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사면복권 소식을 듣고 나니 정말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군요. 이로서 한국에서 삼성은 법 위에 존재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입만 열면 강조하던 "법치"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원칙은 민주주의와 함께 싹튼 개념이 아니라 왕정시대부터 존재하던 오래된 전통입니다. 사회를 법으로 다스리려면 일부에게만 법을 적용하고 일부는 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지몽매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옛사람들 조차 당연하다고 인정한 바입니다. 그런데, 만민이 평등하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재벌 총수는 죄를 지어도 제대로 댓가를 치르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특정한 계층이 법의 처벌을 늘 피할 수 있다면, 법치는 그야말로 서민을 억압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고, 정의는 힘있는 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이렇게 명분 없는 사면을 해놓고 정부는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사람들이 차도로 진출했다고 잡아 넣는 일을 계속하겠죠. 과연 이런 나라에서 정부와 경찰의 권위가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전 "국민들에게는 법을 지키라 하고 정작 위에서는 범죄가 저질러지면 국민들이 어떻게 보겠나"고 말했고, "내 임기 중에 일어난 사회지도층의 권력형 부정과 불법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많은 국민은 이러한 약속 때문에라도 이건희 전 회장을 사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분명히 "내 임기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사면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건희 전 회장이 저지른 일은 그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죠. 청와대는 이에 대해 “국익을 고려해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부폐가 처벌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정말 평창 올림픽 유치가 법치의 근간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일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권에 실망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정말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번 결정은 한국이 정의가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정의가 무너진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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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올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 여의도는 정부 예산 통과 문제로 큰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야당은 4대강 사업 예산의 삭감을 주장하고, 여당은 이를 거부하면서 예산 통과가 매우 늦어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처음은 아니고, 과거에도 법이 정한 시한에 쫓겨 겨우겨우 통과될 때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예년과 다른 점은 정부에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가정해 준예산을 준비하겠다고 발표한 점입니다. 준예산은 정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최소 자금만 산정해 임시로 집행하는 예산입니다. 따라서 정부의 정상적인 활동이 어렵고, 정부가 벌이는 공공사업이 위축되기 마련이죠. 이렇게 되면 정부의 지원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기 마련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준예산 준비에 나선 것은 국회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부는 국회가 어떻게 해서든 예산을 처리해 주기만 기다렸는데, 이제는 준예산을 무기로 국회를 압박하는 것이죠. 만약 정부가 실제로 준예산을 쓴다면 국민이 생활에 불편을 겪고, 이로 말미암은 비난은 "정부예산을 승인하지 않으므로 정부 업무를 마비시킨" 국회가 떠안을 가능성이 큽니다. 평소 정치 혐오증을 보여온 이명박 대통령이 매우 바라는 결과이겠죠.

언론은 이번 사태를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의 정부 폐쇄(Government shutdown)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1994년 선거로 다수당이 된 공화당은 클린턴 행정부가 예산을 너무 많이 쓴다면서 예산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다수당이 이렇게 나오면 행정부가 타협안을 내놓기 마련인데, 클린턴 대통령은 "예산을 승인하지 않으면 정부를 폐쇄하겠다."고 강경하게 맞서고, 실제로 1995년 11 부터 여러 달 동안 연방 정부는 대부분의 활동을 중지합니다. 이러한 사태가 온 책임이 클린턴에게 있느냐, 뉴트 깅리치를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에 있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데, 결국 여론은 클린턴 편에 섰고, 이로 말미암아 클린턴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그가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가 정부 폐쇄 정국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죠.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준예산이 편성되는 사태가 왔을 때, 국민은 대통령과 야당을 지지할까요? 여기엔 몇 가지 변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언론은 절대적으로 대통령 편입니다. 지금 대부분 언론은 야당을 비난하며 "명분 없는 투쟁을 포기하고 예산을 승인하라."라고 요구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읽는 국민은 야당을 욕하기가 쉽겠죠. 게다가, 파업에 부정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 상(당사자가 아무리 억울한 상황이라도, 파업을 해서 사회에 불편을 준다면 대단한 비난을 듣죠), 많은 국민은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국회를 무조건 욕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정부 폐쇄와 비교했을 때, 미국에선 정부를 길들이려는 공화당의 도발이 발단이 된데 비해, 이번 사태는 국회를 길들이려는 정부의 도발이 사태의 원인입니다. 먼저 공격을 하면 주도권을 잡기도 쉽지만, 반격에 대해 약점을 노출하게 되기 마련이죠. 그렇게 본다면 준예산을 거론하며 먼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 청와대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른다면 결국 정치적인 큰 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미국 행정부가 다수당과 대결해 이긴 것은 정부를 이끄는 클린턴 대통령이 역사에 남을 만한 정치의 고단수였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단 평가를 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그가 정치를 혐오하는 까닭은 자신이 정치에 잘 맞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과연 이명박 대통령이 이러한 대치 상황을 잘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 마련이죠. 마지막으로, 준예산 편성은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도 큰 부담입니다. 만약 정말 국회가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된다면 여당내의 비 이명박계열 의원들은 정부를 동지로 보지 않게 될 가능성이 있죠. 그렇게 된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를 길들이기는커녕, 국회의 지지세력을 잃어버리고 집권 후반기를 국회 전체와 싸우는 데 소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연말까지 나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올 한해 정부와 여당에 끌려다니기만 한 야당으로선 4대강 문제만이라도 성과를 올려야 하고, 여당은 정부의 협조 없이는 4대강 사업 예산을 수정할 수가 없는데 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만 하니 협상의 여지를 줄 수가 없습니다.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정부와 여야가 함께 만나 협의를 함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상황이죠. 결국, 정부를 위해 총대를 맨 여당이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을 함으로 야당이 아닌 국민 설득에 나섰는데, 이는 곧 야당을 무시한 채 예산처리를 강행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준비하는 연말에 이렇게 뒤틀린 정치현장의 모습을 보자니 답답한 마음이 드는군요. 부디 날치기 통과나 준예산 집행 없이, 성숙한 협상과 정치력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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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전망

경제 2009/12/22 07:07
작년 가을에 시작한 세계적 경제위기는 올봄 이후로 뚜렷한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실업률이 예상보다 낮게 나오는 등 실물경제가 살아나는 기미가 보인다는 점이 중요한데, 경기 회복이 금융계에만 머물지 않고 실물경제로 옮겨간다면 경제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중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몇 주 전 두바이의 경제위기가 불거지고, 그리스와 스페인의 신용등급이 내려가는 등 불안한 모습도 함께 눈에 띕니다. 빚에 의존해 경제 규모를 키우던 두바이의 몰락은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몰고 온 과다 채무 문제가 여전히 잠복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리스와 스페인은 유로존 전체의 위기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됩니다.

이러한 상반되는 두 가지 흐름이 있지만, 저는 단기적으로 볼 때 경기 회복쪽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근거는 우선 두바이 사태나 일부 유럽국가의 신용도 하락에도 세계 시장이 크게 요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세계경제가 허약한 체질이라면 작은 위기에도 크게 흔들릴 텐데, 나름대로 금융 시장에 충격을 줄 만한 소식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금융 시장이 점차 정상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합니다. 이는 작은 소식 하나에도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이던 작년 말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죠.

단기적으로 경제를 밝게 전망하는 또 다른 근거는 한국의 경제상황이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경제에서 수출 비중이 큰 나라고, 따라서 세계 경제의 상황이 즉시 반영됩니다. 게다가 한국은 나름대로 경제가 안정적이고, 정부의 규제가 심하지 않고, 규모가 크기 때문에 시장에서 빠져나오기 쉬워서 유동자금이 들어오기 좋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세계를 떠도는 돈이 많아질수록 한국으로 많은 돈이 들어오고, 이로 말미암아 경제 전체에 활기가 돌기 마련입니다(물론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줄어들 때 가장 심하게 타격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주가나 환율은 위기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올해 초와 비교했을 때 훨씬 좋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좋아지고, 이에 따라 한국 경제도 좋아진다는 말이 일반인의 살림살이가 나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반인은 일자리가 안정되고 월급이 많아지며, 내수경기가 살아나 자영업이 잘 되어야 경기 회복의 열매를 누리는 법인데, 지금 한국은 아무리 경기가 살아나도 자산가와 대기업만 수익이 늘고, 일반인은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아무리 GDP가 빠르게 성장하고 세계 언론이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보도를 했어도, 많은 국민은 살림살이가 갈수록 빡빡해진다고 느낀 것도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었죠. 따라서 한국 경제가 회복된다고 평범한 국민의 삶이 나아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장기적으로 본다면 작년에 터져 나온 세계 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잘못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새로운 이론을 마련하고, 이에 맞춰 경제를 전반적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너무나 길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무도 이러한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고, 결국 문제를 덮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쉬운 해결책을 찾기 마련이죠. 이렇게 문제를 덮어 버리면 당장은 괜찮아 보이지만, 결국 상처는 속으로 썩어들어가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더 큰 문제가 터져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때는 더 큰 아픔을 겪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한 법이죠.

사람들은 2000년대에 중반에 일본의 10년 불황이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경제위기가 터지자 일본은 다시 불황 상황에 빠져들었고, 그제야 일본이 경험한 경제회복이 일시적 착시현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불황은 끝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본의 경제위기는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구조와 하드웨어에만 집중하는 편향된 경제구조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일본이 진정으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경제와 문화를 포함하는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죠. 그렇지 못한다면 잠깐 찾아오는 호황은 또 다른 위기 속에 묻혀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계 경제도 금융부분의 지나친 확대와 탐욕을 조장하는 잘못된 제도 등 근본적인 영역을 손봐야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이러한 영역에서 성과를 거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고, 따라서 앞으로도 잠깐씩 찾아오는 경기 개선에도 세계 경제를 억누르는 무거운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P.S. 유럽의 크리스마스 휴가철을 맞아 저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블로그의 본격적인 운영은 1월 초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1주일에 한 번 정도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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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을 보다 보니까 "미소금융"이란 생소한 표현이 보이더군요. 찾아보니 은행 및 기업이 나서 저소득, 저신용 계층에 창업자금을 빌려주는 제도였습니다. 미소금융은 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인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을 모델로 하는데, 이 운동은 유엔이 2005년을 세계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의 해로 정했을 만큼 영향력이 큽니다. 특히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은 많은 방글라데시 서민들에게 가난을 탈출하는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이 은행을 시작한 무함마드 유누스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정도로 성공하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운동을 한국에도 도입한다니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것도 당연하죠.

그런데 그라민 은행과 미소금융은 비슷해 보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그라민 은행은 공동체 중심의 대출 방식입니다. 무보증으로 돈을 빌려주는 그라민 은행의 원금회수율이 98%에 달하는 까닭은 방글라데시 서민들이 특별히 양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어떻게 사는지 뻔히 아는 처지에, 돈을 떼 먹기엔 남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라민 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돈을 빌려가는 사람이 한 공동체에 살기 때문에 대출자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평소에 게으르고 무책임하던 사람이 돈을 빌리러 온다면 그라민 은행은 그에게 대출을 거부하겠죠. 따라서 그라민 은행은 현대적인 은행이라기보다는 공동체 의식에 기반을 둔 "조합"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미소금융은 철저하게 공동체나 인간관계를 배제한 채, 서류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존의 은행 조직을 모델로 합니다. 미소금융이 시작한 첫날의 모습을 담은 어떤 신문의 기사 제목은 "안동서 수원까지 온 사람도...'미소금융' 첫날부터 북새통"입니다. 수원에 있는 미소금융 관계자들인 안동에서 온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가 없고, 따라서 무조건 "서류를 해오라."라고 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서민을 위한 창업 자원 제공"과 함께, "공동체의 회복"을 이상으로 하는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의 정신이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을 선진국으로 가져오려는 노력은 대부분 실패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공동체가 해체되었기에 공동체의 압력에 의존해 대출을 상환하기도 어렵고,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 사람을 보고 대출을 하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공동체가 사라진 사회에서 "무담보 대출"은 떼먹어도 되는 눈먼 돈으로 보일 뿐이죠.

한국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이 성공하기 쉽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자영업의 포화상태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빈곤한 나라에서는 돈이 없어 자영업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많고, 따라서 자영업자가 부족해 자영업을 시작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생계 해결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자영업 포화상태가 몇 년째 지속 중이고, 자영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곧 망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미소금융에서 돈을 빌려 치킨집을 차렸는데, 장사가 잘 안 돼 폐업을 한다면 아무리 빌린 돈을 갚고 싶어도 갚을 길이 없겠죠. 실제로 지금처럼 자영업자의 폐업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는 미소금융의 원금 회수율이 낮을 수밖에 없고, 결국 몇 년 안에 미소금융의 자본이 바닥나 위기에 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미소금융으로 말마암아 자영업자가 증가한다면 자영업 전체의 어려움이 심해질 가능성이 크죠.

미소금융은 전형적으로 언론에 보도하기 좋은 이벤트성 행사처럼 보입니다. 미소금융을 신청하려면 각 기업 사무실로 찾아가야 한다니, 미소금융에 대한 언론 보도마다 기업의 이름 한 번씩 나오고, 기업의 입장에선 "우리는 사회를 위해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다"고 홍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소득층을 도우려는 기업의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러한 화려한 행사만으로는 저소득층을 장기적으로 돕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을 한국에 들여오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려면 "외국에서 성공한 모델을 그냥 들여오자"는 발상의 수준을 뛰어넘어서, 진정으로 서민들을 사랑하고,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들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진정으로 돕는 방법을 찾아야겠죠.

어쨌든 이번 미소금융사업에 기업들이 적게는 몇백억 원에서 많게는 몇천억 원까지 내놓았다는데, 이렇게 많은 돈이 낭비되지 말고, 진정으로 서민을 돕는 방향으로 잘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선 기업 홍보에 그치는 장치가 아닌,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방법을 찾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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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는 미덕?

경제 2009/12/15 00:23
저는 지난 11월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말로만 듣던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 다음날을 뜻하는데, 이 날은 대부분 상점이 크게 할인한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가 몰립니다. 특히, 금요일이 시작되는 자정부터는 할인 폭이 어마어마한 반짝 세일을 하기에 밤늦게 상점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오후에 아웃렛 쇼핑몰에서 쇼핑을 시작했는데, 아웃렛이라 싼 가격에 추가 할인을 하니 대부분 물건을 정상가 대비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 매출은 미국 경제의 현실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만약 블랙 프라이데이임에도 매출이 신통치 않다면 실물경기가 당분간 살아나기 어렵다고 예상할 수 있고, 예년 이상의 매출이 기록된다면 실물경기가 살아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매출이 크게 늘지도, 크게 줄지도 않아서 미래를 예측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경기가 살아나는 듯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상황의 반영이지요.

이러한 상황이 답답했는지 월스트리트 저널은 "절약"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소비를 늘리자!"라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습니다. 조 퀴난은 이 칼럼에서 "'짠돌이 정신'은 미국의 정신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며, 수많은 매력적인 상품을 소개하고 나서, "상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 애국시민의 의무다"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단지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경제학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즉, 경기침체는 소비의 위축 때문이며, 따라서 경기침체를 극복하려면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각국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리는 이유도 개인이 소비할 여력이 없기에 정부라도 소비를 늘려 경기를 살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소비가 는다면 생산도 늘고, 이렇게 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봅니다. 미국인들이 2000년대 초반, 9/11 사태 등으로 위기에 빠진 경제를 구하기 위해 Consumer patriotism에 나선 것이나, 중국 관료들이 최근 어려움을 겪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애국 소비운동을 제안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정말 올바를까요?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회의 부가 증가한다는 뜻, 즉,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린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소비는 물질이나 자원을 쓰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소비가 늘면 사회의 물질적 풍요가 줄어드는 법이죠. 이렇게 볼 때, 소비가 늘어난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정부가 소비를 늘이기 위해 신용카드의 사용을 권장했다가 많은 사람이 카드빚 때문에 파산하고, 신용카드회사들이 위기에 빠져 경제 전체가 어려움을 겪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소비가 늘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잘못된 믿음이 경제를 망친 좋은 예죠.

물론 때로는 소비자들이 돈이 있지만, 심리적 원인으로 소비가 위축되었을 때 소비를 권장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소비가 위축되면 생산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물건을 팔 수가 없고, 결국 경제활동 전체가 위축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비자가 정말 돈이 없어서 소비를 줄이는데 "애국을 위해 소비를 늘리자!"는 주장은 말이 안됩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그나마 있는 돈을 소비해 버리고 나면 나중엔 무엇으로 먹고삽니까? 당장은 소비가 늘겠지만 결국 돈이 없어서 빚에 의존하게 되고, 그러면 소비가 전보다 더 줄어들 수밖에 없겠죠.

지금 세계적으로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사람들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다면 소비를 줄여야 저축을 할 수 있고, 저축을 해야 부를 축적해 나중에 다시 소비를 늘일 수 있죠. 따라서 지금 소비가 줄어드는 현상은 분명히 경제에 부담되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가 살아나는 과정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비가 줄어들어야 수익을 못 내는 산업이 정리되면서 경제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지금 인위적으로 소비를 늘인다면 잠시 경기가 반짝할지 모르지만, 경기가 회복되기 위해 필요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장기적인 경제의 회복이 늦어집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소비 진작으로 경기를 살리자는 목소리만 큰 것 같아 문제입니다. 결국, 이번 위기는 경제학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로 나빠지고 나서야 끝이 날 것 같다는 암울한 생각이 듭니다.



P.S. 저는 지난 11월 말에 강의차 미국을 방문했고, 다녀와서는 독일에서 맡은 일을 마무리하느라 블로그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하고, 이제 시간의 여유가 생겼으니 다시 글을 열심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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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