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의 대형화

경제 2010/02/11 22:50
지난주 유럽발 악재에 흔들리던 세계 경제는 이번 주에 들어서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는 모습입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그리스가 유럽연합의 도움을 받으리라는 예측이 나오면서 각국의 증시는 오름세로 돌아섰고, 환율도 안정적인 모습입니다. 제가 전에 "악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재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중요하다"고 썼는데, 이러한 악재에도 시장이 빠른 시간안에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가 회복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낙관적인 분석으로 끝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납니다. 작년말의 두바이 사태나 이번 그리스 사태는 시장이 악재를 잘 소화해 내는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부실이 대형 부실로 커지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바이 사태는 두바이의 부실을 아랍에미레이트 연합이 떠안고 무마가 되었습니다(두바이는 아랍에미레이트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 사태는 그리스의 부실을 유럽연합이 떠안고 무마가 되고 있습니다. 더 멀리 보자면 2008년 터진 월스트리트의 위기는 월스트리트의 부실을 미국 정부가 떠 안고 무마가 되었습니다. 이는 좋게 말해 해결사가 등장해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해 부실이 대형화한 것입니다. 팔다리에 난 상처가 잘못되어 썩어들어간다면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치료가 됩니다. 계속 썩어들어가게 놔둔다면 문제는 계속 커질 뿐이죠.

미국의 예를 봅시다. 미국 정부는 부시 행정부 이후 공공부채가 지나치게 늘어나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관심 있는 분은 I.O.U.S.A.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빚에 헐떡이던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에서 문제가 터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월스트리트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월스트리트의 문제로 경제 전체가 흔들리가 경기진작을 위해 실물 경제 부분에도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빚으로 고생하던 미국 정부가 이번 사태로 빚이 엄청나게 늘었으니 대단한 문제이지요.

유럽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정부 빚이 많은 상태에서 경제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니 경제를 살리겠다고 돈을 쓸 수록 유럽 각국 정부의 빚 문제는 심각해져만 갑니다. 만약 유럽 연합이 정말 그리스를 돕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빚 문제가 유럽 연합 전체의 문제로 퍼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로존을 책임지다시피 하는 두 나라인 독일과 프랑스 중, 프랑스는 채무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리스를 돕기위해 빚을 더 낸다면 프랑스의 상황이 엄청나게 악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재정 상태가 안 좋은 다른 유럽국가(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스페인)까지 도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유로화의 미래 뿐 아니라 유럽 연합의 미래까지도 불투명하게 될 수 있죠.

물론 상황이 이러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경제위기가 벌어지면 정치가들이 사태를 주도하게 되는데, 정치가들은 단기적 해결책을 원하지 장기적인 해결책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당장 선거에 이기려면 몇달 내에 경제위기를 끝내야 하는 법이고, 이를 위해 30년 짜리 국채를 발행하는 쪽이 경제의 썩은 살을 도려내는 쪽 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인생에 공짜는 없고, 지금 해결하지 않은 문제는 언젠가 다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전세계가 심각한 홍역을 앓아야 되겠죠. 결국 이번 경제 위기는 이러한 홍역이 나타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벌어지는 자잘한 위기들은 사태가 흘러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징조일 뿐, 위기의 핵심은 아닌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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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한동안 괜찮아 보이던 세계 경제가 다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의 중심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고, 그중에서도 그리스입니다. 그리스는 재정 적자가 심한데다가 사회구조가 경직되어 경제 위기에 취약한 국가입니다. 정부가 적자를 줄이려고 해도 사회적인 반발 때문에 쉽지 않기 때문이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리스의 국가 신용도가 낮아질 위기인데, 문제는 지금까지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신용도가 낮은 국채도 담보로 인정해서 은행에 자금을 공급했는데, 이제 출구전략의 하나로 신용도가 낮은 국채를 담보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 국채를 보유한 금융기관들이 이를 담보로 유럽중앙은행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기에 그리스 국채 가격이 폭락하겠죠. 그리고 그리스와 비슷한 상황인 다른 유럽 국가들도 같은 어려움에 빠지고, 이는 곧 유럽 전체의 위기로 이어지겠죠.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러한 이유에서 유럽중앙은행의 출구전략이 이번 위기의 핵심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스의 신용등급이 떨어지다 보면 국가부도 사태에 이르거나 유로화 사용을 포기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데, 이는 유럽 연합 전체에 큰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다면 유럽 연합이 나서서 그리스를 구하려고 하겠죠. 하지만, 정치적인 간섭은 경제의 왜곡을 낳고, 이는 헤지펀드가 나서기 좋은 상황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헤지펀드는 그리스가 부도가 난다는 쪽으로 베팅하고, 실제로 그리스 국채를 내다가 팔면 그리스 국채는 폭락하고, 그리스는 부도위기에 몰릴지 모릅니다. 그리스 국채가격이 폭락한다는 말은, 아무도 그리스 국채를 사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고, 이는 그리스 정부가 돈을 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채 만기가 돌아오면 돈을 갚을 도리가 없어 부도가 나는 것이죠.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은 그리스를 구하기 위해 개입하려 들지 모르지만, 아무리 국가가 나서도 시장의 뜻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90년대 조지 소로스와 영국은행(영란은행)의 대결에서 알 수 있듯, 헤지펀드와 정부의 싸움에서 시장의 방향을 따르는 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죠.

이번 위기를 심각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의 상황이 문제의 작은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유럽 국가 중 재정적으로 취약한 나라는 그리스 외에도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이 있습니다(이들 국가의 첫 글자를 따서 PIIGS라고 부르더군요). 특히 이탈리아는 경제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탈리아가 큰 위기에 빠지면 유로화 체제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이미 2008년 가을에 다루었는데, 결국 그때 우려하던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번 위기는 미국만큼이나 경제규모가 큰 유로존 전체와 관련된 문제이고, 그만큼 이번 위기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되느냐가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번 사태가 꼭 세계 경제를 침몰시키는 거대한 태풍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경제 상황을 파악할 때 중요한 것은 악재가 아니라 악재에 대한 반응인데, 하루 만에 시장의 반응을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금요일은 시장이 크게 흔들렸지만, 다음 주에는 안정을 되찾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외부 환경 변화에 민감한 한국은 원화환율이 유로화 환율보다 훨씬 더 떨어진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럽의 위기가 전 세계로 퍼질 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번 사태는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한 상황에서 출구전략을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원래 출구전략은 위기에 빠진 시장에 돈을 공급하고 나서, 시장이 회복되면 시장에서 돈을 회수해서 과열을 막는다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에 돈은 공급했지만, 시장이 제대로 회복은 안된 상황입니다. 따라서 돈을 회수한다면 시장은 돈을 공급하기 전의 위기 상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돈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지나치게 많이 공급된 돈이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기에 내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지금 각국 정부는 돈을 회수하자니 위기가 돌아오고, 돈을 회수하지 않자니 부작용이 일어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러니 경제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언젠가 거품이 걷히고 나면 2008년 가을 상황에서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는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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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경제 전망

경제 2009/12/22 07:07
작년 가을에 시작한 세계적 경제위기는 올봄 이후로 뚜렷한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실업률이 예상보다 낮게 나오는 등 실물경제가 살아나는 기미가 보인다는 점이 중요한데, 경기 회복이 금융계에만 머물지 않고 실물경제로 옮겨간다면 경제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중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몇 주 전 두바이의 경제위기가 불거지고, 그리스와 스페인의 신용등급이 내려가는 등 불안한 모습도 함께 눈에 띕니다. 빚에 의존해 경제 규모를 키우던 두바이의 몰락은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몰고 온 과다 채무 문제가 여전히 잠복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리스와 스페인은 유로존 전체의 위기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됩니다.

이러한 상반되는 두 가지 흐름이 있지만, 저는 단기적으로 볼 때 경기 회복쪽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근거는 우선 두바이 사태나 일부 유럽국가의 신용도 하락에도 세계 시장이 크게 요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세계경제가 허약한 체질이라면 작은 위기에도 크게 흔들릴 텐데, 나름대로 금융 시장에 충격을 줄 만한 소식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금융 시장이 점차 정상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합니다. 이는 작은 소식 하나에도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이던 작년 말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죠.

단기적으로 경제를 밝게 전망하는 또 다른 근거는 한국의 경제상황이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경제에서 수출 비중이 큰 나라고, 따라서 세계 경제의 상황이 즉시 반영됩니다. 게다가 한국은 나름대로 경제가 안정적이고, 정부의 규제가 심하지 않고, 규모가 크기 때문에 시장에서 빠져나오기 쉬워서 유동자금이 들어오기 좋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세계를 떠도는 돈이 많아질수록 한국으로 많은 돈이 들어오고, 이로 말미암아 경제 전체에 활기가 돌기 마련입니다(물론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줄어들 때 가장 심하게 타격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주가나 환율은 위기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올해 초와 비교했을 때 훨씬 좋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좋아지고, 이에 따라 한국 경제도 좋아진다는 말이 일반인의 살림살이가 나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반인은 일자리가 안정되고 월급이 많아지며, 내수경기가 살아나 자영업이 잘 되어야 경기 회복의 열매를 누리는 법인데, 지금 한국은 아무리 경기가 살아나도 자산가와 대기업만 수익이 늘고, 일반인은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아무리 GDP가 빠르게 성장하고 세계 언론이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보도를 했어도, 많은 국민은 살림살이가 갈수록 빡빡해진다고 느낀 것도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었죠. 따라서 한국 경제가 회복된다고 평범한 국민의 삶이 나아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장기적으로 본다면 작년에 터져 나온 세계 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잘못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새로운 이론을 마련하고, 이에 맞춰 경제를 전반적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너무나 길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무도 이러한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고, 결국 문제를 덮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쉬운 해결책을 찾기 마련이죠. 이렇게 문제를 덮어 버리면 당장은 괜찮아 보이지만, 결국 상처는 속으로 썩어들어가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더 큰 문제가 터져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때는 더 큰 아픔을 겪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한 법이죠.

사람들은 2000년대에 중반에 일본의 10년 불황이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경제위기가 터지자 일본은 다시 불황 상황에 빠져들었고, 그제야 일본이 경험한 경제회복이 일시적 착시현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불황은 끝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본의 경제위기는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구조와 하드웨어에만 집중하는 편향된 경제구조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일본이 진정으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경제와 문화를 포함하는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죠. 그렇지 못한다면 잠깐 찾아오는 호황은 또 다른 위기 속에 묻혀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계 경제도 금융부분의 지나친 확대와 탐욕을 조장하는 잘못된 제도 등 근본적인 영역을 손봐야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이러한 영역에서 성과를 거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고, 따라서 앞으로도 잠깐씩 찾아오는 경기 개선에도 세계 경제를 억누르는 무거운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P.S. 유럽의 크리스마스 휴가철을 맞아 저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블로그의 본격적인 운영은 1월 초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1주일에 한 번 정도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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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는 미덕?

경제 2009/12/15 00:23
저는 지난 11월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말로만 듣던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 다음날을 뜻하는데, 이 날은 대부분 상점이 크게 할인한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가 몰립니다. 특히, 금요일이 시작되는 자정부터는 할인 폭이 어마어마한 반짝 세일을 하기에 밤늦게 상점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오후에 아웃렛 쇼핑몰에서 쇼핑을 시작했는데, 아웃렛이라 싼 가격에 추가 할인을 하니 대부분 물건을 정상가 대비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 매출은 미국 경제의 현실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만약 블랙 프라이데이임에도 매출이 신통치 않다면 실물경기가 당분간 살아나기 어렵다고 예상할 수 있고, 예년 이상의 매출이 기록된다면 실물경기가 살아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매출이 크게 늘지도, 크게 줄지도 않아서 미래를 예측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경기가 살아나는 듯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상황의 반영이지요.

이러한 상황이 답답했는지 월스트리트 저널은 "절약"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소비를 늘리자!"라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습니다. 조 퀴난은 이 칼럼에서 "'짠돌이 정신'은 미국의 정신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며, 수많은 매력적인 상품을 소개하고 나서, "상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 애국시민의 의무다"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단지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경제학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즉, 경기침체는 소비의 위축 때문이며, 따라서 경기침체를 극복하려면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각국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리는 이유도 개인이 소비할 여력이 없기에 정부라도 소비를 늘려 경기를 살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소비가 는다면 생산도 늘고, 이렇게 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봅니다. 미국인들이 2000년대 초반, 9/11 사태 등으로 위기에 빠진 경제를 구하기 위해 Consumer patriotism에 나선 것이나, 중국 관료들이 최근 어려움을 겪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애국 소비운동을 제안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정말 올바를까요?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회의 부가 증가한다는 뜻, 즉,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린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소비는 물질이나 자원을 쓰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소비가 늘면 사회의 물질적 풍요가 줄어드는 법이죠. 이렇게 볼 때, 소비가 늘어난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정부가 소비를 늘이기 위해 신용카드의 사용을 권장했다가 많은 사람이 카드빚 때문에 파산하고, 신용카드회사들이 위기에 빠져 경제 전체가 어려움을 겪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소비가 늘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잘못된 믿음이 경제를 망친 좋은 예죠.

물론 때로는 소비자들이 돈이 있지만, 심리적 원인으로 소비가 위축되었을 때 소비를 권장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소비가 위축되면 생산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물건을 팔 수가 없고, 결국 경제활동 전체가 위축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비자가 정말 돈이 없어서 소비를 줄이는데 "애국을 위해 소비를 늘리자!"는 주장은 말이 안됩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그나마 있는 돈을 소비해 버리고 나면 나중엔 무엇으로 먹고삽니까? 당장은 소비가 늘겠지만 결국 돈이 없어서 빚에 의존하게 되고, 그러면 소비가 전보다 더 줄어들 수밖에 없겠죠.

지금 세계적으로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사람들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다면 소비를 줄여야 저축을 할 수 있고, 저축을 해야 부를 축적해 나중에 다시 소비를 늘일 수 있죠. 따라서 지금 소비가 줄어드는 현상은 분명히 경제에 부담되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가 살아나는 과정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비가 줄어들어야 수익을 못 내는 산업이 정리되면서 경제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지금 인위적으로 소비를 늘인다면 잠시 경기가 반짝할지 모르지만, 경기가 회복되기 위해 필요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장기적인 경제의 회복이 늦어집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소비 진작으로 경기를 살리자는 목소리만 큰 것 같아 문제입니다. 결국, 이번 위기는 경제학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로 나빠지고 나서야 끝이 날 것 같다는 암울한 생각이 듭니다.



P.S. 저는 지난 11월 말에 강의차 미국을 방문했고, 다녀와서는 독일에서 맡은 일을 마무리하느라 블로그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하고, 이제 시간의 여유가 생겼으니 다시 글을 열심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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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주식 시장은 호주의 기준금리 인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코스피지수가 1,600선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호주의 기준금리인상이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 세계적인 출구전략의 신호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란 중앙은행에서 풀었던 유동성을 거두어 들이는 정책을 뜻합니다. 작년 가을 이후로 경제위기에 처한 각국 중앙은행은 시중에 엄청난 양의 돈을 풀었는데, 이제 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 돈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출구전략을 실행한 나라가 없었지만, 호주가 시작한 이상 많은 나라가 출구전략을 쓰리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이론대로라면 유동성 공급과 출구전략을 잘만 쓰면 경제위기를 그리 힘들지 않게 끝낼 수 있습니다.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중앙은행이 돈을 풀면 돈이 부족한 시중에 돈이 돌면서 수요가 촉진되고, 이로 말미암아 경기 전체가 살아나기 마련이고, 일단 경기가 살아나고 나면 금리 인상으로 유동성을 흡수해 경기과열을 막으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유동성 공급과 출구전략이 이론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대 초반 미국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과 뒤이은 출구전략이죠.

2000년에 들어 닷컴 버블이 터지고, 곧이어 9/11사태가 나면서 미국은 불황을 맞게 됩니다. 당시 FRB 의장이던 그린스펀은 유동성을 공급해 불황과 맞섭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불황은 금방 끝났지만, 시중에 넘처 나는 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합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그린스펀은 다시 금리를 낮추는데, 그러자 폭등했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였고, 부동산 가격의 폭락은 파생금융상품을 타고 금융권 전체를 부실로 몰고 갔고, 결국 이는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원인이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FRB의 출구전략은 이미 2006년에 실행되었는데 2000년대 초반에 풀린 돈은 시차를 두고 2008년까지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한번 흘러나간 돈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죠.

자산가격은 경기가 좋으면 오르고, 경기가 나쁘면 내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경기와 상관없이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기 때문에 자산가격이 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기는 나쁜데 유동성 때문에 자산가격이 올랐다면, 유동성이 줄어들면 자산가격은 폭락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유동성을 조금 공급해서 경기를 살리고, 유동성을 조금 줄여서 경기과열을 막는다는 생각은 실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유동성이 많이 풀려 경기가 과열된 상태에서 유동성을 조금 줄였다간 경제가 크게 흔들리기 때문이죠.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늘리고 줄이는 것도 문제지만, 여기다가 정부의 개입까지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방지를 중요한 사명으로 하기 때문에 경기가 과열되지 않을까 고민을 하지만, 정부는 물가상승보다는 경기침체를 더 무서워하기에 중앙은행이 출구전략을 쓰려고 하면 정부가 이를 제동할 수 있습니다(특히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쉽죠). 그러면 유동성은 위험할 정도로 많이 풀리게 되고, 결국 감당하지 못할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한국은행은 출구전략을 검토하겠다는데, 정부는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다."는 입장을 반복합니다. 즉, 정부는 물가가 아무리 오르더라도 유동성을 최대한 늘려 불황을 막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국은 G20국가 중 출구전략을 가장 늦게 쓰는 국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지금 경제 상황은 모래밭에다 기초도 없이 임시 건물을 세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초가 없으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이라 불안한지라 중앙은행은 "그만짓자."는데, 정부는 "기초 없어도 이 정도는 문제없다."며 계속 지으라고 종용하는 꼴이죠. 물론 정부의 말이 맞는다면 좋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대단히 위험한 정책입니다. 일단 중앙은행이 위기를 막겠다고 개입한 이상 출구전략을 잘 써도 시장이 정상화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정부까지 나서 출구전략도 제때 쓰지 못한다면 정말 심각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 유동성 공급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잘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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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작년 가을에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드디어 끝나가는 징후가 보입니다. 수출 의존도가 높기에 세계경제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한국 경제에도 훈풍이 부는 모습입니다. 한때 환율과 주가 역전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지만, 지금은 주가가 1,700선을 돌파하고, 환율은 1,200선 밑으로 떨어지면서 점차 위기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다는 소식도 집을 사려는 사람에겐 나쁜 소식이지만, 이번 경제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미국의 부동산 가격 급락 때문이었고 부동산 가격 상승이 부동산 대출을 해준 금융권의 부실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꼭 나쁜 소식만은 아닙니다. 게다가, 신문에는 "몇 년 만에 추석 분위기가 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실물경기까지 살아나는 분위기입니다. 이 정도면 경제위기는 이미 다 끝난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경제상황은 몇 달 전과 비교해서 크게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선, 주가와 환율이 제자리를 찾는 것은 수출이 잘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국인이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은 경기부양정책 때문에 돈이 넘쳐나는데 금리는 낮아서 투자처를 찾아 달러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중입니다. 이렇게 달러가 들어오니 환율이 내려가고, 이렇게 들어온 돈이 주식 시장에 들어가니 주가가 오르는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의 상승도 전국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의 현상입니다. 게다가, 거래량이 워낙 적으니 지금 거래가는 실제 경기상황의 반영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경기가 살아났다."는 보도도 실체가 있다기보다는 소비를 유도해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언론플레이에 가까워 보입니다. 실물경제의 상황은 언론을 믿기보다 여러분이 직접 주변을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지금 각국 정부는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말로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려 노력 중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경제가 살아난다고 믿는다면 투자와 소비가 늘면서 경제가 정말 살아나기 때문이죠. 하지만, 경제 상황이 안 좋은데 심리만 바뀐다면, 겉 자란 보리가 겨울 추위에 얼어 죽듯 투자와 소비에 나섰던 사람들만 피해를 보고 결국 경기 회복은 더욱 늦어질 것입니다.

저는 작년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이번 경제 위기가 10년 이상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고, 지금도 이러한 전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언론과 정부에서 긍정적으로 전망을 하여도, 실제 경제가 살아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경제위기는 나름대로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긍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예를 들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한계기업이 대부분 부도가 났고, 수익률이 좋은 기업만 살아남으면서 경제의 체질이 바뀌었습니다. 또한, 돈을 빌리지 못해 고생한 기업들은 엄청난 현찰을 쌓아 놓게 되었고, 이 덕분에 위기대처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경제위기의 또 다른 긍정적인 작용은 성장잠재력이 큰 기업이 사업을 확장할 기회가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2001년 9/11사태로 항공업계가 불황을 겪으면서 많은 항공사가 인원절감에 나서자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저가항공사들은 저렴한 인건비로 유능한 조종사를 많이 채용했고, 그 결과 지금은 저가항공사가 대형항공사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는 경제의 체질을 바꾸지도 못했고, 작은 기업이 좋은 자산을 저가에 사들일 기회를 제공하지도 못했습니다. 즉, 각국 정부가 위기를 넘기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경기침체의 긍정적인 기능이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경제위기의 또 다른 순기능은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점입니다. 1930년대 대공황은 "불황기에는 정부가 재정 적자를 통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고, 1970년대의 불황은 반대로 정부가 가격, 임금 통제로 경제에 간섭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년 말 경제위기가 터지자 진정으로 경제를 잘 아는 전문가들은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는데, 막상 1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이 나왔다는 소식은 전혀 들리지가 않습니다. 즉,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은 없이, 정부가 돈을 푸는 방식으로 문제를 덮고 넘어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돈을 풀어 경제위기를 돌파한다는 개념은 이미 그린스펀 의장이 90년대부터 열심히 쓰다가 이번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킨 개념에 의지한 해결책이 진정한 해결책일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이번 위기가 빠르게 정리되고 호황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과 현실을 혼동하면 안 되겠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이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P.S. 전에 쓴 대로 지난주부터 훈련 과정이 시작되면서 매우 바쁜 일정이 진행 중입니다. 꼭 시간이 없다기보다 정신적으로 피로해 글을 자주 쓰기가 어렵네요. 어쨌든 시간 나는 대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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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200개 이상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그중 어떤 나라는 대단히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대단히 가난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나라는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원이 많은 나라는 부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는 자원이 풍부함에도 대단히 가난합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자원이 거의 없지만,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축에 드는 나라입니다. 물론 사우디 아라비아 등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가 부유한 예도 있긴 하지만, 몇 년 전 저유가 시대엔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실이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음을 생각할 때 석유만으로 국가의 부를 유지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수준으로, 유럽과 비교해서 절반 정도이기 때문에 사우디 아라비아를 대단히 잘사는 나라고 분류하기도 어렵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기 때문에 부유하다는 주장도 존재합니다만,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아닙니다. 우선,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착취한다면, 부유한 나라는 어떻게 부유해져서 남의 나라를 착취할 수 있게 되었는지가 설명이 안 됩니다. 즉, 이러한 주장은 "왜 가난한 나라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은 될지언정,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해져서 남의 나라에 착취당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답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역사를 볼 때 착취를 하는 나라와 착취를 당하는 나라는 정해져 있지 않고, 시대가 지나면서 늘 바뀌기 마련입니다. 중세 시대엔 유럽이 가난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에게 억눌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인이 아랍인을 억누르게 됩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주변국을 착취했지만, 근대 이후엔 서구 열강과 일본에 착취당하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처럼 중국이 대미 무역흑자를 계속 낸다면, 미국은 중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착취이론은 이처럼 착취를 당하던 국가와 착취를 하던 국가의 입장이 바뀌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죠.

한국인은 국가간 경제력의 차이를 노력의 차이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열심히 일하는 나라는 잘살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나라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 말은 직관적으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많은 경제학자는 이러한 설명을 거부합니다. 우선, 개인은 노력하는 사람이 돈을 벌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국가 단위로도 이러한 논리가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죠. 또한, 요즘 처럼 양극화 현상이 심한 사회에선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초기 자본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가정 출신보다 훨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국가도 많고, 이런 나라에 함부로 "너희가 가난한 이유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난한다면 너무 잔혹한 태도일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나라에 가 보면 게으른 사람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이는 그 나라의 실업률이 높기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한국인도 가난하던 시절에는 외국인들로부터 "게으른 국민"이라는 비난을 들었지만(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이, "아침에 일찍 깨는 사람이 없어 조용한 나라"라는 해석도 있더군요), 지금은 잘살게 되면서 어느 나라보다 근면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독일인들도 가난했던 19세기엔 게으르다는 평판이 있었다는군요. 이러한 이유에서 제프리 삭스 교수나 장하준 교수 등은 경제수준의 차이가 노력의 차이에서 온다는 해석을 거부합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차이를 경제수준 차이의 원인으로 보는 해석이 있는데, 이는 막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가 대표적입니다. 베버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섞여 사는 독일에서 개신교도가 가톨릭교도보다 부유한 원인을 개신교의 교리가 자본주의를 낳았고, 따라서 개신교도는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열심히 돈을 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책을 쓰던 19세기엔 이러한 해석이 상당히 그럴듯했는데, 지금 독일의 경제 상황을 보면, 가톨릭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남부는 부유한 데 비해, 개신교가 강한 북부는 남부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뒤떨어집니다. 국가 간의 경제력을 봐도 과거엔 영국 등 개신교 국가가 훨씬 부유했지만, 지금은 이탈리아 등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와 대등하거나 앞설 정도로 경제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또한, 동아시아가 가난하던 시절엔 유교가 경제발전을 가로막는다는 해석이 유행했지만, 동아시아가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유교야말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습니다. 요즘은 BRICs 4개국의 경제발전이 눈부신데, 이 네 나라의 문화에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찾는 해석도 곧 등장하겠죠.

결국, 크게 놓고 보았을 때, 인류는 아직도 경제의 발전과 후퇴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도 <경제학의 향연>(Peddling Prosperity)에서 미국이 2차대전 이후에 유지하던 "경제의 마술"을 잃어버린 원인에 대해 "알 수가 없다."라고 설명합니다. 미국처럼 경제학자들이 늘 경제활동에 대해 연구하는 나라도, 왜 수십 년간 잘되던 경제가 갑자기 나빠졌는지 알 수 없다면, 경제활동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지 않은 나라의 과거사를 근거로 그 나라가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진 원인을 찾기는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자신의 무지를 화려한 수사로 포장해 마치 모든 경제현상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듯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 결과 대중은 "나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이해하고, 따라서 이들이 정부에 제안한 정책을 따르면 꼭 경제가 살아나겠지." 하는 환상을 갖게 되죠. 하지만, 지금 정부에 조언을 하는 경제학자들은 작년에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년에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온다고 예측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간은 매우 단순한 현상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잦은, 매우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계몽주의가 남긴 유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한다면, 미래에 대해 함부로 예측하기 보다는 겸손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겠죠. 경제에 대해서도 "미래는 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엔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를 모두 경계하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계몽주의와 경제학 연재를 마칩니다. 조금 무겁고 딱딱한 내용이라 재미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즐거운 주말 되시고,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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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미국 대선에서 세라 페일린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와 정통 보수층의 지지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던 존 매케인을 도우며 맹활약을 벌였습니다. 알래스카 출신인 페일린은 미국 본토의 보수 정치인들이 잃어버린 보수주의의 가치관(기독교, 가정중심, 동성애 반대, 백인 중심의 사고 등)을 그대로 재현해 냈기에 보수적인 유권자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페일린은 "작은 마을에 사는 미국인이 진짜 미국인이다."라는 말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죠. 미국 본토에서 떨어진, 매우 특수한 지역에 사는 사람이 진짜 미국인을 논한다는 사실이 우습긴 하지만, 페일린 자신이 보여주듯, 정치적 경향만 놓고 본다면 알래스카 인들이 본토 미국인보다 20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더 잘 반영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처럼 본토에서 떨어진 지역이 본토보다 더 본토의 전통적인 사고를 잘 계승하는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중엔 한국의 70-80년대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막상 한국에 사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전통적인 생각을 버렸는데,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미국으로 떠나던 당시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간직하기 때문이죠. 또한, 코리아타운에 가면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90년대풍의 간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미적 감각이 한국을 떠난 당시 이후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18세기 유럽 문화의 산물이고, 유럽이 18세기를 극복하고 21세기로 넘어왔는데 비해, 미국은 여전히 18세기 유럽 문화의 전통을 따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한 예 중 하나가 바로 세계의 질서에 대한 믿음이지요. 18세기 유럽인들은 뉴턴의 물리학으로 자연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사조에 크게 영향을 받은 미국인들은 지금도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20세기에 물리학 혁명을 거치며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을 포기하게 된 유럽인들은 세상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존재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죠.

이러한 철학적인 차이는 경제를 대하는 태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인들은 합리적으로 머리를 잘 쓰면 경제현상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즉, 더 훌륭한 수학 모델을 개발하기만 한다면, 남보다 더 시장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이 낳은 열매는 Long Term Capital Management(LTCM)였습니다.

살로몬에서 arbitrage 거래를 하던 사람들이 나와 차린 LTCM은 자신들이 시장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 근거는 바로 어제 쓴 Random Walk Hypothesis 때문이었습니다. Random Walk Hypothesis에 따르면 시장의 움직임은 무작위로 일어나고, 따라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현상의 확률을 계산하는 수학의 모델을 쓴다면 시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죠.

하지만, LTCM의 생각과 다르게, 시장은 무작위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시장에서 "팔자" 주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공황 심리가 퍼지면서 모두가 팔자에 나서기 마련이죠. 즉, 동전을 던질 때는 한쪽 면만 계속 나올 확률이 극히 낮지만, 시장은 모두가 팔자에 나설 확률이 상당히 높은 것이죠. 다른 말로 하자면, 무작위로 벌어지는 현상은 극단적인 경우가 거의 발생하지 않기에 종단곡선의 양쪽 끝은 거의 바닥에 붙은 모습을 보이는 데 비해, 경제현상에선 극단적인 경우가 가끔은 발생하기 때문에 종단곡선의 양쪽 끝이 바닥에서 뜬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를 fat tail이라고 부르죠.

시장이 무작위로 움직인다는 LTCM의 믿음은 현실을 볼 때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주가가 20% 이상 떨어진 1987년의 Black Monday는 시장이 무작위로 움직인다는 가설에 따르면 우주 역사에 한 번 있음 직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주식의 역사에선 이렇게 주가가 급격히 떨어진 예가 종종 나타나죠. LTCM의 두뇌들은 이처럼 분명한 사례를 알면서도 자신들의 가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LTCM의 종말을 불러온 러시아의 부도 사태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더욱 황당했습니다. LTCM은 복잡한 계산 끝에 러시아의 부도를 미국이 수수방관하지 않으리라는 쪽에 큰 돈을 베팅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러시아를 구제할지는 수학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는 정치적 고려의 영역이고, 심리학의 영역이기에 수학적 확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모델을 맹신하고 러시아에 투자했고, 그 결과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시장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추구하는 미국인의 태도와 대조를 이루는 태도를 우리는 조지 소로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로스는 동유럽 출신 유대인이고 영국의 명문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전형적인 유럽의 유대계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죠. 그는 양자역학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펀드 이름을 Quantum(양자) Fund라고 지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핵심적인 불확정성 원리는 그의 투자철학에 기반을 제공해주었죠. 그는 시장이 안정적으로 움직이리라고 예상하지 않고, 시장이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게 움직이리라고 예상합니다. 따라서 시장이 급격한 혼돈에 빠질 때 시장에 들어가 큰돈을 벌고 나오는 방식으로 투자하길 좋아하죠.

어제 합리적인 경제관에 도전하는 세 명(나심 니콜라스 탈렙, 브느와 만델브로, 조지 소로스)를 언급했는데, 생각해보니 세 명 모두 유럽인, 또는 유럽계네요(탈렙은 그리스계 레바논인, 만델브로는 폴란드 출신 프랑스인, 소로스는 헝가리 출신). 그에 비해 LTCM은 앵글로-색슨계가 주류를 이루는 금융회사였습니다. 이처럼 문화적 차이는 경제관의 차이를 낳았고, 경제관의 차이는 각각 다른 주장을 낳았죠. 작년 경제 위기 이전까지는 미국의 합리적인 경제관이 경제계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작년 가을 이후로는 이러한 경제관이 설득력을 많이 잃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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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여러분이 동전을 백번 던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럴 때 앞면이 50번, 뒷면이 50번 나올 확률은 상당히 높습니다. 앞면이 49번 나오거나, 뒷면이 49번 나올 확률도 상당히 높죠. 하지만, 앞면이 30번 나오거나, 뒷면이 30번 나올 확률은 낮습니다. 앞면이 100번 나오거나, 뒷면이 100번 나올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이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앞면과 뒷면이 나오는 횟수가 비슷한 경우는 자주 발생하기에 높이 솟기 마련이고, 앞면만 나오거나 뒷면만 나오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기에 푹 꺼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중간이 튀어나오고 양쪽으로 내려간 그래프를 수학에서는 종단곡선(the bell curve)이라고 부릅니다.

종단곡선은 현실에서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국 고등학생의 신장을 그래프로 그려 본다면, 120cm 이하나, 230cm 이상은 매우 적을테고, 150cm에서 200cm 부분은 솟아 오르겠죠. 대학생들의 아이큐를 조사해봐도, 아이큐가 지나치게 낮은 학생이나 지나치게 높은 학생은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 중간 부분에 분포할 것입니다. 이처럼 양 극단에 적게 분포하고, 중간 부분에 많이 분포한 것을 통계학에서는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라고 부릅니다.


수학으로 경제현상을 예측하려면 경제현상이 정규분포를 보인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수학은 정규분포 처럼 무작위로 발생하는 현상의 확률에 대해선 계산할 수 있지만,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 결과가 바뀌는 현상의 확률에 대해선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수학자는 A와 B가 정상적으로 가위바위보를 했을 때 A가 이길 확률은 쉽게 계산할 수 있지만, A와 B가 대화를 통해 누가 이길지 협상을 한다면 수학만으로 결과를 예측하기는 불가능하죠. 이처럼, 수학으로 예측을 하려면 순수한 우연에 의해 결과가 지배된다는 전제가 필요하고, 우연에 의해 결과가 지배된다면 이는 곧 정규분포를 보인다는 뜻입니다.

"경제현상이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는 가정은 Random walk hypothesis를 통해 시장에 적용되었습니다. Random walk hypothesis에 따르면 시장은 우연히 움직이고, 따라서 아무리 시장을 연구해도, 시장이 어느 쪽으로 흐를지 알 수가 없습니다(이는 전에 보았던 효율적인 시장 가설과 매우 유사하죠). 마치 동전 던지기가 독립된 이벤트고, 따라서 지금까지 동전의 앞면이 많이 나왔더라도 앞으로도 동전의 앞면이 많이 나오리라는 예측을 할 수가 없듯, 경제 현상도 늘 우연에 의해 발생하고, 따라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지난 10여 년간 이러한 가설에 도전하는 새로운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주장으로는 저도 몇 번 소개한 블랙 스완 이론을 들 수 있죠. 나심 니콜라스 탈렙이 블랙 스완(Black Swan)에서 주장한 이 이론은,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충격적인 현상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고, 따라서 실험을 반복할수록 고운 종단곡선이 나타나는 정규분포의 규칙성을 경제현상에서 기대하면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수학에서 fractal의 개념을 개발하였고, 위에 보이는 만델브로 집합으로도 유명한 브느와 만델브로는 The Misbehavior of Markets에서 시장이 우연에 의해 무작위로 움직인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그는 시장 참가자들은 시장의 움직임을 보며 거래를 하기 때문에(예를 들어, 어제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면 더 떨어질 것이 두려워 주식을 매도함) 시장엔 흐름이 존재하고, 따라서 어제의 움직임은 오늘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즉, 어제 벌어진 일이 오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Random Walk Hypothesis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Quantum fund를 설립한 조지 소로스는 시장은 물리 현상과 다르게, 시장 참여자가 시장의 상황에 반응하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따라서 시장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reflexivity 이론을 주장합니다. 이 또한 정규분포에 근거한 수학의 시장 예측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론이죠.

이렇게 전통적인 경제학의 개념에 대항하는 다양한 주장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작년에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예측 못 한 경제 위기가 터졌고, 이로 말미암아 경제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수학은 경제학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겠지만, 수학 모델만 갖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자만은 포기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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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계몽주의자들은 세상에 합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다."는 갈릴레오의 말은 세상의 합리적인 질서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만약에 세상의 질서가 수학적이라면, 수학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자연도 이해할 수 있겠죠. 따라서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인 원리(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법칙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자, 자연의 합리성과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당대인들의 믿음은 종교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죠.

세상이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인간이 이러한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은 수학공식을 써서 자연계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도 성립할 것입니다. 실제로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역사의 한 지점에서 모든 존재의 위치를 알고, 이러한 존재를 움직이는 힘을 안다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의역을 했는데, 영어 번역본을 원하시면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소설 Foundation에 나오는 미래예측학인 psychohistory도 이러한 수학적 결정론의 후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아시모프는 20세기에 살았기에 계몽주의적인 결정론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에 합리적 질서가 존재하고, 이러한 질서를 따라 세상이 움직이기 때문에 미래를 수학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자연이라는 기계속에 사는 또 하나의 기계일 뿐,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죠. 만약 인간이 정말 자유로운 존재라면, "인간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기에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겠죠. 그에 비해 반대 입장에 선 사람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일 뿐이고, 인간은 자연 속의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수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기계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실제로 19세기까지는 인간을 기계로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이후로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자유로운 존재다."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은 끝이 나지 않았죠.

계몽주의에서 정점에 이르는 수학적 질서에 대한 믿음은 뒤늦게 경제학에 들어오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만 해도 수학을 거의 쓰지 않고 경제학의 기초를 놓았는데, 그 이후로 리카르도 등 경제학자들이 수학을 점차 받아들였고, 20세기에 들어서 존 메이나드 케인스는 경제학을 수학과 완벽하게 결합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이후로 수학을 모르면 깊이 있게 경제학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학은 수학과 밀접한 학문이 됩니다.

경제학이 수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경제학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효율적 시장 가설(efficient-market hypothesis)은 이를 위한 근거를 제공해 주었죠. 효율적 시장 가설이란 시장은 공개된 모든 정보가 가격에 반영된다는 이론입니다. 주가를 예로 들자면, A라는 회사의 주식이 주당 만 원이라면, 이는 이 회사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반영된 가격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서 주가가 오르거나 내려갈 수 있긴 하지만, 이는 예측할 수 없는 법이죠. 따라서, 효율적 시장 가설에 따르면 아무리 고민을 하고 주식을 골라도 결국 시장 평균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시장에는 수십 년간 시장 평균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린 사람이 존재합니다. 워렌 버핏이 그러한 예죠. 효율적 시장 가설에 따르면 시장 평균보다 높은 수익을 올리는 유일한 방법은 운(luck)뿐입니다. 즉, 주식을 샀는데 얼마 후 그 주식과 관련한 호재가 발표되면 주가가 오르면서 많은 수익을 올리겠죠. 만약 이러한 행운이 계속 따른다면 시장 평균보다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운만 의지한다면 계속 행운만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워렌 버핏처럼 장기간 시장평균보다 좋은 수익을 올리려면 동전을 수십 번 돌려 앞면만 계속 나올 정도로 운이 좋아야 하는데, 이는 수학적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한 확률입니다. 즉, 워렌 버핏 한 명만 놓고 봐도 효율적 시장 가설은 무너질 수밖에 없죠(그러니 효율적 시장 가설을 믿는 경제학자들이 워렌 버핏을 미워한 것도 당연했죠).

Black Swan을 쓴 나심 니콜라스 탈렙은 보통 동전을 아흔 아홉 번 던져 앞면만 나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고지식한 사람(Dr John)에게 "동전을 다시 던졌을 때 뒷면이 나올 확률"을 물으면 "50%"라고 말하는 데 비해, 현실에 밝은 사람(Fat Tony)은 같은 질문에 대해 "1% 미만"이라고 답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으면 "저 동전이 정말 보통 동전이란 말을 믿으란 말이오?"하고 답한다죠. 생각해 본다면 동전을 아흔 아홉 번 던져서 모두 앞면이 나왔다는 말 자체가 분명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 고지식한 사람은 이를 깨닫지 못했고, 현실에 밝은 사람은 이를 깨달았다는 말이죠. 이처럼 수학만 믿다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고지식한 생각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번 경제 위기는 그렇게 고지식하게만 살아온 사람이 생각을 바꿀 좋은 기회이죠.

[내일은 출장을 가기에 하루 쉬고 모래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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