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후로 유럽인들은 역사를 그리스 로마 문화가 번성했던 고대,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무너진 중세,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 근대로 나누었습니다. 이는 유럽인들이 르네상스 이후의 문화를 중세 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러한 구분은 매우 인위적이고 역사적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뚜렷이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봅니다. C.S. 루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 과목 초대교수로 취임하면서 이 과목의 개설이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고대, 중세, 근대라는 구분법이 무너지면서 최근에 역사를 나눈 기준으로 떠오르는 것은 19세기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아직도 그 실체가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19세기에 문학이나 예술, 철학의 영역에서 기존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의 근원이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역사 이래로 19세기 전까지 거의 어느 사회에서나 네 가지 질문(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존재하는가? 신비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그렇다"였습니다. 물론 사회마다 구체적인 믿음은 달랐지만,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는 점에서 인류의 문화는 거의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합리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면서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게 됩니다. 만물을 물질로 설명하려는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은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고, 영혼은 두뇌로 환원되었으며, 인생은 의미를 상실했고,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부분 철학자나 과학자는 이러한 지적인 발달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과거의 신념과 새로운 세계관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이신론(Deism)은 전통적인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결합하려는 시도의 좋은 예입니다. 이신론자들은 신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만들었고, 더는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동시에 신은 존재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곧 사람들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왜 신이 필요한가?"라고 묻게 되었고 이신론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지금 돌아보자면 이신론은 전통적인 세계관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만 유용했고, 신비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자란 사람에겐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죠.

과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에도, 대중들은 19세기까지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즉, 19세기에도 보통 유럽인들은 교회에 나가고, 영혼에 대해 말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신비로운 현상을 봐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이해한 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루터교가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되는 덴마크에서 "기독교를 더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로 바꾸지 않는다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라고 주장했고, 니체는 신이 존재할 여지가 없는 유럽의 지적 상황을 보면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키르케고르도 니체도 정신병자로 취급했지만, 이들의 사회 분석은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정확한 것으로 판명이 납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하는 전통적인 세계관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과학에 기초한 합리적인 세계관이 훨씬 설득력이 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인 큰 변화의 원인이 되는데, 특히 60년대에 나타난 학생운동, 성 혁명, 전통적인 기독교 교단의 몰락 현상 등은 모두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모두 "아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갑자기 증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발은 곧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신, 영혼, 인생의 의미, 신비를 거부하고 나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자 대우주와 소우주가 만나는 신비한 존재에서 우연히 생겨난 우주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 것이죠. 많은 사람은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꼈고, 이는 곧 과학에 바탕을 둔 기계적 우주론에 대한 반발로 이어집니다. 서양의 지배적인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심한 60년대가 곧 무신론의 유행으로 이어지지 않고 불교, 힌두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이러한 원인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종교는 거부한다 할지라도,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완전한 거부는 곧 인간성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했던 것이죠.

요약하자면, 인류 대부분은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라고 답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네 가지 질문 중 몇 가지, 또는 전부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러한 새로운 태도는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따라서 지금은 이러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가 같게 답한다고 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회에 다양한 관점이 혼재하는 혼돈의 시대가 된 것이죠.

오늘날 서양, 또는 서양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답이 주류를 이룹니다. 즉, 대부분 정부는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고, 이는 정부가 종교를 배제한 채 정책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공교육도 종교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죠. 법을 집행하는 경찰도 철저하게 종교의 영역을 제거하고 과학의 관점에서만 현상을 바라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경찰이 "이 사람은 저승사자가 와서 잡아갔기에 죽었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신이 있는지, 자신에게 영혼은 있는지 궁금해하며, 신비한 심령현상에 관한 책을 찾아 읽거나 종교적 체험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19-20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 살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태도에 따라 자신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괴리는 현대인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큰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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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세계관의 바탕엔 "합리적인 세상에 대한 믿음"이 존재합니다. 즉, 계몽주의자들은 세상이 합리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이러한 믿음은 "진리는 객관적이다"라는 주장을 낳습니다. 만약 세상이 합리적이라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정보인 진리도 합리적일테고,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이성으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에 비해 대부분 종교에서 가르치는 진리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종교에선 진리를 깨닫기 위해선 특정한 수련과정을 거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마음(영혼)이 준비되어야 하고, 이러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겐 아무리 합리적으로 진리를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이처럼 계몽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기독교도 계몽주의 세계관에 맞춰 설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존 톨랜드(John Toland)가 쓴 "기독교는 신비적이지 않다- 복음에는 이성에 반하거나 이성을 넘어서는 내용이 없으며 기독교 교리 중 신비라고 부를 수 있는 내용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논문" (Christianity Not Mysterious: A Treatise Shewing, That there is nothing in the Gospel Contrary to Reason, Nor Above It: And that no Christian Doctrine can be properly called A Mystery)는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갑니다. 이처럼 기독교를 신비의 영역에서 합리성의 영역으로 끌어내려는 움직임은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유행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몽주의 세계관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신비가 없는 세상이 좋은가?"라고 묻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신비가 없을 때 생기는 문제점 중 하나는, 신비가 없다면 인간의 자유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존재고, 인간의 결정도 합리적이라면, 우리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구공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충격을 받으면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은 100% 예측 가능하고, 인간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19세기에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 만물의 위치와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 존재는 우주의 미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 속에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의 자유"가 존재할 여지는 없습니다. 만물은 자연의 법칙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죠. 20세기에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파운데이션(Foundation)에서 사회학과 수학을 결합한 심리역사학(psychohistory)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그가 말한 심리역사학은 인류 전체를 놓고 본다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개인의 수준에서는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가 조금은 인정되지만, 크게 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의 전통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계몽주의 세계관이 깨진 중요한 계기로는 양자역학의 발전을 들 수 있습니다. 뉴튼 물리학에선 만물이 당구대 위의 당구공처럼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비해, 양자역학에선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특정한 광자가 유리판에 부딪힐 때, 유리판을 뚫고 나갈지 유리판에 반사될지 예측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광자가 유리판을 뚫고 나갈 확률을 계산할 수 있을 뿐이죠.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결정론은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광자 하나의 움직임조차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면 세상을 기계론의 관점에서 보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양자역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세계관의 변화는 신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과거에 신비란 "아직 이해되지 않은 영역"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인식되는 것이죠. 따라서 어떤 대상이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면 이러한 대상을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 좋은 예입니다. 과거엔 사랑도 사회학적,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았고, 지금도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 Both Sides Now에서 노래했듯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I really don't know love at all"), 사랑을 분석하는 대신 사랑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합리적인 관점에서 분석함으로 사랑의 신비를 해체하기 원하는 사람은 결국 사랑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을 뿐,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비라는 개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결정할 때도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세상이 합리적이고, 신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이러한 결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중력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사과처럼 일정한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에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20세기에 유행한 실존주의 철학은 이처럼 숨 막히는 합리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결정을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가 인생의 의미를 창조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인생을 합리성의 영역에서 신비의 영역으로 옮겨놓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죠.

계몽주의는 무지를 타파하고 미신을 추방하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신비를 제거함으로 세상을 무미건조한 장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계몽주의 때문에 인간에게 대자연의 신비를 가르쳤던 화려한 석양은 "공기 중 먼지에 의한 빛의 산란"으로 전락해버렸고,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 호르몬을 분비하는 결과로 생기는 감정"으로 치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신비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만물을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물론 신비의 존재는 합리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비와 합리를 두 극단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두 개념의 공존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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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로 목적론(teleology)의 유무를 들 수 있습니다. 고대철학, 그리고 고대 철학을 이어받은 중세철학에서 사물의 변화는 목적론의 관점에서 설명되었습니다. 즉, 어떤 존재가 변화할 때, "이 변화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이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죠.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로는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은 의미를 상실했고,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이 철학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변화는 과학을 비롯한 학문 전반의 분위기를 바꾸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자라는 현상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무엇을 위해 씨앗이 자라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씨앗의 잠재력을 실현해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는 답이 나옵니다. 즉, 씨앗은 그 내부에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하는 원동력이 있고, 이러한 힘이 씨앗을 자라도록 한다는 설명이지요. 하지만, 목적론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씨앗이 자라는 메커니즘, 즉 물과 영양분이 어떻게 흡수되고, 내부 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목적론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목적론으로 바라본 세상은 모든 사물이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kosmos)의 모습을 띱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 지구가 만물의 중심에 있고, 달 위의 세계가 "부동의 동자 (Unmoved Mover)"에 이르기까지 각종 천상의 존재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도 그의 철학이 목적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대 철학과 과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지고, 기계론이 득세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 목적은 우연으로 대치되고,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닌, 은하계 변방에 있는 작은 별을 중심으로 떠도는 행성 위에 우연히 생겨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처럼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기 마련입니다.

철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진 원인은 목적론을 유지하려면 인격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말은 그 존재에 인격(person)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목적론에 따라 세상을 보려면 목적을 품는 어떤 존재를 가정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존재가 목적을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려면 모든 존재에 인격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세상에서 인격을 배제하고 보기 원하는 서양철학의 흐름과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인격을 완전히 제외하고 세상을 보기도 어려운데, 이는 인간에게 인격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격의 존재 여부에 대해선 세 가지 주장이 존재합니다.

1. 세상에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세상 만물은 인격을 지닌다(또는 세상 만물은 인격적인 존재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
3. 세상엔 인격을 지닌 인간과 인격을 지니지 않은 사물이 존재한다.

1번을 주장하는 사람은 인간도 인격이 없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이는 인간성 파괴로 이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기계엔 도덕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기계라면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죠). 2번은 결국 신비주의로 이어지고,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 문명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2번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번은 1번 주장과 2번 주장의 문제를 피하기 위한 해결책인데,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왜 인간은 세상의 다른 존재와는 다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언어철학은 인생의 의미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언어철학자들은 "인생의 의미"라는 철학적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단어와 "의미"라는 단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결국 "인생과 의미는 결합하면 안 되는 단어들이고, 따라서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단지 언어적 오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인생이 의미 있기를 바라는 갈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너의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듯,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이 언어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죠.

목적론의 부재는 곧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로 이어지고, 이는 특히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죠. 과거엔 교육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지를 가르쳤는데, 오늘날 교육은 어떻게 살지만 가르치지 무엇을 위해서 살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육을 마칠 때 문제 해결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생의 목적은 알지 못하는 것이죠.

이처럼 교육이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종교나 가족, 또는 인간관계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철학자가 종교가 곧 붕괴하리라고 예언했지만, 실제로 종교인의 숫자는 더욱 늘어난 것은 종교가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동처럼 전통종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에서 서양의 영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원인은,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가는 서양인들처럼 인생의 방향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인간관계, 특히 연애도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더욱 연애도 하고 싶고, 가족도 꾸리고 싶은 이유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과 관련이 깊다고 보입니다.

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은 목적을 가정하지 않고 물질적 원인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론을 강조한 것은 물질적 원인만 생각한다면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문화를 지배하던 2천 년간, 서양인들은 인생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대철학의 소수파였던 유물론이 근대철학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하던 대로 인생은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조적으로 인생이 의미를 잃은 이 시대에, 인생의 의미는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었고, 그나마 운이 좋은 소수만이 "내 인생은 의미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과연 근대철학의 발전이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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