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미국인은 선과 악을 뚜렷이 구분하고, 선이 무력으로 악을 응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미국인의 세계관은 잔인한 인디언에 맞서 싸우는 서부 개척자들, 악랄한 나치를 무찌르는 미국군 등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잘 드러나죠. 하지만, 베트남전을 겪으면서 미국인들은 선과 악의 분명한 구분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이러한 고민은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낳았는데, "무고한 백인 개척자를 공격하는 인디언"이 사실은 "자신의 땅에 침범한 적을 내쫒기 위해 사투를 벌인 피해자"라는 새로운 역사적 인식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미국인들이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해 생각을 바꾸면서, 미국인들이 만드는 영화도 새로운 세계관을 반영하게 됩니다. 따라서 요즘 나오는 미국 영화에서는 과거 리셀 웨폰의 멜 깁슨이나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화끈하게 악당을 무찌르는 정의의 주인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21세기를 대표하는 슈퍼영웅 배트맨은 검은색 복장을 입고 밤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등 어두운 면을 특징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밝은 이미지만 강조하는 전통적인 슈퍼영웅(대표적인 예가 슈퍼맨)과 차별된 점을 보입니다. 아이언맨은 "악의 세력과 대항해 싸우는" 미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자신의 사업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가를 깨닫고 업종전환을 꿈꿉니다. 헐크는 주인공의 억눌려진 원초적 욕망의 표현이기에, 헐크의 행동은 늘 선과 악의 혼합일 수밖에 없습니다. 벤 애플릭의 감독 데뷔작 Gone Baby Gone은 아동납치라는 주제를 통해 "정의의 집행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한다면, 정의의 구현이 꼭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클로버필드와 우주 전쟁(The War of Worlds)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다루었는데, 주인공들이 적과 싸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를 보호하는데 그칩니다. 어차피 거대한 악은 내가 나서봤자 해결이 되지 않으니 내 주변사람이나 보호하자는 태도죠. 이러한 영화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하는 과거의 영웅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할리우드 주류영화가 전통적인 미국인의 변화한 가치관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비해, 프랑스 출신의 뤽 베송은 여전히 선악의 구분이 분명한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트랜스포터 시리즈는 주인공이 멋있는 자동차를 몰며 악당을 때려눕히는 뻔한 줄거리로 나름대로 많은 팬을 확보하였습니다. 그가 각본과 프로듀싱으로 참여한 테이큰(Taken)은 단순한 선악 구도를 바탕으로 악을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리암 니슨은 딸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절대 선이고, 그의 딸을 납치한 범죄자들은 절대 악입니다. 리암 니슨은 단지 딸을 찾을 뿐 아니라 악을 응징하는데, 이는 만나는 모든 악당을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딸을 인질로 잡은 아랍인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총으로 죽인 것은, "말이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말을 하고, 협상을 하다 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악당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지금 죽여버리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가 너무도 분명하기에 범죄자에 대한 잔혹 행위까지 정당하게 보입니다.

이 영화가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반영한 또 다른 예는 악당이 모두 외국인이라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딸을 납치한 이들은 알바니아인이고, 부패한 경찰은 프랑스인, 그리고 납치된 처녀를 사들이는 사람은 아랍인입니다. 사실 나와 외모가 비슷하고,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사는 사람을 절대적인 악당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낯선 외모에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은 악당으로 상상하기가 훨씬 쉽죠. 문제는 이렇게 외국인을 악당으로 묘사한다면,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성이 걷잡을 수 없이 표출되면서 매우 끔찍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즘 미국 영화는 외국인조차 함부로 "절대 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중동문제를 다룬 The Kingdom이 그러한 예인데, 이 영화는 모슬렘 테러리스트 세력을 소탕하는 줄거리를 담았으면서도, "결국 그들이나 우리나 복수를 원한다는 점에서 같지 않나?"라는 질문을 던짐으로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죠. 그에 비해 테이큰의 주인공은 "이 나쁜 외국 놈들을 깡그리 죽여버림으로 복수하겠다"는 식으로 단순 과격한 태도를 보임으로 관객 속에 잠자던 공격성을 일깨웁니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Chris Tookey에 따르면 이 영화는 평론가들로부터 10점 만점에 3.25점을 얻었는데, IMDB.com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7.9점입니다. 즉, 평론가들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관객(특히 젊은 남성관객)에게는 확실한 호응을 이끌어낸 것이죠. 이처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덕분에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2억 2천만 달러나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고 앞으로도 이러한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미국인들은 전통적인 세계관의 문제점을 직접 목격하며 자발적으로 전통적인 선악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관점을 버렸기에, 이러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과거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장기적인 인기를 끌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테이큰이 생뚱맞게 20세기 미국인의 세계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프랑스인들(프로듀서 뤽 베송과 감독 피에르 모렐이)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은 역사적인 원인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길 꺼리지만, 프랑스인은 그러한 금기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를 만들 수 있죠. 단순한 대결 구도를 바탕으로 한 폭력성을 코믹한 수준까지 밀어붙인 Hot Fuzz가 영국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즉, 20세기 중반까진 유럽 영화가 미국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이제는 미국 영화가 유럽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입니다.

미국 영화가 보이는 선악에 대한 고민의 모습은 단순한 미국문화가 좀 더 복잡해지는 중이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대외관계에서 많은 실패를 맛본 미국이 이제 좀 더 성숙하고 현실에 걸맞은 생각을 하는 국가로 변화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P.S. 내일 밀라노로 출발해 열흘 후에 돌아옵니다. 가서도 가능하다면 블로그에 글을 하나쯤 올리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일정이 워낙 바빠 글이 자주 못나옴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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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케빈 코스트너는 80년대부터 90년대 사이에 수많은 히트 영화의 주연을 맡은 인기 배우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였을 뿐 아니라 늑대와 춤을(Dancing with the Wolves)이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맡을 만큼 재능 있는 영화인이었죠.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 그의 인기는 하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은 왕년의 스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톰 크루즈가 아직도 세계적인 스타로 군림한다는 사실과 비교한다면 그의 인기하락은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인기를 끌었던 원인은 그가 헨리 폰다나 그레고리 펙처럼 미국인의 긍정적인 모습을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은 언터처블(The Untouchables),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보디가드(The Bodyguard) 등에서 양심적이고, 예의 바르고, 정의를 추구하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무력을 쓰는 케빈 코스트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인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에게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1993년에 나온 퍼펙트 월드(Perfect World)를 기점으로 그는 훨씬 어둡고 복잡한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합니다. 클린턴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이 영화에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범죄자로 나옵니다. 물론 그가 유괴한 아이와 애정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전형적인 악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블록버스터 주연을 맡던 배우의 배역치고는 지나치게 어둡고 폭력적이었죠. 1995년에 나온 워터월드(Waterworld)는 코스트너의 변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입니다. 육지가 거의 사라진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매우 차갑고 계산적인 인물을 연기합니다. 그는 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죽일 생각을 하고, 아이를 보호하는 여자를 학대합니다. 물론 나중엔 여자와 아이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이러한 변화는 너무 늦게 나오기에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가 극 중간까지 보인 차가운 인물의 이미지를 떨쳐내기 힘들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의 선한 이미지를 버리고 차갑고 어두운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흥행배우로서 그의 가치는 크게 손상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한 모습은 약자를 보호하고 악당을 징벌하는 정의의 심판자인데, 그는 지나치게 어둡고(Mr. Brooks에서 그는 살인충동에 시달리는 역할로 나옵니다), 약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Open Range에서 그는 총에 맞아 쓰러진 적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다가 주변 사람의 만류로 포기합니다. 도덕심이 보통사람만도 못한 것이죠), 때로는 완전히 악의 편에 서기도 하니(3000 Miles to Graceland에서 그는 악당을 등치는 악당으로 나옵니다) 대중이 그가 나오는 작품을 외면한 것은 당연했죠.

지난 10년간 그가 나온 영화 중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는 Thirteen Days를 들 수 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의 역할을 하는데, 정치적 판단력이 매우 뛰어나면서도 가정을 걱정하는 마음이 끔찍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가 이 영화의 흥행성공을 결정지었다고 말하기는 무리지만, 어쨌든 그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선한 주인공의 이미지를 다시 보인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케빈 코스트너의 문제는 그가 어두운 역할을 주로 맡는다는 점이 아니라, 그가 어두운 역할을 맡을 때 무언가 어색하다는 점입니다. 톰 크루즈는 매그놀리아나 Tropic Thunder 등에서 전혀 블록버스터 주인공 같지 않은 어둡고 기괴한 역할을 맡아도 나름대로 잘 어울립니다. 이는 아마도 톰 크루즈라는 사람 자체가 기괴하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 케빈 코스트너는 어떤 역할을 맡아도 무언가 착한 면이 숨어 있는 듯이 보이고, 따라서 그가 영화 초반에 조금 삐딱하게 나와도 "저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착한 사람으로 돌아올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죠. 이러한 기대가 이루어지려면 처음에 보이는 불량한 모습이 어느 수준을 넘지 말아야 하는데, 퍼팩트 월드에서 다른 탈옥수를 죽이는 장면이나 Open Range에서 어린 동료를 발로 차 물에 빠뜨리는 장면은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기에 매우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장면이 나오고, 나중에도 주인공의 삶이 대단히 변하지 않는다면 관객은 실망하고 속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1997년 에어포스 원의 주연을 맡을 예정이었는데,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 포스트맨을 만들기 위해 이 역할을 포기합니다. 결국, 이 영화의 주연은 해리슨 포드가 맡았고, 이 영화는 대 히트를 기록했죠. 그가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을 포기하고, 암울한 인류 종말상황을 그린 영화를 만든 것은, 과거와 같은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의 반영으로 보입니다(결국, 포스트맨은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그의 인기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하락합니다). 그는 또한 속편을 만들지 않는 배우로 유명한데, 이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제작과 주연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둔 톰 크루즈와 비교되는 태도입니다.

결론적으로, 케빈 코스트너는 나름대로 주관을 갖고 새로운 방향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영화에서 그가 보인 이미지는 대중의 기대와 너무도 달랐기에 갈수록 대중에게서 외면을 당한 것입니다. 하긴 존 웨인처럼 대중이 사랑하는 배우도 추격자(The Searchers)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내뱉는 어두운 역할을 맡았다가 흥행에 실패했으니, 대중의 기대에 어긋나는 어두운 역할만 계속 맡는 배우가 인기를 잃는 것은 당연하겠죠. 하지만, 케빈 코스트너는 최근에도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는 등 영화에 대한 애정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좋은 영화를 내놓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이 재능있는 배우가 그냥 그저 그런 배우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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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주식 시장은 호주의 기준금리 인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코스피지수가 1,600선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호주의 기준금리인상이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 세계적인 출구전략의 신호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란 중앙은행에서 풀었던 유동성을 거두어 들이는 정책을 뜻합니다. 작년 가을 이후로 경제위기에 처한 각국 중앙은행은 시중에 엄청난 양의 돈을 풀었는데, 이제 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 돈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출구전략을 실행한 나라가 없었지만, 호주가 시작한 이상 많은 나라가 출구전략을 쓰리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이론대로라면 유동성 공급과 출구전략을 잘만 쓰면 경제위기를 그리 힘들지 않게 끝낼 수 있습니다.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중앙은행이 돈을 풀면 돈이 부족한 시중에 돈이 돌면서 수요가 촉진되고, 이로 말미암아 경기 전체가 살아나기 마련이고, 일단 경기가 살아나고 나면 금리 인상으로 유동성을 흡수해 경기과열을 막으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유동성 공급과 출구전략이 이론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대 초반 미국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과 뒤이은 출구전략이죠.

2000년에 들어 닷컴 버블이 터지고, 곧이어 9/11사태가 나면서 미국은 불황을 맞게 됩니다. 당시 FRB 의장이던 그린스펀은 유동성을 공급해 불황과 맞섭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불황은 금방 끝났지만, 시중에 넘처 나는 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합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그린스펀은 다시 금리를 낮추는데, 그러자 폭등했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였고, 부동산 가격의 폭락은 파생금융상품을 타고 금융권 전체를 부실로 몰고 갔고, 결국 이는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원인이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FRB의 출구전략은 이미 2006년에 실행되었는데 2000년대 초반에 풀린 돈은 시차를 두고 2008년까지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한번 흘러나간 돈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죠.

자산가격은 경기가 좋으면 오르고, 경기가 나쁘면 내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경기와 상관없이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기 때문에 자산가격이 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기는 나쁜데 유동성 때문에 자산가격이 올랐다면, 유동성이 줄어들면 자산가격은 폭락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유동성을 조금 공급해서 경기를 살리고, 유동성을 조금 줄여서 경기과열을 막는다는 생각은 실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유동성이 많이 풀려 경기가 과열된 상태에서 유동성을 조금 줄였다간 경제가 크게 흔들리기 때문이죠.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늘리고 줄이는 것도 문제지만, 여기다가 정부의 개입까지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방지를 중요한 사명으로 하기 때문에 경기가 과열되지 않을까 고민을 하지만, 정부는 물가상승보다는 경기침체를 더 무서워하기에 중앙은행이 출구전략을 쓰려고 하면 정부가 이를 제동할 수 있습니다(특히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쉽죠). 그러면 유동성은 위험할 정도로 많이 풀리게 되고, 결국 감당하지 못할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한국은행은 출구전략을 검토하겠다는데, 정부는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다."는 입장을 반복합니다. 즉, 정부는 물가가 아무리 오르더라도 유동성을 최대한 늘려 불황을 막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국은 G20국가 중 출구전략을 가장 늦게 쓰는 국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지금 경제 상황은 모래밭에다 기초도 없이 임시 건물을 세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초가 없으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이라 불안한지라 중앙은행은 "그만짓자."는데, 정부는 "기초 없어도 이 정도는 문제없다."며 계속 지으라고 종용하는 꼴이죠. 물론 정부의 말이 맞는다면 좋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대단히 위험한 정책입니다. 일단 중앙은행이 위기를 막겠다고 개입한 이상 출구전략을 잘 써도 시장이 정상화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정부까지 나서 출구전략도 제때 쓰지 못한다면 정말 심각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 유동성 공급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잘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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