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로 목적론(teleology)의 유무를 들 수 있습니다. 고대철학, 그리고 고대 철학을 이어받은 중세철학에서 사물의 변화는 목적론의 관점에서 설명되었습니다. 즉, 어떤 존재가 변화할 때, "이 변화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이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죠.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로는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은 의미를 상실했고,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이 철학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변화는 과학을 비롯한 학문 전반의 분위기를 바꾸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자라는 현상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무엇을 위해 씨앗이 자라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씨앗의 잠재력을 실현해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는 답이 나옵니다. 즉, 씨앗은 그 내부에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하는 원동력이 있고, 이러한 힘이 씨앗을 자라도록 한다는 설명이지요. 하지만, 목적론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씨앗이 자라는 메커니즘, 즉 물과 영양분이 어떻게 흡수되고, 내부 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목적론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목적론으로 바라본 세상은 모든 사물이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kosmos)의 모습을 띱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 지구가 만물의 중심에 있고, 달 위의 세계가 "부동의 동자 (Unmoved Mover)"에 이르기까지 각종 천상의 존재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도 그의 철학이 목적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대 철학과 과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지고, 기계론이 득세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 목적은 우연으로 대치되고,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닌, 은하계 변방에 있는 작은 별을 중심으로 떠도는 행성 위에 우연히 생겨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처럼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기 마련입니다.
철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진 원인은 목적론을 유지하려면 인격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말은 그 존재에 인격(person)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목적론에 따라 세상을 보려면 목적을 품는 어떤 존재를 가정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존재가 목적을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려면 모든 존재에 인격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세상에서 인격을 배제하고 보기 원하는 서양철학의 흐름과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인격을 완전히 제외하고 세상을 보기도 어려운데, 이는 인간에게 인격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격의 존재 여부에 대해선 세 가지 주장이 존재합니다.
1. 세상에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세상 만물은 인격을 지닌다(또는 세상 만물은 인격적인 존재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
3. 세상엔 인격을 지닌 인간과 인격을 지니지 않은 사물이 존재한다.
1번을 주장하는 사람은 인간도 인격이 없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이는 인간성 파괴로 이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기계엔 도덕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기계라면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죠). 2번은 결국 신비주의로 이어지고,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 문명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2번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번은 1번 주장과 2번 주장의 문제를 피하기 위한 해결책인데,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왜 인간은 세상의 다른 존재와는 다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언어철학은 인생의 의미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언어철학자들은 "인생의 의미"라는 철학적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단어와 "의미"라는 단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결국 "인생과 의미는 결합하면 안 되는 단어들이고, 따라서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단지 언어적 오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인생이 의미 있기를 바라는 갈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너의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듯,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이 언어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죠.
목적론의 부재는 곧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로 이어지고, 이는 특히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죠. 과거엔 교육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지를 가르쳤는데, 오늘날 교육은 어떻게 살지만 가르치지 무엇을 위해서 살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육을 마칠 때 문제 해결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생의 목적은 알지 못하는 것이죠.
이처럼 교육이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종교나 가족, 또는 인간관계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철학자가 종교가 곧 붕괴하리라고 예언했지만, 실제로 종교인의 숫자는 더욱 늘어난 것은 종교가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동처럼 전통종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에서 서양의 영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원인은,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가는 서양인들처럼 인생의 방향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인간관계, 특히 연애도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더욱 연애도 하고 싶고, 가족도 꾸리고 싶은 이유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과 관련이 깊다고 보입니다.
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은 목적을 가정하지 않고 물질적 원인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론을 강조한 것은 물질적 원인만 생각한다면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문화를 지배하던 2천 년간, 서양인들은 인생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대철학의 소수파였던 유물론이 근대철학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하던 대로 인생은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조적으로 인생이 의미를 잃은 이 시대에, 인생의 의미는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었고, 그나마 운이 좋은 소수만이 "내 인생은 의미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과연 근대철학의 발전이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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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자라는 현상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무엇을 위해 씨앗이 자라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씨앗의 잠재력을 실현해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는 답이 나옵니다. 즉, 씨앗은 그 내부에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하는 원동력이 있고, 이러한 힘이 씨앗을 자라도록 한다는 설명이지요. 하지만, 목적론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씨앗이 자라는 메커니즘, 즉 물과 영양분이 어떻게 흡수되고, 내부 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목적론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목적론으로 바라본 세상은 모든 사물이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kosmos)의 모습을 띱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 지구가 만물의 중심에 있고, 달 위의 세계가 "부동의 동자 (Unmoved Mover)"에 이르기까지 각종 천상의 존재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도 그의 철학이 목적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대 철학과 과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지고, 기계론이 득세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 목적은 우연으로 대치되고,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닌, 은하계 변방에 있는 작은 별을 중심으로 떠도는 행성 위에 우연히 생겨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처럼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기 마련입니다.
철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진 원인은 목적론을 유지하려면 인격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말은 그 존재에 인격(person)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목적론에 따라 세상을 보려면 목적을 품는 어떤 존재를 가정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존재가 목적을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려면 모든 존재에 인격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세상에서 인격을 배제하고 보기 원하는 서양철학의 흐름과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인격을 완전히 제외하고 세상을 보기도 어려운데, 이는 인간에게 인격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격의 존재 여부에 대해선 세 가지 주장이 존재합니다.
1. 세상에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세상 만물은 인격을 지닌다(또는 세상 만물은 인격적인 존재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
3. 세상엔 인격을 지닌 인간과 인격을 지니지 않은 사물이 존재한다.
1번을 주장하는 사람은 인간도 인격이 없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이는 인간성 파괴로 이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기계엔 도덕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기계라면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죠). 2번은 결국 신비주의로 이어지고,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 문명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2번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번은 1번 주장과 2번 주장의 문제를 피하기 위한 해결책인데,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왜 인간은 세상의 다른 존재와는 다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언어철학은 인생의 의미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언어철학자들은 "인생의 의미"라는 철학적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단어와 "의미"라는 단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결국 "인생과 의미는 결합하면 안 되는 단어들이고, 따라서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단지 언어적 오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인생이 의미 있기를 바라는 갈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너의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듯,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이 언어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죠.
목적론의 부재는 곧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로 이어지고, 이는 특히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죠. 과거엔 교육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지를 가르쳤는데, 오늘날 교육은 어떻게 살지만 가르치지 무엇을 위해서 살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육을 마칠 때 문제 해결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생의 목적은 알지 못하는 것이죠.
이처럼 교육이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종교나 가족, 또는 인간관계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철학자가 종교가 곧 붕괴하리라고 예언했지만, 실제로 종교인의 숫자는 더욱 늘어난 것은 종교가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동처럼 전통종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에서 서양의 영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원인은,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가는 서양인들처럼 인생의 방향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인간관계, 특히 연애도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더욱 연애도 하고 싶고, 가족도 꾸리고 싶은 이유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과 관련이 깊다고 보입니다.
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은 목적을 가정하지 않고 물질적 원인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론을 강조한 것은 물질적 원인만 생각한다면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문화를 지배하던 2천 년간, 서양인들은 인생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대철학의 소수파였던 유물론이 근대철학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하던 대로 인생은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조적으로 인생이 의미를 잃은 이 시대에, 인생의 의미는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었고, 그나마 운이 좋은 소수만이 "내 인생은 의미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과연 근대철학의 발전이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