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물질의 영역과 영의 영역으로 구성된다면, 인간도 몸과 함께 영혼을 지니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의 고대 문명에서 발견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근대까지 이어져,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도 인간에겐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몸을 지닐 뿐 아니라 영혼을 지닌다면, 몸과 영혼의 관계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화를 낸다면 이는 영혼의 반응인데, 동시에 혈압이 오르고 호흡이 빨라지는 등의 반응이 몸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몸과 영혼에 동시에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은 영혼과 몸이 연결되었다는 뜻이고, 데카르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두뇌 속의 송과선(Pineal gland)이 감각의 정보를 영혼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즉, 영과 물질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특수한 기관이 존재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송과선도 물질인데, 어떻게 이러한 물질이 영혼과 연결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죠. 엄밀히 말해 그의 이론은 인간의 영혼과 몸의 존재를 독립된 실체로 가정하고, 이 둘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로 보입니다.
이러한 데카르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각도에서 영혼과 몸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그는 신은 인간의 영혼과 몸을 동일한 구조로 만들었고, 따라서 하나의 상황에 대해 영혼과 몸은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화가 날 만한 행동을 한다면, 나의 영혼과 몸은 각각 분노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두 실체의 독립된 반응이고 몸이나 영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같은 속도로 작동하는 두 시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도 늘 같은 시간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렇게 영혼과 몸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곧 벽에 부딪혔고, 결국 영혼의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두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거에 "영혼"의 반응이라고 여겨지던 인간의 감정은 단지 두뇌의 반응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죠.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인간의 영혼(psyche)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심리학(psychology)조차 "영혼이 없는 심리학"(Psychologie ohne Seele)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도 했죠. 신이라는 개념을 불필요하게 만든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영혼도 불필요한 개념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영혼이 있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데카르트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 것도 그가 가톨릭교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가 몸과 구분된다는 직관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존재"로 본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나, "영혼이 육체라는 장막에 거하는 존재"로 보는 기독교의 교리도 이러한 직관과 잘 맞습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영혼은 두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설명은 인간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으로 소개된 이탈리아 소설 돈 카밀로에는 돈 카밀로 신부가 영혼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을 사는 장면이 나옵니다. 돈 카밀로는 이 사람에게 "당신은 영혼을 믿지 않으니 내게 영혼을 파는 문서를 써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하고, 결국 거래가 성사됩니다. 하지만, 영혼을 판 사람은 나중에 돈 카밀로에게 돌아와 "잠이 오지 않는다."라며 영혼을 판 문서를 되찾아 갑니다. 그는 이성에 근거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였지만, "영혼이 존재한다."라는 직감을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이죠.
영혼의 존재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과학자들은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8% 같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침팬지와 전혀 다른 이유는 인간의 영혼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면 매우 설득력 있죠. 또한, 인간의 영혼은 도덕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도덕을 "사회가 만들어 낸 임의의 규정"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인간 행동의 규범"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도덕을 "영적인 질서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고, 따라서 도덕을 어기는 행위는 영혼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하면 안 되는 것이죠(해리 포터에는 "살인을 하면 그 충격으로 영혼이 쪼개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혼의 존재를 거부한다면, 살인이 꼭 나쁜 행동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도덕을 단지 어겼을 때 따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정으로 설명한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온 대로 "기게스의 반지(the Ring of Gyges)를 끼고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도덕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디 앨런은 애니 홀(Annie Hall)을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마무리합니다.
환자: 의사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은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의사: 그러면 동생에게 "너는 닭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면 되잖아요.
환자: 안되요. 저는 계란이 필요해요.
이 농담은 사랑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을 비유한 것인데, "영혼은 환상이다"라는 말을 늘 들으면서도 영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대인의 처지도 이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진리와 직관적 진리의 간극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는 실존적인 불안(Angst)의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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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몸을 지닐 뿐 아니라 영혼을 지닌다면, 몸과 영혼의 관계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화를 낸다면 이는 영혼의 반응인데, 동시에 혈압이 오르고 호흡이 빨라지는 등의 반응이 몸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몸과 영혼에 동시에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은 영혼과 몸이 연결되었다는 뜻이고, 데카르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두뇌 속의 송과선(Pineal gland)이 감각의 정보를 영혼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즉, 영과 물질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특수한 기관이 존재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송과선도 물질인데, 어떻게 이러한 물질이 영혼과 연결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죠. 엄밀히 말해 그의 이론은 인간의 영혼과 몸의 존재를 독립된 실체로 가정하고, 이 둘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로 보입니다.
이러한 데카르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각도에서 영혼과 몸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그는 신은 인간의 영혼과 몸을 동일한 구조로 만들었고, 따라서 하나의 상황에 대해 영혼과 몸은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화가 날 만한 행동을 한다면, 나의 영혼과 몸은 각각 분노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두 실체의 독립된 반응이고 몸이나 영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같은 속도로 작동하는 두 시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도 늘 같은 시간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렇게 영혼과 몸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곧 벽에 부딪혔고, 결국 영혼의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두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거에 "영혼"의 반응이라고 여겨지던 인간의 감정은 단지 두뇌의 반응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죠.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인간의 영혼(psyche)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심리학(psychology)조차 "영혼이 없는 심리학"(Psychologie ohne Seele)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도 했죠. 신이라는 개념을 불필요하게 만든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영혼도 불필요한 개념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영혼이 있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데카르트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 것도 그가 가톨릭교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가 몸과 구분된다는 직관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존재"로 본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나, "영혼이 육체라는 장막에 거하는 존재"로 보는 기독교의 교리도 이러한 직관과 잘 맞습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영혼은 두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설명은 인간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으로 소개된 이탈리아 소설 돈 카밀로에는 돈 카밀로 신부가 영혼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을 사는 장면이 나옵니다. 돈 카밀로는 이 사람에게 "당신은 영혼을 믿지 않으니 내게 영혼을 파는 문서를 써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하고, 결국 거래가 성사됩니다. 하지만, 영혼을 판 사람은 나중에 돈 카밀로에게 돌아와 "잠이 오지 않는다."라며 영혼을 판 문서를 되찾아 갑니다. 그는 이성에 근거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였지만, "영혼이 존재한다."라는 직감을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이죠.
영혼의 존재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과학자들은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8% 같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침팬지와 전혀 다른 이유는 인간의 영혼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면 매우 설득력 있죠. 또한, 인간의 영혼은 도덕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도덕을 "사회가 만들어 낸 임의의 규정"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인간 행동의 규범"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도덕을 "영적인 질서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고, 따라서 도덕을 어기는 행위는 영혼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하면 안 되는 것이죠(해리 포터에는 "살인을 하면 그 충격으로 영혼이 쪼개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혼의 존재를 거부한다면, 살인이 꼭 나쁜 행동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도덕을 단지 어겼을 때 따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정으로 설명한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온 대로 "기게스의 반지(the Ring of Gyges)를 끼고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도덕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디 앨런은 애니 홀(Annie Hall)을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마무리합니다.
환자: 의사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은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의사: 그러면 동생에게 "너는 닭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면 되잖아요.
환자: 안되요. 저는 계란이 필요해요.
이 농담은 사랑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을 비유한 것인데, "영혼은 환상이다"라는 말을 늘 들으면서도 영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대인의 처지도 이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진리와 직관적 진리의 간극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는 실존적인 불안(Angst)의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