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후로 유럽에서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이러한 흐름이 나폴레옹 전쟁을 기점으로 민족주의로 발전하면서 민족은 인간 통일성의 매우 중요한 단위로 자리 잡습니다. 이처럼 민족개념이 발전하면서 부족과 문명의 통일성은 약화하였습니다. 민족주의가 자라기 이전, 서유럽인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과 함께 유럽이라는 단위를 중요시했습니다. 중세의 서유럽은 로마 제국의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고, 기독교를 믿고, 라틴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쓰는(실생활은 다른 언어를 썼지만) 지역이었습니다. 이러한 공통된 문화의 중요성에 비하자면, 민족의 문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죠. 하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싹트자 각 민족이 고유의 언어를 학문과 행정의 언어로 쓰게 되었고, 기독교도 지역에 따라 다양한 교단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렇게 서유럽 문명은 민족의 개념에 밀려나면서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고, 이는 결국 민족과 민족이 명예와 실리를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집니다. 최근에 유럽이 유럽 연합을 통해 민족의 개념을 억누르고 문명의 개념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발전하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과거의 교훈 때문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역사를 연구할 때 더 나눌 수 없는 단위"로서 사회(society)라는 개념을 내놓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탈리아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다른 유럽국의 역사도 이해해야 합니다. 중세 때 이탈리아 남부는 스페인에 점령당했으니 이러한 과정은 스페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고, 19세기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것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권력을 쥐게 된 과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150년 전에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은 그 당시 유럽에 불던 민족주의의 물결을 이해해야겠죠. 이처럼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국가나 민족이라는 단위로는 부족하고, 역사의 무대가 되는 더 커다란 단위가 필요하다고 토인비는 주장했습니다. 그 단위가 바로 사회이고, 우리가 많이 쓰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문명(civiliza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한국 역사에 적용해 보자면, 한국의 역사도 동아시아 역사라는 배경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바뀌는 시기와 당나라가 송나라로 바뀌는 시기와 비슷하고,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시기가 원나라가 명나라고 바뀌는 시기와 비슷하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한 나라의 정치적 흐름을 뛰어넘는 지역적 변화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각 지역을 묶는 역사의 단위인 문명은 민족주의가 강하던 시절엔 거의 잊힌 개념이었습니다. 특히 이념 대결의 시대이던 냉전기엔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라 할지라도 이념이 다르면 아주 다른 세계인 양 인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한국의 옆 나라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중국은 죽의 장막에 가려진 알 수 없고 갈 수 없는 나라였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미국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멀지만, 심리적으론 매우 가까운 나라였죠.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 이념의 차이라는 장벽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점차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 과거에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았던 나라들을 묶는 "문명"이라는 개념을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특히, 미국에서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가 발생하면서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 이론은 이념의 지배가 사라진 세계를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로 떠오르게 됩니다. 헌팅턴 교수는 이제 세계가 문명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세력으로 재편되고, 이러한 세력 간의 갈등이 앞으로 국제관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리라고 예견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9/11 사태는 앞으로 다가올 갈등의 시작에 불과하겠죠.

문명 중심의 국제관계는 문명 간의 갈등을 낳을 뿐 아니라, 문명 내에서 인기 있는 문화가 주변 국가로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의 대중문화는 지금 일본과 중국 등에서 큰 인기를 얻는 중입니다. 이는 나이지리아의 영화가 아프리카에서 인기를 끌거나, 이집트의 영화가 아랍권에서 인기를 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가 문명 내에서 대중문화의 주도권을 쥐는 현상의 일부분입니다. 같은 문명권에 사는 사람은 서로의 문화를 즐기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문명권에서 온 문화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의 대중음악이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고, 중국의 음식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는 하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고, 대부분 문화는 자국이나 주변국까지만 전파될 수 있을 뿐, 문명의 벽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음식인 스파게티만 해도 서양에선 일상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지만, 비서양국가에선 여전히 특별한 때만 먹는 음식일 뿐입니다. 지금 한국엔 "우리 문화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퍼져야 한다." 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물론 한국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문화상품을 만들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러한 예가 전세계적으로 흔치 않다는 사실을 볼 때 이루기 어려운 목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아시아 문명에 뿌리를 둔 한국 문화가 동아시아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문명이 중요한 단위라는 사실을 깨닫는사람은 같은 문명권에서 거두는 성공을 귀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P.S. 요즘 글이 많이 늦어서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살다가 이탈리아로 옮겨오게 되는 바람에 좀 바빴고, 게다가 중간에 다시 독일을 방문하는 일까지 생겨서 좀 정신이 없었네요. 이탈리아는 얼마전 통일 150주년을 맞아 곳곳에 국기가 보이는 좀 들뜬 분위기입니다. 저는 6월에 독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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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우리는 흔히 "민족과 국가"라는 말을 쓰지만, 엄밀히 말해 민족과 국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민족은 언어, 문화, 역사, 그리고 유전자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고, 국가는 하나의 정부가 다스리는 정치적 단위입니다. 따라서 과거엔 하나의 민족이 여러 국가를 이루고 살거나, 하나의 국가에 여러 민족이 속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은 원래 연관이 없지만, 둘 사이에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크기입니다. 국가는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어느 정도 크기를 갖추어야 하고, 따라서 도시국가가 아니라면 스위스 정도가 최소의 크기입니다. 민족도 어느 정도 크기가 되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나 부족에 흡수되기 때문에 민족으로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유럽에는 삼천만 명에서 오천만 명 규모의 민족이 많은데, 이는 국가를 구성하기에 적합한 크기입니다. 물론 교통, 통신 기술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행정조직이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엔 민족을 단위로 통치하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민족 단위의 국가가 적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경제가 급격하게 발달하고, 이는 곧 새로운 행정조직을 창조하면서 민족을 기반으로 한 정치조직인 민족국가(nation-state)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민족국가의 개념은 곧 민족주의와 연결이 됩니다. 유럽에서 나타난 민족주의는 19세기에 세계 곳곳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특히,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되었던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보다 이 개념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미 16세기에 민족국가 건설에 성공한 일본은 민족주의의 열기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원했고, 곧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게 됩니다. 민족국가의 전통이 천 년이 넘은 조선은 유교의 관점이 아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보게 되었고, 이는 곧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독립신문, 독립문 등으로 표현)으로 발전합니다. 중국에서는 중국인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한족의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만주족이 이끄는 정부에 반발하게 되고, 이는 곧 청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이처럼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아프리카에선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엔 부족은 많았지만, 민족이라고 부를만한 집단은 적었고, 따라서 민족주의가 발달할 여건이 안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줄루족은 인구가 천만 명이 넘으니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라는 넓은 지역에 다른 부족과 섞인 채 흩어져 살기 때문에 이들이 민족의식을 키워 독립국을 건설할 상황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민족의식을 형성할 여건이 안되는 가운데 식민지배가 끝나고, 아프리카는 지도에 그은 선을 따라 국가가 들어섭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탄생한 국가 안엔 수많은 부족이 존재하고, 이들은 국가라는 통일성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부족과 갈등이 발생하면 바로 내전으로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크고 작은 내전이 끊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민족의식의 결여는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법을 어겼을 땐 처벌을 받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활동이 위축돼서 경제가 발전하기 어렵죠.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같은 부족끼리는 서로 형제, 자매 대하듯 하지만, 부족이 다르면 서로 신뢰하지 않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거래하길 꺼립니다. 만약 다른 부족 사람과 거래를 하다가 사기를 당한다면, 정부와 경찰도 결국 부족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죠(실제로 최근에 벌어진 리비아 사태를 봐도, 카다피는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카다파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처럼 부족을 넘어서는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못하기에 자원의 분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은 모두가 가난을 못 벗어나는 것이 아프리카가 가난한 원인의 하나입니다.

민족국가의 전통이 오랜 한국에서 한 민족이 한 국가를 형성하고 산다는 개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세상의 어느 국가도 한 민족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국가엔 외국인이 있고, 이들이 현지인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DNA와 문화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만 봐도 과거에 중국,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와서 정착한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한국인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예가 많죠.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례를 모두 "예외"로 처리해야 가능한 주장으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입니다. 특히, 최근엔 한국인의 10% 이상이 외국인과 결혼하면서 "우리는 단일민족이다."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죠.

한 국가에 이민자가 늘면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무너지는 모습은 이미 유럽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독일은 게르만족만의 국가가 아니라 게르만족과 터키인들의 국가로 변했습니다. 프랑스는 프랑스인과 북아프리카인들의 국가라고 할 수 있죠. 이처럼 민족국가의 시대가 끝나고, 다민족이 한 국가에 모여 사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국가를 더 중요시할 것인지, 아니면 민족을 더 중요시할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 사는 아랍인이 "영국"을 중요시하는지, 또는 "아랍"을 중요시하는지에 따라 이라크에 주둔한 영국군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겠죠. 그렇다면 국가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합성을 강조하겠지만, 국가보단 우리 민족이 중요하다는 민족 지도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와 민족 개념의 충돌은 21세기에 중요한 사회 긴장의 원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20세기와 더불어 민족국가의 시대가 끝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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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은 나, 가족, 그리고 민족을 중요한 통일성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가족은 나와 유전자의 연관성, 또는 특별한 사회적 계약으로 묶인 존재이고, 민족은 나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하지만, 과거엔 가족과 민족 사이에 두 가지 단계가 더 있었는데,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마을, 그리고 부족이 그것입니다. 지난번엔 마을을 살펴보았고, 이번엔 부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족은 민족의 하위개념으로, 같은 민족이지만 특별히 나와 연관성이 있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부족은 민족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데, 민족이 보통 천만 명 이상이라면 부족은 보통 백만 명 이하입니다.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부족이라는 개념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금도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민족보다 부족이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는 "왜 부족이라는 개념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통,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엔 민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나와 완벽하게 언어적, 문화적으로 같은 사람들의 모임인 부족이 훨씬 중요한 단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봐도 삼국시대 전까지 한반도 남쪽의 마한, 진한, 변한, 동쪽의 동예, 북쪽의 옥저 등 다양한 부족국가가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부족국가는 교통, 통신, 행정의 발달과 더불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정리되었고, 결국은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족국가가 민족국가로 발전하는 상황은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중세 유럽엔 수많은 부족국가가 존재하였지만, 근대에 이르러 부족국가가 통합되고 민족국가가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왕국은 동쪽의 부르공디, 남쪽의 나바르의 일부 등을 흡수해서 통일국가를 건설합니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색슨족, 반달족, 고트족 등 수 많은 부족으로 나누어진 민족이고, 이러한 부족주의 전통은 바이에른, 슈바벤, 프로이센 등 지역별로 다양한 문화와 사투리가 발달하는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독일에도 근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결국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통일국가를 건설하게 됩니다. 베를린에서 뮌헨까지 여행하려면 일곱 번 국경을 통과해야 했던 시대가 끝나고, 독일을 하나의 정부가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부족주의 전통은 뿌리가 워낙 깊고, 오늘날에도 정치체제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 정부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연방정부"(Bundesregierung)입니다. 즉, 권력을 가진 각 지역이 연합한 국가라는 개념이죠. 실제로 일부 국제회의에는 독일 각 지역 정부가 마치 독립국인 양 대표단을 파견하는 일도 있습니다(이는 스코틀랜드가 국제 축구 대회에 별도로 팀을 내 보내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이탈리아는 상황이 더 복잡해서, 중세시대엔 남쪽의 두 시칠리아 왕국(Regno delle Due Sicilie), 중부엔 교황이 통치하는 교황령, 나머지 지역엔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했고, 이는 각 지역이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지니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도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가리발디의 주도로 불가능할 것 같던 민족국가 건설이 실현됩니다. 이처럼 힘겹게 이룬 통일국가지만, 오늘날에도 이탈리아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자는 북부 연합(Lega Nord)가 북부지역에서 인기를 끌 정도로 지역 간의 불화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처럼 근대에 들어오면서 대부분 유럽국가는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힘썼는데, 이러한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합은 60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도 두 나라는 두 정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8세기에 정치적 통합을 통해 Kingdom of Great Britain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치적 체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잉글랜드 사람들과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베리아 반도와 브리튼 섬에서 벌어진 통합의 노력이 실패한 것은 두 개의 민족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두 민족은 두 개의 언어와 문화를 지니기에 통합을 하려면 한 민족이 일방적으로 흡수당해 정체성을 잃어야 하는데(이는 바로 20세기 초에 일본이 조선에서 시도하던 일이죠), 언어와 문화를 잃는 쪽에선 당연히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한 민족 안에 여러 부족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 통합이 훨씬 수월합니다. 또한, 부족은 인구가 적기 때문에 이질적인 민족에게 흡수당할 때 거세게 저항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큰 민족이 작은 부족을 흡수하는 경우는 많습니다(물론, 스페인의 바스크족처럼 작은 부족이 큰 민족에게 점령당한 후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을 추구하는 예가 있긴 합니다).

한국은 민족국가의 전통이 오래되었기에 부족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도 수면 밑으로 부족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지역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도 알고 보면 부족주의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역이란 별 의미가 없는 개념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어느 지역 사람하고는 혼인하지 않는다." "어느 지역 사람은 상대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지역에 근거하여 사람을 차별합니다. 이는 다른 지역 사람은 나와는 문화와 정체성이 다르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발견하는 부족주의의 또 다른 예로는 조선족, 탈북자 등에 대한 차별입니다.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와 같은 민족은 모두 나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귀중한 존재지만, 부족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와 민족이 같아도 나와 완전히 같은 문화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나와 상관없는 타인일 뿐이죠. 이러한 타인에게 거리감을 두고, 차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따라서 한국인들은 이론적으론 민족을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받아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부족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에서 지역감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계는 현실에서 거의 쓰지 않는 부족의 개념을 부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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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걸어서 하루에 다닐만한 지역을 생활 반경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폴리스(polis)라고 불렀는데,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중요한 삶의 단위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폴리스적인(politikos)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폴리스가 인간 본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친밀했고 서로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났다." "이웃사촌이다."라는 말들은 지역 공동체가 중요하던 시절, 가까운 곳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과거의 지역 공동체가 이처럼 가까웠던 원인은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운명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함께 농사를 지었고, 함께 종교활동을 했고, 함께 오락을 즐겼고, 결혼 관계로 함께 묶였습니다. 만약에 전쟁이 난다면 이들은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거나, 함께 피난을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서로 가족처럼 느낀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하루에 수십km를 쉽게 이동하게 되었고, 생활 반경이 도시 범위로 넓어지면서 지역공동체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은 그저 우연히 이웃과 한 동네에 모여 살게 되었지, 이웃과 생활을 같이 할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같은 조기 축구회에서 활동해서 알고 지내는 이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처럼 나와 연관된 이웃은 같은 단지에 사는 수천 명 중 극히 적은 숫자고, 아침마다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은 대부분 전혀 다른 곳으로 출근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행정적으로 "XX구" "XX동"으로 묶어 놓아봤자 이들이 지역 공동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지역 공동체의 해체는 교통, 통신의 발달 및 도시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가 없는 사회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던 시절에 대한 대단한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이는 페이스북 게임 FarmVille이나 아이폰용 게임 Smurf Village처럼 과거의 지역 공동체를 재현하는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지역 화폐(local currency)를 도입하거나, 차를 타고 먼 지역에서 온 상품이 아닌, 우리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역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실(특히 도시의 현실)에서 거의 사라진 지역 공동체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인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라는 개념은 여전히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인구의 20%는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이고 1%는 굶어서 죽기 직전이다."라고 말하면 단순한 사실로 받아들이겠지만, "세계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20명은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고, 한 명은 굶어서 죽기 직전이다."라고 말하면 마음에 와 닿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지역 공동체의 수준에서 생각할 때 훨씬 더 절실하게 느끼는 법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가르치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표현은 "온 인류를 사랑하라."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지만, 훨씬 호소력이 큽니다. 지구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지역 공동체의 개념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지역 공동체에 대한 애착은 심리학적으로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선 인간이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를 던바의 숫자(Dunbar's number)라고 부릅니다. 이 숫자는 100명일 수도 있고 200명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150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50명이라면 대충 내가 작은 마을에 살면서 이웃사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숫자와 비슷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나와 친한 150명이 도시 곳곳, 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사람들은 한 마을에 사는 소수의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지역 공동체, 즉 마을은 "내가 개인적으로 친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단위"이자 "나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따라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죠.

이처럼 의미 있는 공동체가 사라진 도시에 사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통일성의 중요한 한 단위가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다른 단위인 개인이나 가족에게 집중하고, 이는 이기주의, 또는 가족 이기주의로 표현됩니다.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동체, 또는 직접 만날 수 있는 동아리 모임 등을 통해 과거의 지역 공동체에서 느끼던 소속감을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존재하는 어떤 공동체도 과거의 지역 공동체와 같을 수는 없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완벽한 재생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지역 공동체는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이상이기에 그만큼 매력적이고, 잠깐이라도 이와 비슷한 모임을 만난다면 대단한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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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인간의 탄생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위입니다. 가족은 보통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데, 부부관계는 사회적 계약으로 연결되고, 부모 자녀 관계는 유전자의 유사성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구성된 가족을 핵가족(nuclear family)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업혁명 이후로 서양의 보편적인 가족 형태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 최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모델입니다.

사회적 계약이라는 인위적 장치로 연결되는 부부관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존재합니다. "부부는 등 돌리면 남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부부관계가 별 의미가 없고, 따라서 이혼하고 나면 사회적 계약이 끝나기 때문에 부부관계도 사라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체 부부의 절반 이상이 결국은 이혼하는 선진국에는 부부관계의 청산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부부관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관계에 사회적 계약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기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 2:24)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이는 부부관계가 하늘로부터 온 절대적인 관계라는 뜻이죠.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옛날 인간은 요즘 인간 둘을 합쳐 놓은 커다란 존재였습니다. 이 인간들은 힘이 셌기에 신에 대항하였고, 제우스신은 이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으로 쪼개 놓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크기와 형태의 인간이 탄생한 것이죠. 이렇게 반으로 쪼개진 인간은 여전히 과거의 온전한 상태가 그리워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고, 결국 그 반쪽을 찾았을 때 다시 온전함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현실을 뛰어넘는 "운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랑이 이처럼 운명에 기반을 둔다면, 사랑으로 결혼하는 부부도 단지 사회적 계약이 아닌 운명적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부부가 될 사람은 빨간 실로 엮여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부부관계를 운명의 관점에서 본 예라고 하겠습니다.

가족의 또 다른 축인 부모 자녀관계는 부부관계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기 원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이는 인간이 자손을 낳고, 자손이 다시 자손을 낳을 때 가능하죠. 물론 이러한 "유전자 영생"이라는 목표는 자손을 낳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자손을 잘 돌볼 때 가능합니다. 만약 자손을 낳기만 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병들어 죽거나, 좋을 배우자를 구하지 못해 다음 세대를 생산하지 못하겠죠. 따라서, 인간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려는 본성을 타고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문화에 따라 자녀를 향한 사랑의 정도는 많이 다릅니다. 유럽에서도 라틴계 부모가 게르만계 부모보다 자녀에 대한 사랑 표현에 훨씬 적극적입니다. 이러한 자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는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자녀와 가까운 곳에 사는 풍습인데, 실제로 이탈리아 남성의 대부분은 결혼하고도 부모와 가까이 삽니다(My Big Fat Greek Wedding에서도 그리스계 아버지가 딸에게 집을 사줬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이 아버지 집 바로 옆집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한국도 과거에 모든 결혼한 아들이 부모와 함께 대가정을 이루고 살았고, 지금도 많은 부모는 자녀와 같이 살거나, 최소한 가까운 곳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에 비해 영미계, 게르만계에서는 자녀가 성장하고 나면 부모가 자발적으로 자녀와 거리를 둡니다. 시트콤 사인펠드에서도 조지 코스탄자의 부모가 조지와 거리를 두기 위해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모습이 나오고, 새라 제시카 파커와 매튜 맥커너히 주연의 달콤한 백수와 사랑 만들기(Failure to Launch)라는 영화에는 성인이 되고도 집을 떠나지 아들이 독립하도록 부모가 여자를 고용해 아들을 유혹하도록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엔 "손주 봐주기가 싫어서 자녀를 멀리하려는" 노부모들이 늘었다는데, 이는 성인이 된 자녀와 거리를 두기 원하는 심리라는 점에서 영미, 또는 게르만계 부모들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은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만약 부모와 자녀의 사랑이 지나치다면 자녀가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강한 성인이 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혼동해서 자녀의 인생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마련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자녀가 부모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가정을 공생 가정(Symbiotic family)이라고 불렀고, 이를 비생산적인 가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가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자녀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녀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기에 자녀가 성공하도록 강한 압력을 가하겠죠. 이러한 부모 밑에 사는 자녀는 자신이 부모의 삶까지 성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죠.

가족은 부부관계와 부모 자녀관계의 결합일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가족과 함께 할 때 특별한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귀중한 역할을 하죠. 문제는, 이렇게 내게 소중한 가족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무조건 가족의 이익을 위한다면 이는 가족 이기주의가 되고, 무조건 사회의 이익을 위한다면 매정한 사람이 되겠죠. 또한, 개인과 가족의 관계를 놓고 볼 때도 개인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가족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가족만 돌본다면 프롬이 말한 비생산적인 공생적 가족이 되고 말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한 수준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공동체를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를 생각해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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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은 "나눌 수 없다."라는 뜻의 라틴어(in + dividere)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개인은 나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명의 사람을 칼로 두 쪽 낸다면, 이는 두 명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체가 되겠죠. 따라서 개인은 인간의 가장 작은 단위이고, 고유의 통일성을 지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더 나눌 수 없는 개인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복잡한 구조가 드러납니다. 우선, 개인의 몸은 하나지만, 이 하나의 몸은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세포는 나름대로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백혈구를 보면 마치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독립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백혈구의 독립성은 인간의 몸 전체의 안녕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만 존재합니다. 이는 다른 세포도 마찬가지죠. 즉, 개인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는 개인이라는 유기체의 안녕과 자손의 증식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뇌세포든 피부세포든 각 세포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할 뿐, 다른 목표를 지니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가 수정란 속에 든 한 쌍의 유전자에서 나왔고, 결국 이 유전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수정란은 분화를 거듭하며 결국 거대한 인간의 몸이 형성되지만, 이러한 인간의 몸은 자신의 DNA를 다음 세대로 물려주기 원하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계획에 따라서 만들어진 도구이기 때문에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작은 부분일 뿐이죠.

물론 이는 인간의 몸이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한 것이고, 실제로는 하나의 몸속에 다른 목표를 지닌 세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암세포죠. 암세포는 다른 세포와 다르게 유기체의 건강 유지를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암이 발생하면 인간의 몸은 통일성을 잃고 정상세포와 암세포 사이에 싸움이 진행되게 됩니다. 만약 정상세포가 이긴다면 몸은 통일성을 되찾아 건강하여지고, 암세포가 이긴다면 몸은 죽게 됩니다(암세포는 주변의 세포를 암세포 화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목표가 없으므로 암세포가 이긴다고 새로운 건강한 생명체가 탄생하지는 않습니다. 즉, 암은 주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죠).

이처럼 몸이 암세포의 등장으로 통일성을 잃을 수 있듯, 영혼도 경쟁자의 등장으로 통일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융 심리학은 인간의 영혼의 핵심을 자아(ego)라고 봅니다. 자아가 영혼의 핵심인 것은 자아에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libido)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자아가 아닌 다른 실체가 등장해 심리적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그 경험을 중심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즉, 정상적인 사람(자아가 중심인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충격적인 경험의 기억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 세상을 보는 것이죠. 이처럼 자아와 경쟁하는 심리적 실체를 융은 콤플렉스라고 불렀습니다. 보통 콤플렉스는 잠복해 있다가 특별한 계기를 만나면 겉으로 표현됩니다(예를 들어, 열등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평소엔 정상적으로 행동하지만, 남이 자신에게 던지는 농담을 듣게 된다면 열등감의 시각에서 이 농담을 해석하고 화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콤플렉스가 심해진다면 자아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콤플렉스가 영혼을 지배하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경이 된다면 영혼이 통일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겠죠. 한 영혼에 여러 중심이 존재하는 정신분열이나 다중인격도 영혼이 통일성을 상실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삶에서 영혼과 육체 간의 통일성이 상실될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영혼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고 한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영혼이 원하는 바와 육체가 원하는 바가 다를 수가 있고, 이는 영혼과 육체 사이의 통일성을 깨트립니다. 일반적으로 육체는 적절한 영양공급, 수면, 휴식 등을 원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이러한 육체의 욕구를 무시한 채 사람들의 존경, 성취감, 금전적 보상 등을 얻고자 육체를 혹사할 수 있습니다. 잠을 안 자고, 식사도 거르면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일 중독자들이 그러한 예죠. 이는 육체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결국 영혼과 육체 모두 병들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육체가 쾌락에 탐닉하기 위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도덕적인 행위로 큰돈을 벌어 이를 방탕하게 사는 데 쓴다면 그의 영혼은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그가 정직하게 살기 원하지만, 그의 육체는 쾌락에 길들어져 있기에 부정직하게 버는 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는 결국 육체와 영혼의 부조화를 일으키고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죠.

이렇게 본다면 개인의 통일성도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잘 돌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보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돌보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다 인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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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의 의미

분류없음 2010/12/27 06:55
다음은 월간 <새가정>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는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입니다. 이타카의 왕이었던 그는 다른 그리스의 장수들과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후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금방 끝날 것 같던 여행은 10년이나 걸리고, 그의 집안은 그의 아내를 차지하려고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풍지박산이 날 위기에 처합니다. 이처럼 곤경에 처한 오디세우스와 그의 가정을 불쌍히 여긴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Mentor)로 변신하고 나타나 오디세우스의 아들이 오디세우스를 찾도록 도와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멘토"라는 명칭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처럼 멘토라는 이름은 역사가 깊지만, 막상 멘토라는 개념이 주목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멘토는 조언이 필요한 젊은이, 즉, 멘티(mentee)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으면서 삶과 업무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인생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멘토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멘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통적인 관계와는 다릅니다. 멘토는 아버지처럼 도덕적 권위를 지니지만 가족은 아닙니다. 멘토는 때로 교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시된다는 점에서 학습지도가 중요한 임무인 교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또한, 멘토는 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 충고를 한다는 점에서 직장 상사와도 다른 개념입니다. 그리고 멘토는 조언을 통한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재정과 영향력으로 도움을 주는 후견인과도 다릅니다. 멘토는 삶의 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할 모형(role model)과 비슷하지만, 일방적인 존경심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역할 모형과 다르게 멘토 관계를 맺으려면 상호 동의가 필요합니다. 멘토와 멘티는 자발적으로 연결된 친밀한 관계이기에 친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서로에게 조언하는 관계인 친구와 다르게 멘토 관계에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도해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마지막으로, 멘토는 고민거리가 있을 때만 찾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꾸준히 만나는 관계라는 점에서 상담가와도 구별됩니다.

이렇게 엄밀히 멘토의 기준을 적용하자면 진정한 멘토의 개념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에 나오는 오비완 케노비는 젊은 제다이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멘토보다는 전통적인 스승의 모습에 가깝고,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매과이어 교수는 윌 헌팅에게 멘토처럼 조언을 하지만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조언자라고 볼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은 멘토 관계보다는 친구 관계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이 굳이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나오는 멘토의 이름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멘토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특정한 영역의 교육을 담당하지는 않았기에 스승은 아니고,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친구였고, 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니 직장 상사도 아니었으며, 평등한 관계가 아니니 친구도 아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역사상 "멘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바로 오디세이에 나오는 "멘토"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들어 멘토라는 개념이 대중에게 전파된 것은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교육은 늘 친밀한 인간관계에 기초하였습니다. 배우기 원하는 사람은 스승을 찾아가 자기를 소개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후 학문을 배웠고, 스승도 배우려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며 그를 가르칠지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교육이 인격적 관계에 기초하던 시절, 스승은 정보전달자이자 인생의 조언자였고, 따라서 스승 이외에 멘토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제도가 되면서, 가르쳐야 하는 임무를 띤 교사와 배워야 하는 임무를 띈 학생이 만나는 학교에서 따뜻한 인간관계는 약해지거나 사라지게 되었고, 교사가 인격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지식의 전달자는 아니지만 인격적으로 인생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멘토는 이러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죠.

멘토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또 다른 원인은 오늘날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려면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일단 교육을 마치고 나면 사회의 일원이 되어 관습에 따라 살아가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가능성을 보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선배로서 인생의 지혜를 나눠줄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멘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멘토를 만난 사람은 멘토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적인 멘토 관계는 멘티에게 뿐 아니라 멘토에게도 유익한 법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에게 유익한 멘토관계의 예를 보여줍니다. 프로이트와 융이 만났을 때 프로이트는 원숙한 심리학자였고 칼 융은 그보다 스무 살이 어린 젊은 의사였지만, 둘은 나이를 뛰어넘어 심리학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바탕으로 가까운 관계로 발전합니다. 두 사람은 수많은 토론을 벌였고, 서로의 꿈을 분석했으며,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융이 프로이트로부터 배웠을 뿐 아니라 프로이트도 융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래 융이 개발했지만 나중엔 프로이트도 자주 사용한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융이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끼친 좋은 예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성인이 된 후에도 좋은 멘토를 통해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죠. 물론 좋은 멘토를 만난 사람이라면 언젠가 자신도 좋은 멘토가 되어 젊은이들을 지도해 줘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대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회의 유기적 연결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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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도덕

경제 2010/12/15 18:46
지난 며칠간 인터넷에선 롯데마트의 "통큰치킨"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통큰치킨은 롯데마트에서 판매하는 닭튀김인데, 일반 치킨 제품보다 양은 많으면서 가격은 절반 밖에 안 하기 때문에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롯데마트가 이러한 제품을 내놓으면 다른 치킨집의 영업에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죠. 실제로 최근 10여 년간 직장인들은 "잘리면 치킨집 차리겠다."는 말을 쉽게 할 정도로 치킨집은 경험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자영업의 대표였는데, 대기업이 물량공세로 나오면 치킨집을 운영하는 사람들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소비자들도 싼값에 치킨을 즐길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도 언젠가 치킨집을 차려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을 생각할 때, 마냥 통큰치킨이 맛있게만 느껴질 수는 없겠죠.

결국, 롯데마트의 통큰치킨 판매중단으로 통큰치킨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정도 끝이 났지만, 이번 사태는 이마트 피자를 둘러싼 논쟁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마트 피자는 이마트에서 판매하는 피자로, 크기는 엄청나게 크지만, 가격은 저렴해서 많은 관심을 끈 제품입니다. 이마트피자가 화제를 일으키면서 이 제품 때문에 동네 피자집이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비판을 접한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은 "님이 걱정하는만큼 재래시장은 님을 걱정할까요?" "본인은 소비를 실질적으로 하시나요 이념적으로 하시나요?"라며 "싸게 공급하는 제품을 선택하면 되지, 이를 이념의 문제, 사회의 문제로 확대하면 안된다."라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러한 정용진 부회장의 발언은 지금 대형 마트들이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통해 작은 규모의 슈퍼마켓 시장까지 독점하려는 움직임을 두둔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대형 마트의 동네 상권 진출은 기존의 슈퍼마켓에 커다란 위협이지만, 엄밀히 말해 법적으로 제재할 근거가 없기에 불법은 아닙니다. 따라서 대형 마트는 "기업 경영의 자유"를 강조하며 지역 소매 시장에 진출하려고 하고, 기존의 슈퍼마켓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형 마트의 "탐욕"을 비난하며 이를 막으려고 하는 중입니다.

이처럼 대형 마트의 영업행위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뒤에는 "경제활동이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경제활동이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면 모든 경제활동은 도덕의 잣대로 평가해야 마땅하고, 경제활동이 도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경제활동을 할 때는 도덕을 무시해도 괜찮기 때문이죠.

전통적인 사회에서 경제활동은 늘 도덕의 영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공정한 가격"(just price)이라는 개념을 통해 각 상품은 가치에 따른 공정한 가격을 지니고, 따라서 어떤 제품을 공정한 가격보다 높게 판다면 이는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동양에서도 팔 매(賣)자엔 선비 사(士)자를 넣는 등 경제활동을 할 때 도덕을 따라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습니다. 상도덕이라는 말의 존재도 이러한 관점의 표현이죠. 하지만,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제품의 가격이 급격하게 변동하면서 전통적인 경제관은 변화를 맞게 됩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선 밀 1파운드가 은화 하나라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경제가 복잡해진 오늘날 23인치 모니터의 가격이 얼마이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것이죠. 이처럼 변화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경제관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애덤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우리는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의 착한 마음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경제활동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행동이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보자면 비난받아야 마땅할 행동도 경제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면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많은 문제를 낳았습니다. 우선, 경제를 도덕의 영역에서 분리하자 사람들은 경제의 영역에서 비도덕적인 행위도 쉽게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즉,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에서(또는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한에서) 모든 활동이 허용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영리한 사람만 이득을 보고 사회 전체로는 손해를 보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의 부동산 투기가 대표적인 예인데, 경제가 발달하던 70-80년대에 수많은 사람은 부동산 투기에 나섰고, 이런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한국 사회 전체로 보자면 집값이 지나치게 올라서 대부분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경제의 영역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돈 번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부동산 투기 전력이 있는 사람이 공직에 출마하면 "저런 사람이 어떻게 공직자가 될 수 있느냐"며 비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의 탈도덕화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경제를 다시 도덕과 연관하려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도덕적 의미를 고려해 소비한다는 윤리적 소비주의(Ethical consumerism)가 좋은 예죠 (한겨레가 쓰는 "착한 경제"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 따르면 물건을 살 때도 제일 싼 제품을 살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생산자가 생계를 유지하기에 적절한 가격을 지급한 원료로 만든 Fair trade제품을 사야 합니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커피숍에서 Fair trade 커피나 초콜렛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와 도덕을 결합한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불의한 경제구조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경제에 지나치게 도덕적인 관점을 도입한다면 경제가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가격의 결정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가 불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이 인기가 많으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고, 이 제품을 비싸게 판매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생산에 뛰어들면서 가격이 내려갑니다. 즉, 사회적 필요가 큰 제품에 자원이 모여들면서 결국 싼 값에 제품의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시장의 기능을 도덕이 대체한다면, 제품의 수요가 늘면서 가격이 오르면 이를 "상인들의 탐욕이 가격을 올린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고(실제로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요가 많다고 가격을 올리는 상인은 도둑질하는 셈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생산자들은 비난이 두려워서, 또는 정부의 가격 규제 때문에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생산에 참여할 의욕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는 많은데 생산은 적은 상태가 지속하고, 이는 제품의 품귀현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원유가가 올랐는데 가격을 통제해 주유소마다 휘발유가 동났던 오일쇼크 당시의 미국이 그러한 예죠. 더 흔한 경우는 도덕적 비난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정부의 가격 통제에도 가격이 오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는 출범하면서 몇몇 생필품의 가격을 특별히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정부가 관리하는 품목의 가격은 일반 물가보다 더 많이 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관점과 시장의 기능은 상충하기 때문에 공존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장을 도덕과 무관한 영역으로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특히, 시장이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시장의 활동이 도덕과 무관하다면, 인간의 삶은 대부분 도덕과 무관하다는 말이 되고, 이는 인간의 본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입니다. 만약 시장이 도덕과 무관하다면 경제적 강자가 경제적 약자를 핍박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는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져, 강대국은 약소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사회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정글이 되고 말겠죠. 이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이 아니라,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던 19세기의 역사적 현실입니다.

경제를 지나치게 도덕과 연관한다면 경제는 활력을 잃고 경제 발전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반대로, 경제를 도덕에서 완전히 분리한다면 인간성의 파괴와 구조적 불의를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안에 따라 경제와 도덕을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해야 합니다. 통큰치킨 사태만 해도 단순한 상황 같지만 실제로는 "싼값에 제품을 공급하고 소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는 경제적 시각"과 "가난한 소시민이 대기업의 위협이 없이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도덕적 권리"가 부딪치면서 많은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어쨌든 이번 사태는 경제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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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는 북한의 무력도발로 말미암아 긴장감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연례적인 남한의 군사훈련을 핑계로 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은 한국전쟁 이후로 최대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고, 이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일단 북한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지만, 곧이어 남측에 호전적인 용어로 "침략을 좌시하지 않겠다."라고 위협하는 등, 긴장 상태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고 보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많은 사람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었던 햇볕정책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온건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북한과 대립하기보다는 북한이 살 길을 마련해 줌으로 북한을 바꾸자는 정책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공개된 3대 세습이나 이번 연평도 공격에서 북한은 여전히 독재국가이며, 언제 다시 남한을 공격할지 모르는 반이성적인 국가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0년간 북한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바뀐 것이 없으니 햇볕정책에 대한 실망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죠.

하지만, 상황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햇볕정책이 나쁜 정책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우선, 햇볕정책은 북한의 실체를 정확히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외투를 벗기 싫어하는 나그네를 햇볕의 온기로 벗게 했다는 우화에서 따왔습니다. 이는 햇볕정책이 북한을 "변해야 하지만, 변하기 싫어하는 존재"로 본다는 뜻이죠. 북한을 바꾸려는 이유는, 북한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피해가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만성적인 전쟁의 공포는 무의식적으로 남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 기업의 주가가 외국의 비슷한 규모의 회사보다 훨씬 낮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게다가 북한이 이대로 가다가 어느 순간 북한 정부 붕괴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 뒤처리는 고스란히 남한 몫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북한을 바꿔서 남한과 대치관계를 끝내고,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서도록 하는 편이 북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훨씬 유리하죠.

이처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과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등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죠. 이뿐만 아니라 정상회담 등을 통해서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핫라인을 개설함으로 혹시 모르는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노무현 정부 말기에 이르면 북한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낮아졌고, 이에 따라 주가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고 2000선을 가뿐히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후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하게 됩니다. 금강산에서 일어난 관광객 피격사건을 기점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고, 개성공단도 위축되었습니다. 남북 간의 긴장완화를 위한 수많은 조치와 협의문은 대부분 폐지되거나 무효가 되었습니다. 핫라인은 끊어져 위기의 순간 남북이 직접 접촉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리하게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고 노력 중입니다. 무언가 위태하게 보이는 상황이고, 이번 연평도 도발도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햇볕정책으로 북한은 남한을 얕보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이 남한을 공격했다."라고 주장하지만, 햇볕정책과 상관없이 북한은 원래 호전적인 국가입니다. 이는 북한에 대해 강경책을 편 박정희, 전두환 정부 때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아웅산 테러가 일어난 데서도 알 수 있죠. 햇볕정책은 이처럼 호전적인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지 않도록 바꾸는 정책이었고, 실제로 햇볕정책은 긴장관계를 완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햇볕정책이 비난을 받는 또 다른 원인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은 연평도 도발이 있기 직전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였고, 이로써 북한의 핵 문제는 다시 한 번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사람은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했으므로 실패한 정책이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한 책임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뿐만 아니라, 김영삼, 클린턴, 조지 W. 부시, 오바마 정부가 같이 져야 합니다. 사실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 국가는 모두 북한의 핵무기를 개발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할 방법을 연구하는 동안 북한은 차근차근 핵개발을 진행했고,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사실 햇볕정책은 "대화를 통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전문가의 결론과 일치합니다. 대화를 통한 해결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전쟁을 통한 해결이 있는데, 이는 클린턴 정부 때 미국에서 몇몇 인사가 주장한 방법이지만 실천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쓴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북핵문제에 걸려 결국은 온건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카드를 제외한다면 북한 핵 문제는 대화로 풀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한반도 주변국이 모이는 6자회담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영국의 보수적인 언론인 The Economist도 연평도 도발 이후 낸 칼럼에서 "전쟁은 선택할 수가 없기에...결국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이 예뻐서가 아니라 대화가 유일한 해답이기에 대화하라는 말이죠.

어쨌든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이제 남북한은 한동안 대치상황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치상황에서 북한은 계속해서 남한에 대한 위협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고, 남한은 전쟁의 위협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맞받아치는 시늉만 하고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가끔씩 대화의 자리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는 다시 남한에 대한 무력시위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는 남북관계가 햇볕정책이 시작되기 전인 60-90년대의 상황으로 복귀한다는 뜻이죠. 과연 이러한 상황이 정말 햇볕정책을 쓰던 시절의 상황보다 좋은지는 각자 판단해 보면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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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로 유럽인들은 역사를 그리스 로마 문화가 번성했던 고대,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무너진 중세,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 근대로 나누었습니다. 이는 유럽인들이 르네상스 이후의 문화를 중세 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러한 구분은 매우 인위적이고 역사적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뚜렷이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봅니다. C.S. 루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 과목 초대교수로 취임하면서 이 과목의 개설이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고대, 중세, 근대라는 구분법이 무너지면서 최근에 역사를 나눈 기준으로 떠오르는 것은 19세기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아직도 그 실체가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19세기에 문학이나 예술, 철학의 영역에서 기존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의 근원이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역사 이래로 19세기 전까지 거의 어느 사회에서나 네 가지 질문(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존재하는가? 신비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그렇다"였습니다. 물론 사회마다 구체적인 믿음은 달랐지만,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는 점에서 인류의 문화는 거의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합리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면서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게 됩니다. 만물을 물질로 설명하려는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은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고, 영혼은 두뇌로 환원되었으며, 인생은 의미를 상실했고,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부분 철학자나 과학자는 이러한 지적인 발달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과거의 신념과 새로운 세계관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이신론(Deism)은 전통적인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결합하려는 시도의 좋은 예입니다. 이신론자들은 신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만들었고, 더는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동시에 신은 존재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곧 사람들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왜 신이 필요한가?"라고 묻게 되었고 이신론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지금 돌아보자면 이신론은 전통적인 세계관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만 유용했고, 신비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자란 사람에겐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죠.

과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에도, 대중들은 19세기까지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즉, 19세기에도 보통 유럽인들은 교회에 나가고, 영혼에 대해 말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신비로운 현상을 봐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이해한 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루터교가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되는 덴마크에서 "기독교를 더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로 바꾸지 않는다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라고 주장했고, 니체는 신이 존재할 여지가 없는 유럽의 지적 상황을 보면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키르케고르도 니체도 정신병자로 취급했지만, 이들의 사회 분석은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정확한 것으로 판명이 납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하는 전통적인 세계관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과학에 기초한 합리적인 세계관이 훨씬 설득력이 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인 큰 변화의 원인이 되는데, 특히 60년대에 나타난 학생운동, 성 혁명, 전통적인 기독교 교단의 몰락 현상 등은 모두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모두 "아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갑자기 증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발은 곧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신, 영혼, 인생의 의미, 신비를 거부하고 나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자 대우주와 소우주가 만나는 신비한 존재에서 우연히 생겨난 우주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 것이죠. 많은 사람은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꼈고, 이는 곧 과학에 바탕을 둔 기계적 우주론에 대한 반발로 이어집니다. 서양의 지배적인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심한 60년대가 곧 무신론의 유행으로 이어지지 않고 불교, 힌두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이러한 원인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종교는 거부한다 할지라도,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완전한 거부는 곧 인간성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했던 것이죠.

요약하자면, 인류 대부분은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라고 답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네 가지 질문 중 몇 가지, 또는 전부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러한 새로운 태도는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따라서 지금은 이러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가 같게 답한다고 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회에 다양한 관점이 혼재하는 혼돈의 시대가 된 것이죠.

오늘날 서양, 또는 서양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답이 주류를 이룹니다. 즉, 대부분 정부는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고, 이는 정부가 종교를 배제한 채 정책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공교육도 종교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죠. 법을 집행하는 경찰도 철저하게 종교의 영역을 제거하고 과학의 관점에서만 현상을 바라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경찰이 "이 사람은 저승사자가 와서 잡아갔기에 죽었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신이 있는지, 자신에게 영혼은 있는지 궁금해하며, 신비한 심령현상에 관한 책을 찾아 읽거나 종교적 체험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19-20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 살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태도에 따라 자신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괴리는 현대인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큰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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