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군이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하는 상황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천안함 침몰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기된 침몰 원인 중 여전히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가설은 북한의 공격설뿐이고, 새로운 가능성으로는 피로파괴설이 등장하였습니다.

북한의 공격설은 북한이 잠수함을 보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공격으로 보기엔 북한의 반응이 너무 침착할 뿐 아니라 북한 잠수함이 북방한계선 훨씬 남쪽으로 넘어와서 공격하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물론 잠수함보다 훨씬 작은 반잠수정이나 인간 어뢰를 보냈다는 주장도 나오긴 했지만,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장비로 남한 해역으로 몇 킬로미터나 들어와 정확하게 천안함을 공격하고 떠났다고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천안함 수색을 위해 투입된 잠수부들이 몇 분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바다 속에서 인간 어뢰가 작전을 벌였다고 믿기는 더욱 어렵죠. 하지만, 사고 당시 천안함 근처에 있던 속초함이 "세 때를 향해 발포했다"는 기이한 설명이나, 사고가 난 날 북한 잠수정이 출현했다는 보도 등 때문에 북한의 공격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피로파괴(Fatigue Fracture)설은 노후한 천안함에 구조적 문제가 발생해 가라앉았다는 설입니다. 특히 바다 속에서 천안함을 직접 본 잠수부들이 절단면이 깨끗하다고 증언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습니다. 피로파괴설이 맞는다면 "화약 냄새가 나지 않았다"라는 증언도 말이 되고, 폭발로 다친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설명됩니다. 실제로 아고라에는 균열로 말미암은 침수 가능성을 주장하는 전문가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도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공격이 아닌 사고로 분석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또한 YTN과 조선일보도 피로파괴설을 보도하면서, 점차 주류 언론도 피로파괴로 인한 침몰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만약 피로파괴설이 사실이라면 정부와 군은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선박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수많은 생명을 잃는 사고가 났다면 감독, 관리를 책임지는 이들의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죠. 게다가 피로파괴설이 사실이라면 정부와 군은 사고 원인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무선 교신 내용 및 목격자 증언만 분석해도 쉽게 상황파악이 되겠죠), 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잘못도 작다고 할 수 없겠죠. 따라서 관계 당국이 이번 일을 "원인불명"으로 몰고 가리라는 예측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어떤 조사결과가 나오든 지방선거가 끝나기까지 발표를 늦출 가능성이 크죠.

사고가 나자 이명박 대통령은 사고 직후 "철저하게 조사하고 내용이 나오는 대로 한 점의 의혹없이 모두 다 공개하라."라고 명령했다는데, 의혹은 너무 많고 정보 공개는 되지 않는 상황이니 국민들로선 매우 답답한 심정입니다. 빨리 사건 당시의 무선 교신 내용을 비롯해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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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저는 이곳 독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 뉴스를 통해 천안함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확인을 해보니 천안함이 서해에서 가라앉았고, 많은 사람이 실종되었더군요. 그게 여기 시간으로 금요일이었는데, 일요일인 지금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금요일에 나온 정보 이상의 내용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도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니 많은 사람이 답답한 것은 당연한 일이죠.

지금까지 공개된 정보를 정리해보자면, 1,200톤급 초계함 천안함은 서해 백령도 부근을 지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강한 충격에 선체가 두 쪽이 나면서 가라앉았고, 104명의 탑승자 중 46명은 실종이 되었습니다. 지금 정부와 해군은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실종자를 구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만, 배 앞부분과 뒷부분 모두 위치를 알지 못해 엄밀히 말해 진상 규명도, 실종자 구조도 전혀 진척이 없는 상황입니다.

천암함 침몰의 원인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고의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북한의 공격 또는 내부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소행으로 보기엔 북한 쪽 반응이 너무 침착하고, 북한이 이러한 일을 저지르려면 잠수함을 보내 어뢰를 발사하는 등의 과정이 필요한데, 군의 발표로는 이러한 활동이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내부의 소행으로 보자면 탑승한 군인이 저지른 일이라는 뜻인데, 이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군인의 명예를 짓밟는 일이라 함부로 언급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만약 이번 일이 고의가 아닌 단순한 사고라면 암초와 충돌, 선박의 노후로 말미암은 균열, 운반 중이던 어뢰나 석유로 말미암은 사고 일지도 모릅니다. 천안함이 암초와 부딪쳐 침몰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습니다. 백령도 근처 바다는 북방한계선 때문에 해군이 늘 배를 배치해 놓은 지역이고, 반세기 이상 배가 멀쩡히 다니던 길에 갑자기 암초가 생겨났다고 보기는 어렵죠. 선박의 노후 문제는 천안함이 건조된 지 20년이 넘은 배이고, 평소에도 자주 수리를 했다는 보도 때문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배가 노후가 되면 균열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두 쪽이 나면서 침몰했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운반 중이던 석유나 어뢰가 터졌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목격자의 증언을 따르면 폭발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었기에 이도 가능성이 크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뚜렷한 원인을 찾기가 어렵기에 북한이나 우리 군, 심지어 제삼국 군의 어뢰가 떠다니다가 배에 부딪혀 사고가 났다는 도 나오고 있습니다. 천안함에 탑재했던 기뢰가 떨어지면서 폭발해 사고가 났다는 주장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죠.

천안함 침몰의 원인 분석엔 정치적 성향이 큰 영향을 미치는 듯 보입니다. 보수를 대표하는 조선일보는 피격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기사를 올렸고, 보수 네티즌들도 "북한이 작은 잠수함이나 어뢰정을 파견해 천안함을 공격했다."라며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에 비해 진보 언론과 네티즌은 사고로 말미암은 침몰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나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부의 무능함에 대해선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본토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서 사고가 났는데 며칠이 지나도 가라앉은 선체가 어디 있는지 조자 모른다는 사실은 정부와 군 당국의 무능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많은 실종자가 나왔지만 해군의 초동대응은 잘됐다고 생각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국민의 정서와 청와대의 정서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사고의 원인이) 우리도 궁금하다."라는 박선교 청와대 대변인의 은 정부가 이번 사태를 맞아 얼마나 허둥대고 있는가를 증명합니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정부의 무능을 대통령부터 총리까지 군 면제자들이 모인 정부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이러한 정부 지도자들이 대부분 석연치 않은 이유에서 면제되었다는 점, 그리고 군 면제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독점한다는 점에서 이번 정부는 군사 부분에서 국민에게 신뢰를 주기 어려운 정부임이 분명합니다. 정부를 경제 발전을 이끄는 조직으로만 생각한 국민은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기에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 대가를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치르는 것이죠.

아직도 46명의 군인이 실종 상태이기에 이번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쪽난 배가 떠 있는 사진이 공개되고 나서도 "배가 어디갔는지 모르겠다"는 발표를 접해야 하는 국민은 이 정부가 이번 사태를 제대로 매듭지을 능력이 있는지 심히 의심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돌아선 민심을 돌이키려면 정부는 빨리 실종자 수색을 완료하고,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말고 원인을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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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암스테르담을 갔다가 시간이 나서 반 고흐 박물관에 갔습니다. 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몇 년 만에 다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니 감동이 더 크더군요. 19세기로부터 20세기까지 서양 미술의 전환기에 수많은 천재 예술가가 등장했지만 반 고흐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드뭅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진실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만화 주인공 스누피가 그러했듯 반 고흐의 작품을 방에 걸어 놓고 위안을 받는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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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위대성은 그가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얼굴 없는 서민이 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고대 시대엔 왕족과 귀족이 사회를 지배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론 중산층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늘 남에 의해 착취를 당하기에 무식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던 서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부를 창조하는 것은 노동이고, 따라서 경제의 주체는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은 이러한 변화한 분위기의 반영이었죠. 하지만, 예술계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고귀한 귀족들과 그들의 일상을 주제로 한 작품만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흐는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땀 흘려 일하며 자기 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큰 애착을 느꼈고, 가난한 자들을 모델로 한 작품을 많이 그립니다. 그가 농민의 삶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남긴 밀레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도 이처럼 추구하는 방향이 비슷했기 때문이죠. 그의 예술에서 가난한 자들은 인간의 순수성을 보존한 고결한 존재로 새롭게 해석되었고, 그들이 곡식을 가꾸는 밭, 그들이 신는 신발, 그들이 앉는 의자조차 새로운 영적인 의미를 얻었습니다. 주류 예술가들이 이러한 그의 작품을 조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민주주의가 전파되며 대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은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죠.

반 고흐는 다양한 문화의 충돌 속에서 예술적 에너지를 얻었다는 점에서도 현대 사회의 선구자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반 고흐 이전에도 유럽 내에서 다양한 문화의 혼합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감수성에 이탈리아의 멜로디를 혼합한 모차르트가 대표적인 예죠. 하지만, 반 고흐는 아시아, 특히 일본이라는 전혀 다른 예술 전통과 만나면서 전통적인 서양 미술의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서구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인쇄 기술의 발달로 대중이 다른 대륙의 예술을 쉽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정제된 예술에만 익숙한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과격한 색상, 자연을 보는 새로운 시각 등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예술가들이 자연의 요소들을 마음대로 조종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비해, 일본의 화가들은 인간이 만든 틀을 거부하는 자연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별 의미 없는 나뭇가지가 화면을 지배하는 일본의 판화를 반 고흐가 모사한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일본의 새로운 미학에 영향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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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다양한 문화의 혼합은 20세기 말에 들어 세계적인 조류로 자리 잡습니다. 특히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에 사는 미국인들은 점심은 피자(이탈리아음식)을 먹고, 저녁은 스시(일본 음식)을 먹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흑인들이 지배하는 미식축구 중계를 보다가 라티노 음악을 들으며 잠드는 식으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이는 정도는 다를지언정 많은 나라 사람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바입니다. 반 고흐는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를 혼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전통만 고수한 예술가들보다 훨씬 현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반 고흐는 미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그의 실력을 무시한 교수들에 의해 입학이 거절당하고 혼자서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카데미즘에 물든 예술가들의 매너리즘을 피할 수 있었고, 오랜 연구 끝에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합니다. 이러한 그의 개성은 자아를 찾기 원하는 현대인에게 큰 영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현대인들은 숨이 막힐 듯 개인을 억누르는 조직 속에 살면서 나만의 색깔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물론 나만의 색깔을 발견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많은 사람은 남들을 따라 삶으로 안정감을 누리기 원하죠. 그렇기에 반 고흐처럼 치열하게 인생을 살며 남과 다른 나의 모습을 완성한 사람은 현대인이 보기에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반 고흐는 기독교 사역에서부터 예술까지 평생 하는 일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예술계의 멸시를 받으며 외로이 살다가 결국 정신병 때문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의 삶은 비극적인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람이 불행을 경험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증가하는 우울증은 이러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성공한 인생을 산 위대한 영웅보다는, 비극적인 인생을 산 예술가를 훨씬 더 좋아합니다. 흑백영화 시대의 코미디언 중 20년대의 신분 상승 정신을 표현한 해럴드 로이드가 거의 잊히고, 30년대 대공황 시대를 대표한 찰리 채플린이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원인도 이러한 대중의 심리 때문일 것입니다. 예술에선 천재로 태어나 천재로 대우를 받으며 즐거운 인생을 산 피카소 보다, 천재적인 재능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괴로운 인생을 산 반 고흐가 현대인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반 고흐는 삶과 예술로 현대 사회의 특징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 예술가입니다. 비록 살아생전엔 무시를 당한 그이지만, 죽은 후에라도 재발견되어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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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주 금요일부터 회의 참석차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다녀왔습니다. 벨파스트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영국(UK)으로부터 독립하기 원하는 주민과 영국에 남기 원하는 주민들 사이의 충돌이 벌어진 지역이죠. The Crying Game이나 The Devil's Own 등 수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북아일랜드의 갈등은 1998년 성금요일 평화협정(Good Friday Agreement)를 계기로 진정이 되었고, 지금 벨파스트는 곳곳에 남아있는 희생자 기념비를 제외한다면 완전히 평화로운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북아일랜드 갈등은 20세기 말에 서유럽에서 진행된 무력충돌이라는 점에서 흔치 않습니다(물론 아일랜드 외의 지역에서도 코르시카나 바스크 등 특정 지역의 독립을 추구하는 단체가 일으킨 테러는 있긴 했지만, 규모가 북아일랜드보다 훨씬 작죠). 서유럽인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무력 사용의 폐해를  절실히 깨닫고 무력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였고, 실제로 대부분 지역에서 무력충돌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만은 IRA가 주도하는 테러를 중심으로 아일랜드계 주민과 영국계 주민 사이의 무력충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북아일랜드의 특수상황은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개의 다른 공동체가 한 지역에 모여 사는 북아일랜드의 상황은 주민들에게 뚜렷한 정체성을 심어주었고, 이러한 정체성은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는 적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분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적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을 낳았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거대한 무력충돌이 발생한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집단은 내부 결속력이 좋지만, 그만큼 공동체가 처한 어려움을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무력 충돌이 한 번 발생하면 문제가 계속 악화합니다. 민족끼리 전쟁할 때, 이익 집단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느 정도 싸우다가 멈춰야 하지만,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 구성원 전체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이죠.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상황도 아프리카인들의 공동체 의식과 관련이 깊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이익집단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봅니다. 문제는 아프리카인이 생각하는 공동체가 오늘날 국제사회의 기본 단위인 국가라는 개념과 다르다는 점이지요. 오늘날 대부분 지역에서 국가는 가장 중요한 이익집단이고, 구성원은 국가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열광하는 심리도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죠).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부족(tribe)이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한 집단이고, 부족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한다면 부족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내 정세가 안정이 돼야 국익에 도움이 되지만, 부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부족이 우리 부족을 괴롭힌다면 그 부족을 무력으로 응징해야 합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선 부족 간의 싸움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 간에도 적용이 됩니다. 전쟁은 거대한 자원을 소모하기 때문에 이익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전쟁하는 것 보다 거의 늘 유익입니다. 특히 대량 살상 무기가 사용되는 현대전에서는 전쟁의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명예, 복수심 등의 이유로 전쟁을 택할 수 있습니다. 국경지역의 황무지를 놓고 몇 년 간 전쟁을 벌여 결국 함께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가 좋은 예죠.

아프리카가 특별히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국가 의식이 약한 것은 아프리카의 독특한 역사적 특성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고대 4대 문명(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 기원을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4대 문명은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주변 지역으로 퍼졌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유럽인들이 호주와 남북미로 퍼지면서 결국 세계의 대부분이 고대 문명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고대 문명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글자를 바탕으로 한 행정조직과 바퀴를 바탕으로 한 교통수단입니다. 이러한 행정과 교통의 발달은 인간을 지역이라는 한계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유로워진 인간은 혈연, 지연을 넘어서는 거대한 조직을 구성하였고, 이는 결국 근대국가의 건설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이러한 고대문명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여전히 지역에 근거한 혈연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이들에게 유럽의 지배국가가 마음대로 설정한 국가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 뿐이죠. 물론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가 독립 한지 50년이 넘어서면서 아프리카인들도 점차 국가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의 마음에서 부족을 향한 사랑이 애국심으로 대체되기 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 보입니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한쪽에선 로봇이 렉서스를 만드는데 한쪽에선 올리브 나무 한 그루를 놓고 다투는 지구의 모습을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첨단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선 관련자들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이익집단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올리브 나무를 놓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은 올리브 나무가 생산할 경제적 이익이 아닌, 가족과 집단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공동체의 모습이지요. 이익 집단의 개념이 공동체를 파괴한 서양에선 공동체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지만, 공동체의 개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공동체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아프리카를 보면 깔끔한 이익집단의 관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볼 때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끝난 90년대는 영국이 블레어 총리의 주도 하에 New Britain으로 거듭나고, 아일랜드가 경제개발에 나서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이 약해지던 시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인간은 렉서스나 올리브 나무 어느 한 쪽으로만 살 수는 없고, 둘 다 필요하며, 상황에 따라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 이어 다음 주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강의를 다녀오게 됩니다. 블로그 업데이트가 늦어져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녀와서 다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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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전통적인 사회에서 집단을 묶는 근거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뭉친 유대인들이나 고조선을 세운 단군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는 한국,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를 프랑스의 시조로 보는 프랑스 인들은 인물에서 집단의 정체성을 찾는 좋은 예죠.

하지만, 혈연과 정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으로 바뀐다면 이러한 상징적 인물의 중요성은 대폭 감소하게 됩니다.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누구의 자손이든, 누가 수천 년 전 이 나라를 세웠든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유럽이 공동체(Gemeinschaft)의 개념을 버리고 사회(Gesellschaft)의 개념으로 넘어오면서 유럽인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토대를 찾게 됩니다. 이러한 토대를 제시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바로 장 자끄 루소였습니다. 그가 쓴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과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토대를 마련한 책이죠.

그는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머릿속에서 재구성해봅니다. 그의 생각 속에서 인류는 원래 자유를 즐기며 사는 독립적인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서로 비교하게 되고, 결국 강한 사람은 남을 지배하고, 약한 사람은 남에게 지배됩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모든 사회에 존재하게 된 불평등은 자유를 즐기기 원하는 인간의 본성과 반대라고 할 수 있죠(그래서 "L'homme est né libre, et partout il est dans les fers"). 그렇다면 이렇게 불평등한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만약 대부분 사람이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한다면 불평을 품은 사람이 너무 많아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유지되려면 인간은 사회 속에서 손해만 보면 안 되고 이익도 얻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이익을 적절하게 조율하기 위해선 사회적으로 계약을 맺어야 하죠. 이렇게 맺은 계약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가 됩니다.

이처럼 루소의 사상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는 영역이고, 이러한 충돌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막으려면 모두가 객관적인 계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관계를 사회의 기초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과 전혀 다르죠. 개인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이 내 가족을 해한다면 내가 찾아가서 가해자를 처벌해야죠. 지금도 서양의 영향을 덜 받은 지역(아랍권 국가, 아프리카 등)에서는 피해자 측이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는 일이 많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A Study of History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란 말이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사회 계약론에 기초해 사회를 본다면, 처벌도 사회적 계약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처벌에 대한 사회적 계약이란 곧 법이죠. 따라서 문제가 발생해도 법에 따른 처벌에 의존해야지, 개인이 처벌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만약 개인이 복수하려고 하면 법은 그 또한 범죄자로 보고 처벌을 하겠죠. 물론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직접 복수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많지만(찰스 브론슨의 Death Wish나 리암 니슨의 Taken 등), 선진국에서 법을 무시하고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사회 계약의 개념은 권력자의 권력을 제한할 때도 유용합니다. 전통적인 집단에서는 권력자가 법 위에 군림하면서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큽니다. 하지만, 계약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라면 아무리 통치자라 할지라도 사회 계약의 표현인 법을 넘어서는 권력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영국 신민(subjects)의 법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중세의 문서인 대헌장(Magna Carta)이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왕이라도 이러한 권리를 함부로 빼앗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리 보호의 개념은 사유 재산의 보호로 이어졌고, 유럽에선 이미 18세기에 이르면 지적 저작권을 보호받게 됩니다. 이처럼 법률에 의한 재산 보호의 전통은 현대에 들어 복잡한 경제 체제가 완성되도록 하는 밑바탕이 됩니다. 만약 법률이 개인의 재산을 잘 보호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재산인지 모호한 사각지대가 생기고, 이는 경제의 비효율을 낳죠. 데소토가 The Mystery of Capital에서 지적한 법의 영역 외에 존재하는 제3세계 국가의 재산은 이러한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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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