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걸어서 하루에 다닐만한 지역을 생활 반경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폴리스(polis)라고 불렀는데,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중요한 삶의 단위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폴리스적인(politikos)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폴리스가 인간 본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친밀했고 서로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났다." "이웃사촌이다."라는 말들은 지역 공동체가 중요하던 시절, 가까운 곳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과거의 지역 공동체가 이처럼 가까웠던 원인은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운명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함께 농사를 지었고, 함께 종교활동을 했고, 함께 오락을 즐겼고, 결혼 관계로 함께 묶였습니다. 만약에 전쟁이 난다면 이들은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거나, 함께 피난을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서로 가족처럼 느낀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하루에 수십km를 쉽게 이동하게 되었고, 생활 반경이 도시 범위로 넓어지면서 지역공동체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은 그저 우연히 이웃과 한 동네에 모여 살게 되었지, 이웃과 생활을 같이 할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같은 조기 축구회에서 활동해서 알고 지내는 이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처럼 나와 연관된 이웃은 같은 단지에 사는 수천 명 중 극히 적은 숫자고, 아침마다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은 대부분 전혀 다른 곳으로 출근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행정적으로 "XX구" "XX동"으로 묶어 놓아봤자 이들이 지역 공동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지역 공동체의 해체는 교통, 통신의 발달 및 도시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가 없는 사회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던 시절에 대한 대단한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이는 페이스북 게임 FarmVille이나 아이폰용 게임 Smurf Village처럼 과거의 지역 공동체를 재현하는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지역 화폐(local currency)를 도입하거나, 차를 타고 먼 지역에서 온 상품이 아닌, 우리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역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실(특히 도시의 현실)에서 거의 사라진 지역 공동체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인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라는 개념은 여전히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인구의 20%는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이고 1%는 굶어서 죽기 직전이다."라고 말하면 단순한 사실로 받아들이겠지만, "세계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20명은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고, 한 명은 굶어서 죽기 직전이다."라고 말하면 마음에 와 닿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지역 공동체의 수준에서 생각할 때 훨씬 더 절실하게 느끼는 법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가르치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표현은 "온 인류를 사랑하라."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지만, 훨씬 호소력이 큽니다. 지구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지역 공동체의 개념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지역 공동체에 대한 애착은 심리학적으로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선 인간이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를 던바의 숫자(Dunbar's number)라고 부릅니다. 이 숫자는 100명일 수도 있고 200명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150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50명이라면 대충 내가 작은 마을에 살면서 이웃사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숫자와 비슷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나와 친한 150명이 도시 곳곳, 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사람들은 한 마을에 사는 소수의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지역 공동체, 즉 마을은 "내가 개인적으로 친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단위"이자 "나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따라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죠.

이처럼 의미 있는 공동체가 사라진 도시에 사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통일성의 중요한 한 단위가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다른 단위인 개인이나 가족에게 집중하고, 이는 이기주의, 또는 가족 이기주의로 표현됩니다.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동체, 또는 직접 만날 수 있는 동아리 모임 등을 통해 과거의 지역 공동체에서 느끼던 소속감을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존재하는 어떤 공동체도 과거의 지역 공동체와 같을 수는 없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완벽한 재생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지역 공동체는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이상이기에 그만큼 매력적이고, 잠깐이라도 이와 비슷한 모임을 만난다면 대단한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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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가족은 인간의 탄생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위입니다. 가족은 보통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데, 부부관계는 사회적 계약으로 연결되고, 부모 자녀 관계는 유전자의 유사성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구성된 가족을 핵가족(nuclear family)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업혁명 이후로 서양의 보편적인 가족 형태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 최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모델입니다.

사회적 계약이라는 인위적 장치로 연결되는 부부관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존재합니다. "부부는 등 돌리면 남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부부관계가 별 의미가 없고, 따라서 이혼하고 나면 사회적 계약이 끝나기 때문에 부부관계도 사라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체 부부의 절반 이상이 결국은 이혼하는 선진국에는 부부관계의 청산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부부관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관계에 사회적 계약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기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 2:24)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이는 부부관계가 하늘로부터 온 절대적인 관계라는 뜻이죠.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옛날 인간은 요즘 인간 둘을 합쳐 놓은 커다란 존재였습니다. 이 인간들은 힘이 셌기에 신에 대항하였고, 제우스신은 이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으로 쪼개 놓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크기와 형태의 인간이 탄생한 것이죠. 이렇게 반으로 쪼개진 인간은 여전히 과거의 온전한 상태가 그리워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고, 결국 그 반쪽을 찾았을 때 다시 온전함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현실을 뛰어넘는 "운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랑이 이처럼 운명에 기반을 둔다면, 사랑으로 결혼하는 부부도 단지 사회적 계약이 아닌 운명적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부부가 될 사람은 빨간 실로 엮여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부부관계를 운명의 관점에서 본 예라고 하겠습니다.

가족의 또 다른 축인 부모 자녀관계는 부부관계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기 원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이는 인간이 자손을 낳고, 자손이 다시 자손을 낳을 때 가능하죠. 물론 이러한 "유전자 영생"이라는 목표는 자손을 낳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자손을 잘 돌볼 때 가능합니다. 만약 자손을 낳기만 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병들어 죽거나, 좋을 배우자를 구하지 못해 다음 세대를 생산하지 못하겠죠. 따라서, 인간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려는 본성을 타고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문화에 따라 자녀를 향한 사랑의 정도는 많이 다릅니다. 유럽에서도 라틴계 부모가 게르만계 부모보다 자녀에 대한 사랑 표현에 훨씬 적극적입니다. 이러한 자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는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자녀와 가까운 곳에 사는 풍습인데, 실제로 이탈리아 남성의 대부분은 결혼하고도 부모와 가까이 삽니다(My Big Fat Greek Wedding에서도 그리스계 아버지가 딸에게 집을 사줬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이 아버지 집 바로 옆집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한국도 과거에 모든 결혼한 아들이 부모와 함께 대가정을 이루고 살았고, 지금도 많은 부모는 자녀와 같이 살거나, 최소한 가까운 곳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에 비해 영미계, 게르만계에서는 자녀가 성장하고 나면 부모가 자발적으로 자녀와 거리를 둡니다. 시트콤 사인펠드에서도 조지 코스탄자의 부모가 조지와 거리를 두기 위해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모습이 나오고, 새라 제시카 파커와 매튜 맥커너히 주연의 달콤한 백수와 사랑 만들기(Failure to Launch)라는 영화에는 성인이 되고도 집을 떠나지 아들이 독립하도록 부모가 여자를 고용해 아들을 유혹하도록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엔 "손주 봐주기가 싫어서 자녀를 멀리하려는" 노부모들이 늘었다는데, 이는 성인이 된 자녀와 거리를 두기 원하는 심리라는 점에서 영미, 또는 게르만계 부모들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은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만약 부모와 자녀의 사랑이 지나치다면 자녀가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강한 성인이 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혼동해서 자녀의 인생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마련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자녀가 부모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가정을 공생 가정(Symbiotic family)이라고 불렀고, 이를 비생산적인 가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가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자녀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녀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기에 자녀가 성공하도록 강한 압력을 가하겠죠. 이러한 부모 밑에 사는 자녀는 자신이 부모의 삶까지 성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죠.

가족은 부부관계와 부모 자녀관계의 결합일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가족과 함께 할 때 특별한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귀중한 역할을 하죠. 문제는, 이렇게 내게 소중한 가족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무조건 가족의 이익을 위한다면 이는 가족 이기주의가 되고, 무조건 사회의 이익을 위한다면 매정한 사람이 되겠죠. 또한, 개인과 가족의 관계를 놓고 볼 때도 개인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가족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가족만 돌본다면 프롬이 말한 비생산적인 공생적 가족이 되고 말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한 수준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공동체를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를 생각해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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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은 "나눌 수 없다."라는 뜻의 라틴어(in + dividere)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개인은 나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명의 사람을 칼로 두 쪽 낸다면, 이는 두 명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체가 되겠죠. 따라서 개인은 인간의 가장 작은 단위이고, 고유의 통일성을 지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더 나눌 수 없는 개인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복잡한 구조가 드러납니다. 우선, 개인의 몸은 하나지만, 이 하나의 몸은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세포는 나름대로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백혈구를 보면 마치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독립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백혈구의 독립성은 인간의 몸 전체의 안녕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만 존재합니다. 이는 다른 세포도 마찬가지죠. 즉, 개인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는 개인이라는 유기체의 안녕과 자손의 증식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뇌세포든 피부세포든 각 세포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할 뿐, 다른 목표를 지니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가 수정란 속에 든 한 쌍의 유전자에서 나왔고, 결국 이 유전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수정란은 분화를 거듭하며 결국 거대한 인간의 몸이 형성되지만, 이러한 인간의 몸은 자신의 DNA를 다음 세대로 물려주기 원하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계획에 따라서 만들어진 도구이기 때문에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작은 부분일 뿐이죠.

물론 이는 인간의 몸이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한 것이고, 실제로는 하나의 몸속에 다른 목표를 지닌 세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암세포죠. 암세포는 다른 세포와 다르게 유기체의 건강 유지를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암이 발생하면 인간의 몸은 통일성을 잃고 정상세포와 암세포 사이에 싸움이 진행되게 됩니다. 만약 정상세포가 이긴다면 몸은 통일성을 되찾아 건강하여지고, 암세포가 이긴다면 몸은 죽게 됩니다(암세포는 주변의 세포를 암세포 화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목표가 없으므로 암세포가 이긴다고 새로운 건강한 생명체가 탄생하지는 않습니다. 즉, 암은 주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죠).

이처럼 몸이 암세포의 등장으로 통일성을 잃을 수 있듯, 영혼도 경쟁자의 등장으로 통일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융 심리학은 인간의 영혼의 핵심을 자아(ego)라고 봅니다. 자아가 영혼의 핵심인 것은 자아에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libido)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자아가 아닌 다른 실체가 등장해 심리적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그 경험을 중심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즉, 정상적인 사람(자아가 중심인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충격적인 경험의 기억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 세상을 보는 것이죠. 이처럼 자아와 경쟁하는 심리적 실체를 융은 콤플렉스라고 불렀습니다. 보통 콤플렉스는 잠복해 있다가 특별한 계기를 만나면 겉으로 표현됩니다(예를 들어, 열등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평소엔 정상적으로 행동하지만, 남이 자신에게 던지는 농담을 듣게 된다면 열등감의 시각에서 이 농담을 해석하고 화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콤플렉스가 심해진다면 자아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콤플렉스가 영혼을 지배하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경이 된다면 영혼이 통일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겠죠. 한 영혼에 여러 중심이 존재하는 정신분열이나 다중인격도 영혼이 통일성을 상실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삶에서 영혼과 육체 간의 통일성이 상실될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영혼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고 한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영혼이 원하는 바와 육체가 원하는 바가 다를 수가 있고, 이는 영혼과 육체 사이의 통일성을 깨트립니다. 일반적으로 육체는 적절한 영양공급, 수면, 휴식 등을 원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이러한 육체의 욕구를 무시한 채 사람들의 존경, 성취감, 금전적 보상 등을 얻고자 육체를 혹사할 수 있습니다. 잠을 안 자고, 식사도 거르면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일 중독자들이 그러한 예죠. 이는 육체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결국 영혼과 육체 모두 병들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육체가 쾌락에 탐닉하기 위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도덕적인 행위로 큰돈을 벌어 이를 방탕하게 사는 데 쓴다면 그의 영혼은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그가 정직하게 살기 원하지만, 그의 육체는 쾌락에 길들어져 있기에 부정직하게 버는 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는 결국 육체와 영혼의 부조화를 일으키고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죠.

이렇게 본다면 개인의 통일성도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잘 돌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보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돌보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다 인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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