 했던 이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것은 이란 정부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국민의 목소리는 경청해야 하지, 억압하면 안된다는 것이 보편적 원칙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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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시대

사회 2009/06/20 05:15
작년 여름 촛불 집회가 줄기차가 이어지자 대통령이 사과하는 등 낮은 자세를 보이던 정부는, 올해 들어 비판세력에 대한 적극적 공격으로 전략을 바꾼 듯 보입니다. 올 초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은 그 신호탄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인 검찰 수사, 경찰의 과격한 시위 진압을 통한 공포분위기 조성 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들이죠.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정부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바로 정부가 "촛불 시위의 근원"이라고 지목한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수사로 보입니다.

사실 PD수첩에 대한 수사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MBC라는 공영 방송사가 공익을 목적으로 방송한 내용을 검찰이 수사한다면 "언론 탄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또한, 만약 방송 내용이 부적절하다 할지라도 이를 처벌할 죄목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검찰이 적용한 죄목은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 혐의인데, 이는 법을 무리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미국 소의 광우병의 위험을 경고한 방송을 했다고 미국 쇠고기 수입 주무부서인 농식품부 관계자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면, 건설 현장의 위험을 보도한 방송은 건설사 관계자의 명예를 훼손한 셈이고, 해양 오염 문제를 취재한 기사는 국토해양부 관계자의 명예를 훼손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식으로 검찰이 조사한다면 우리나라에 건전한 비판을 하는 언론은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입니다. 업무방해 혐의는 PD수첩의 방송으로 말미암아 미국산 쇠고기 판매점 모집이나 실제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인데, 이는 엄밀히 말해 의혹이 남는 협상을 한 정부의 잘못이지, 이러한 의혹을 보도한 PD수첩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무리한 법 적용은 정부가 미운털이 박힌 PD수첩을 혼내기 위해 억지로 수사를 진행한다는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신의성실의 원칙에 대해 설명했는데, 신의성실의 원칙이란 "건전한 상식 안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로 행동해야 한다."는 법의 개념입니다. 즉, 어떤 계약을 이행할 때, 계약 조건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실제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계약 조건을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죠. 만약 계약 조건을 문자적으로는 이행했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면, 이는 계약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쌀집 주인이 쌀을 한 가마니 배달하기로 하고 손님에게 돈을 받아놓고, 손님 집에 쌀가마니를 풀어 마당에 쏟아 놓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법적으로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쌀을 다시 제대로 배달해야 합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건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물고 뜯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가 유지될 수 없죠. 그런데 정부는 이러한 신의성실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법조문의 제한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시민들에게 감정적으로 화풀이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시위대에 대한 폭력의 남발이 그러한 좋은 예죠. 전 국세청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가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내용을 내부게시판에 올렸다가 파면되고 검찰에 고소까지 당한 국세청 직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또한, 검찰이나 경찰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피의자를 죄인 취급하거나 피의자의 명예를 훼손할만한 수사 내용을 언론에 흘리는 일도 그러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러한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번엔 검찰이 PD수첩 작가의 사적 이메일을 언론에 공개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검찰의 자료를 바탕으로 보도한 언론을 접한 사람들은 이 작가가 정부에 대한 악의 때문에 고의적으로 왜곡된 내용을 작성한 죄인으로 판단하겠죠. 즉, 재판은 시작도 안 했는데 검찰의 여론몰이 때문에 이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것입니다. 이야말로 명예훼손 아니겠습니까?

정부가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지 않기에 사람들은 정부가 어떤 발표를 해도 그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저 발표 뒤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어차피 한국인은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대단히 낮은데, 이번 정부에 대한 시민의 신뢰도는 특별히 낮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를 자초한 것은 정부이기에 다른 사람을 탓할 이유가 없죠.

이러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사회적 신뢰는 무너져 내리고, 한국은 더욱 불신이 만연한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선 정부부터 솔직하고 정직한 태도를 보이고, 국민을 적이 아닌 섬김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할 텐데, 지금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이는 너무나 일어나기 힘든 변화 같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가 앞으로 얼마나 한국 사회를 망칠지 심히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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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1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시민의 의견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조직력을 잃은 시민들은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에게 밀리는 중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우려한 교수나 종교인 등의 시국선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철저하게 정부 편을 드는 언론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는 널리 퍼지지 못하는 중입니다. 이제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었고, 심지어 파시즘 출현을 우려하는 목소리조차 커지는 중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힘들게 얻어낸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빠르게 무너져내리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지금의 사태는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많은 사람은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선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등 독재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짚어내지 못한 해법입니다. 대통령의 권한 문제만 해도, 대통령의 권력을 줄이면 그만큼 다른 부분의 권력이 늘어나고, 따라서 나중에 진정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대통령이 당선된다 하더라도 사회를 바꿀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봐도 이탈리아는 민주주의를 잘 구현할 수 있다는 내각제를 채택했지만, 서유럽의 어느 나라 보다 민주주의 전통이 약하고 정치권의 부정부패가 심합니다.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죠.

사실 한국의 정치체제는 시민의 민주의식이 매우 발달해 있던 1987년 토대가 놓였기 때문에 제도 자체만 보자면 대단히 민주적입니다. 대통령이 중임 할 수 없고 5년 만에 임기를 마치는 제도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중임 없는 7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독재를 자행했기에 이러한 대통령의 출연을 막기 위해 만들어낸 독특한 제도입니다. 즉, 다른 나라의 대통령 임기인 4년보다 임기가 조금 긴 대신 중임을 금함으로 장기 독재의 싹을 자른 것이죠.

이렇게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에도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은 무엇보다 시민의 민주의식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국민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독재를 선택한다면, 훌륭한 민주주의 제도는 오히려 엄청난 독재를 낳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쟁 후 찾아온 경제위기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은 게르만 민족의 번영을 약속하는 극우 정치인 히틀러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결국, 히틀러는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얼마 전까지 매우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 국민이었던 독일인들은 최악의 독재정부가 탄생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권력을 주지만, 민주의식이 없는 국민은 자신의 권력을 독재자에게 주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여러 국가는 지나치게 민주적인 장치를 도입한 이후 독재권력의 출현을 보게 되죠. 한국도 4.19 의거로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그 이후 군사독재가 시작된 것은 그만큼 당시 한국인들의 민주의식이 낮았기 때문이죠. 이는 오늘날 이라크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미국은 이라크를 독재자에게서 구해내고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기만 한다면 이라크가 민주국가가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라크 국민이 민주주의를 실천할 만큼 시민의식이 성숙해지지 않는다면 이라크는 정치적 혼란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미군이 철수한다면 다시 독재자가 출현해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잡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종파별로 나뉘어 서로 살상을 벌이는 사태가 더욱 악화할지도 모르죠.

한국도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 대한 해법은 제도의 개선이 아닌 시민의식의 고취에서 찾아야 합니다. 시민이 독재를 거부한다면 정부가 권력을 남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남용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지도 않겠죠. 그에 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에릭 프롬의 표현을 빌자면 "자유에서 도피"하기로 선택하는 시민이 많다면 독재는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부디 한국이 더 나쁜 상황으로 빠지기 전, 한국인들의 의식이 바뀌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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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객관화

문화 2009/06/18 07:49
최근에 피자 조리법을 배우기 위해 recipe 사이트를 다니다 보니 조리법을 대하는 서양 사람들의 태도가 한국 사람들의 태도와 다르다는 사실이 눈에 띄더군요. 한국인은 조리법이 대충의 방법을 설명하는 지침일 뿐, 음식의 맛은 요리하는 사람의 경험과 능력이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국인만이 이해하는 '손맛'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생각과 관계가 깊죠. 그에 비해 서양인들은 조리법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고, 따라서 정확한 조리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합니다. 미국 시트콤 사인펠드에 보면 일레인이 자신에게 망신을 준 수프 요리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조리법을 공개해서 그가 수프 집 운영을 포기하도록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코미디라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인간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요리를 조리법으로 환원(reduction)하는 태도의 예라고 할 수 있죠.


기술을 객관화하는 서양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영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Paint by Number 세트엔 작은 부분마다 번호가 쓰인 종이와 물감이 들어 있는데, 번호에 따라 물감을 칠하기만 하면 누구나 명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이는 지식의 객관화가 규격화, 상업화로 연결된 예죠. 그러고 보면 붓질 몇 번으로 훌륭한 풍경화를 쓱쓱 그려대던 밥 아저씨(Bob Ross)는 정말로 자신이 가르치는 방법을 따라 하면 누구나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 비해 기술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 전통이 강한 한국인들은 밥 아저씨가 아무리 "참 쉽죠"를 연발하더라도, "몇 년간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저런 그림은 절대 그릴 수 없다."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죠.


서양인이 지식과 기술을 객관화하는 경향이 강한 데 비해,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은 인간과 기술을 하나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과거엔 무술이든 의학이든 기술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은 스승에게 찾아가 청소부터 시작해 의미 없어 보이는 잡다한 일을 한참 배운 후에야 본격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었죠. 이는 스승이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인간성을 확인하고, 귀찮은 일을 시킴으로 성품을 훈련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면 기술을 전수하지 않는다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은 이러한 동양의 교육관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에 비해 서양의 교육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돈을 내고 지식을 주고받는 계약관계였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관계를 보는 관점은 고등교육의 관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교수의 심부름을 하느라 전공을 공부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공부하러 왔는데 남이 시키는 일이나 한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불만이 많지만, 모두가 받아들이는 현실이기에 이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하죠. 그에 비해 서양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교수의 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교수에게 지식을 얻으려고 학비를 냈기에 지식을 얻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지식이 인간의 한 부분이라면, 인간성이 온전히 발달할 때 지식 또한 완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의 사대부는 지식과 함께 덕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에 비해 지식이 인간성과 분리된 영역이라고 보는 서양에서는, 인간성이 나쁜 사람이 지식을 배우고 가르치는데 관대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돈만 밝히는 궤변가들"이라고 비난한 소피스트가 당시 철학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지식을 객관화하는 문화는 지식을 문서로 만드는데 힘쓰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문서를 만들어야 다른 사람도 지식을 활용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에 비해 지식을 인간의 한 부분으로 보는 문화는 관계를 통해 지식을 전수하기 마련입니다. 경험 많은 사람을 "사수", 경험이 없는 사람을 "부사수"로 놓고 사수가 부사수에게 실무를 가르치는 풍습은 관계를 통한 지식 전수의 예죠. 이러한 사제 관계가 최고로 발전하면 말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니 다른 사람은 모두 의아해했는데, 가섭존자만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는 마음으로 연결된 긴밀한 사제관계의 좋은 예죠.

한국인이 지식을 객관화하는 경향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한가지 문제는, 한국인이 매뉴얼을 잘 만들지도, 읽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어차피 매뉴얼을 만들어봤자 제대로 지식이 전달되질 않는다고 생각하니 힘들게 매뉴얼을 만들길 꺼리고, 배우는 사람도 매뉴얼을 보고 배우느니 부딪쳐 배우겠다는 생각이 강하니 매뉴얼이 있어봤자 별 효과가 없죠. 한국인이 지식을 객관화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한 한국인에게 외국인들이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도 가르쳐줄 내용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이 가득하긴 하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표현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한국의 대기업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서양 기업들의 영향을 받아 업무를 매뉴얼화하는 예가 늘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흐름이 더욱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은 지식을 객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작은 지식이라도 글로 객관화한다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자산이 되는 법이죠. 하지만,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도 "직접 와서 배워라."고 한다면 소수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지식을 인간의 한 부분으로 보는 관점이 전 인격적인 교육의 기반이 된다는데서 장점이 크지만, 익명의 다수가 만나는 인터넷에선 지식의 객관화 작업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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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제가 머무는 곳에는 급식이 나오긴 하지만, 입맛에 잘 맞지 않아 직접 요리를 해 먹을 때가 잦습니다. 과거엔 스파게티를 해 먹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질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해 보고자 냉동 피자를 사다가 토핑을 얹어서 오븐에 구워 보았습니다. 먹어보니 맛이 있긴 한데, 토핑을 추가하긴 하지만 공장에서 만드는 피자를 주원료로 한다는 사실이 찜찜하기도 하고, 돈도 아까워서 피자를 직접 만들어 먹어보려고 인터넷에서 피자 만드는 법을 찾아봤습니다.

Video Jug이라는 사이트에서 찾은 방법으로 피자를 만들어 봤는데, 먹을 만 하긴 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났습니다. 머릿속으로 이탈리아에 살 때 먹던 피자의 맛과 비교해 보니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피자 만드는 솜씨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피자 조리법에 담긴 철학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다시 찾아보니, 미국인이지만 이탈리아식 피자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의 피자 조리법 사이트가 나오더군요. 사실 우리가 익숙한 미국식 피자는 이탈리아식 피자와는 전혀 다른 맛이지만, 미국에도 20세기 중반까지 이민 온 이탈리아 사람들이 경영하는 피자리아는 이탈리아 피자의 참맛을 잘 보존하였기에 참고할만하죠(물론 지금은 이탈리아 이민이 거의 없고, 따라서 미국에서 진짜 이탈리아 피자를 찾기가 힘듭니다).

이탈리아 피자는 깔끔함과 단순함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재료도 복잡하지 않고, 맛도 깔끔합니다. 그에 비해 다른 나라의 피자는 맛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이는 단순하면서도 맛있게 만들려면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복잡한 맛으로 솜씨의 부족을 감추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음식 중에서도 물냉면은 깔끔한 맛이기에 주방장의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비빔냉면은 맛이 자극적이기 때문에 솜씨가 없는 사람도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죠(하긴, 물냉면도 자극적으로 맛을 내면 솜씨를 감출 수 있긴 합니다. 그래서 요즘 분식점 등에서 나오는 물냉면은 매우 시고 단맛이 강하죠). 또한, 맛이 깔끔하면 그 자체로 포만감이 오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선 사이드 디쉬를 팔지 못한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겠죠. 예를 들어, 진짜 제대로 된 이탈리아 피자를 먹는다면 버펄로윙이나 셀러드바를 추가로 주문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과거에 먹던 이탈리아 피자의 맛을 되새기며, Jeff Varasano's NY Pizza Recipe에 나온 내용을 참고하며 피자를 만들어봤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초보자의 어설픈 요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피자의 참맛을 잘 보여주는 Margherita 피자는 조리법이 매우 간단합니다. 우선, 밀가루 반죽을 만들고, 반죽을 엷게 편 위에 통조림에 든 토마토를 적절히 바른 후, 모짜렐라 치즈와 바질(basil) 잎을 얹고 오븐에 구우면 됩니다. 밀가루 반죽을 만드는 방법은 VideoJug를 참조하거나, Varasano의 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VideoJug의 방법은 매우 표준적이고 간단한 방법인데 비해, Vasarino의 방법은 자신감에 찬 개성 있는 방법입니다(예를 들어, Vasarino는 "요즘 나온 이스트는 미지근한 물이나 설탕 없이도 활성화한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의 설명과 다르지요).

VideoJug에선 토마토를 양파, 마늘과 함께 볶아 소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제 기억으로 이탈리아에서는 통조림 토마토를 그대로 반죽에 얹었습니다. Vasarino도 토마토를 소스로 만들지 말고 그냥 쓰라고 충고하더군요. 맛을 비교해 보니, 양념을 해서 토마토소스를 만들면 피자헛 같은 미국식 피자 맛이 나고, 양념을 안 하고 그대로 쓰면 이탈리아식 피자에 가까운 맛이 났습니다. 그리고 Vasarino의 페이지에도 나오지만, 재료를 많이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탈리아 피자는 빵의 부드러운 맛, 토마토의 시큼한 맛, 모짜렐라의 고소한 맛, 바질의 상큼한 향이 적절하게 섞일 때 참 맛이 나는데, 재료를 많이 얹다 보면 균형이 깨져 버립니다.


재료 중 바질은 슈퍼에서 화분 채로 사왔는데(2유로), 한달 째 잎사귀를 뜯어 먹었는데도 여전히 잘 자라서 기특합니다. 이걸 보니 다른 채소도 키워보고 싶단 생각이 드는군요. 모짜렐라는 한국에서는 비싼데, 여기선 실 중량 125g 짜리가 55센트(천원 미만) 밖에 안 합니다. 이거 하나로 세 번 피자를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재료비는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Vasarino의 설명에 따르면 피자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세 가지는
1. 고온을 낼 수 있는 오븐
2. 반죽을 빚는 기술
3. 이스트의 종류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쓰는 주방의 오븐으로는 250도까지 밖에 오르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피자를 만들기엔 애로 사항이 많습니다(고온으로 구워내면 2분이면 바삭한 피자가 완성된다는군요). 게다가 슈퍼에서 파는 이스트도 한 종류이기 때문에 좋은 이스트를 구할 방법이 없네요(시골이라 슈퍼마켓 찾기도 힘듭니다). 또한, 밀가루 반죽은 평생 처음 만들어 봐서 제대로 반죽을 하기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천원도 안 되는 재료비로 원하는 피자를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기쁩니다. 한국에서도 오븐만 있다면 재료는 조금 비싸더라도 구할 수 있을테니(모짜렐라는 큰 마트에서 판매할 것입니다. 바질은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듯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피자 만들기에 도전해 보셔도 좋겠네요.

P.S. 어제 티스토리가 점검중이라 글을 못올렸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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