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애플 II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었고, 매킨토시로 오늘날 컴퓨터 사용환경의 기본인 GUI를 대중화한 회사입니다. 80년대 말 이후로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인텔에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면서 고전하던 애플은 90년대 말 일체형 컴퓨터 iMac을 내놓으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애플은 2000년대에 들어선 Unix를 기반으로 한 Mac OSX가 안착하고 인텔 CPU로 이주에 성공하면서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특히 컴퓨터 시장의 중심이 데스크톱에서 랩톱으로 옮겨오면서 뛰어난 디자인과 편리한 사용환경이라는 강점이 두드러지며 컴퓨터 판매량이 급증합니다. 게다가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등 개인용 제품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iTunes Store를 통해 미디어 유통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둠으로 이제는 컴퓨터라는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 IT, 미디어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애플이라는 회사의 역사를 잘 설명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애플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그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세운 컴퓨터 회사로, 이들은 최초의 대중적인 개인용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애플 II를 내놓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중이 컴퓨터를 좀 더 쉽게 쓸 수 있도록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기 원하던 스티브 잡스의 꿈은 매킨토시의 개발로 이어졌지만,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그에게 부담을 느낀 애플 이사회는 결국 그를 회사에서 몰아냅니다. 잡스가 떠난 애플은 정체성을 잃고 특징 없는 제품을 내놓다가 점차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결국, 회사의 문제를 깨달은 애플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스티브 잡스가 세운 넥스트 컴퓨터를 인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스티브 잡스는 애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iMac을 내놓으며 애플이 부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2000년대 들어선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놓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CEO일 뿐 아니라 대중을 열광케 하는 비저너리이고, 많은 사람은 그가 일 년에 한 두 번씩 진행하는 키노트에서 애플의 새로운 제품이 발표는 모습을 보며 열광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나 두 번째 이야기나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두번째 이야기엔 스티브 잡스라는 인간이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수만 명이 일하는 회사이고, 애플의 소유주라고 할 수 있는 주주의 숫자는 그보다도 많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회사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애플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라는 식의 표현은 매우 모호하기 마련이죠(주주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이사회가 결정을 내렸다? 경영진이 결정을 내렸다? 담당 엔지니어가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야기의 중심을 요구합니다. 애플의 경우엔 스티브 잡스가 그러한 역할을 하죠. 이러한 관점에서 애플의 특징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특징으로 환원됩니다. 매킨토시가 컴퓨터 폰트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잡스가 대학생 시절 calligraphy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고,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은 것은 잡스가 음악이 대중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던 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식이죠. 이러한 해석은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도 적용이 됩니다. 아이폰 4의 안테나 문제도 "스티브 잡스의 독선, 고집,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러한 예입니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관계는, 이해를 위해선 대상에 인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아무리 복잡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중심에 인격체가 있다면 쉽게 이해하는데 비해, 간단해 보이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인격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서 없는 인격을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기계를 자주 다루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기계에 인격을 대입해서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기계가 잘 작동 안 하면 "어,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네"하겠죠).

인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수많은 세포가 결합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세포들은 유기체의 생명을 연장하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죠. 그런데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세포 중에 어떤 세포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활동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몸속에 침투한 병균과 싸우는 백혈구가 그러한 예인데, 백혈구가 병균과 싸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때 세포의 단위로 이해하지 않고 꼭 인격의 단위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세포를 묶는 "인격"(person)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은 인격을 영혼(soul)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몸에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백혈구가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움직이는 것 같아도, 영혼이 통제하는 몸속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 백혈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영혼은 "내가 나 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세포는 늘 파괴되고 새로운 세포로 대치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영혼을 소유하기에 "나"일 수가 있죠. 이처럼 영혼은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줄 뿐 아니라, 나와 남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에 나오는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라는 질문도, 영혼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죠.

물론 근대 이후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늘었고, 결국 오늘날 대부분 철학자와 과학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문제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죠. 나를 "내 몸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의 집합"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나를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가 다른 사람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영혼을 제거하고 설명을 하려면 간단한 관계조차 설명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또한, 인간의 몸이 몇 년을 주기로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오늘의 나와 몇년 전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물론 인간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인 유전자"), 그렇다면 이기적인 유전자와 다르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은 유전자는 설명해도 유전자가 구성하는 "인간"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인 대니얼 데넷(Daniel Dennett)은 이처럼 물질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아(self)를 "이야기의 무게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가 쓴 이야기의 중심인 자아(The Self as a Center of Narrative Gravity)에서 그는 인격이 없지만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만들어내듯,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두뇌에서 이야기(narrative)를 만들어내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고 주장합니다. 즉,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라는 말이죠. 조금 황당한 주장이지만, "영혼"이라는 가정이 없이도 "자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아"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지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내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내 영혼이 필요하다."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인간은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영혼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대니얼 데넷이 말한 바로는 인간이란 자신에게 "나는 물질을 넘어서는 존재다"라는 환상을 늘 심어주며 사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로봇과 마찬가지로 기계일 따름이지만, 영혼을 지닌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A.I. 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은 바로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로봇이 어떻게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처럼 단순한 두뇌에서 어떻게 자신을 속일 정도의 복잡한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이는 Douglas R. Hofstadter가 Gödel, Escher, Bach에서 제시한 모델(무의미한 기호가 의미를 낳는 과정)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혼도, 자아의 실체도 부인하는 이 철학자가 이야기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자아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핵심이라는 말이죠. 그러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으로 이야기를 쓰며 삽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생으로 쓴 이야기가 내가 인생의 이야기를 쓰는데 영감을 불어넣게 때문이겠죠.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기 원하는 것도, 이야기를 접해야 자신의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기 때문이죠. 부모가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을 깨닫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숫자와 논리로 가득한 교과서만 읽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를 충분히 접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라면 할 수 있는 능력은 풍부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기가 쉽겠죠.

 지금 서점에 가면 "이야기를 활용해 프리젠테이션하는 법" "이야기를 통해 마케팅하는 법" 등의 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이 가르치는 내용은 대부분 "이야기를 이용해 남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야기 위에 군림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야기가 인생의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의 남용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인생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이성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쓰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로부터 인생의 진리를 배워왔습니다. 전통적인 기준과 가치가 무너져 인생의 방향을 찾기 어려워진 오늘날 사람들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야기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야기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이야기를 통해 남을 조종(manipulation)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줄 이야기를 찾아, 그 이야기에 맞춰 내 인생의 이야기를 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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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lourious Basterds 마지막 장면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미국인 장교는 독일군 장교의 이마에 나치 상징을 칼로 새겨 놓고 "이것이 내 걸작일지도 모르겠군"("I think this just might be my masterpiece.")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영화가 끝나며 Written and Directed by Quentin Tarantino"라는 자막이 나오죠. 곰곰이 의미를 따져 본다면 이 장면은 이 영화를 자신의 걸작으로 생각하는 타란티노 감독의 자부심을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15년간 세계 평론가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최신작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를 그가 만든 최고의 걸작으로 뽑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인물 묘사와 살아 있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타란티노 특유의 재치는 여전하고, 각 챕터를 다른 영화 형식으로 만드는 등(예를 들어, 1장은 서부극, 2장은 잔혹극, 3장은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 표현은 지극하지만, 2차대전을 무대로 한 전쟁 영화치곤 액션이 부족했고, 필요 없이 잔혹한 장면이 너무 많으며, 독일의 모든 지도자가 모인 영화 시사회장에 등장하는 경비병이 단 두 명인 데서 알 수 있듯 줄거리의 현실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든 것일까요?

타란티노 감독의 의중을 이해하려면, 이 영화의 주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전쟁이 아닙니다. 전쟁을 주제로 본다면 이 영화는 과장된 묘사로 가득한 이류 영화일 뿐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남녀 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이는 프랑스 여인과 독일인 병사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대신, 서로에게 총을 쏘며 끝나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해서 이미지와 현실, 그리고 영화의 3각 관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영화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적진에 침투한 병사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거짓 신분을 취득합니다. 연합군에 협력하는 여배우나 나치에게 쫓기는 프랑스 유대인도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신분을 숨기 위해 등장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와 관습, 태도를 흉내 내고, 때로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는 옷을 입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신은 현실의 왜곡이기에 부정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만약 나치가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과거를 숨겨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그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만 초점을 맞추겠죠. 그가 이웃에게 친절하고 늘 웃는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한다면 "이 사람이 과거에 나치였을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겠죠. 이처럼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함으로 거짓을 낳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가 이미지를 보여줌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왜곡하기 마련입니다. Inglourious Basterds 에 나오는 영화 속의 영화 "국가의 자랑"(Stolz der Nation)을 보면, 홀로 적들과 싸우는 병사가 바닥에 나치 상징을 새겨 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목숨이 걸린 위태한 전투를 벌이면서 바닥에 문양을 새길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만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은 꼭 필요하고, 관객들을 이를 보며 환호합니다. 영화를 통해 한 명의 평범한 병사는 전쟁영웅으로 거듭나고,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투쟁은 국가를 구하기 위한 영웅적 행동으로 격상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제로 수백 명과 맞서 싸운 독일 병사는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영사실에서 나옵니다. 영화 속에선 영웅으로 그려졌지만, 현실 속의 자신은 사람들을 죽인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죠.

이처럼 영화는 이미지를 제공함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으로 쓰이기에 현실의 노예, 현실을 지배하는 세력의 노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이러한 노예생활에 싫증을 내고, 현실에 저항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타란티노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그는 현실에 종속된 영화를 해방해, 현실을 지배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그의 욕망은 영화 필름에 불을 붙임으로 독일 제3제국을 무너뜨리는 영화관 장면에서 잘 표현됩니다. 이 기이한 시퀜스에서 나치의 핍박을 피해 숨어 살던 쇼샤나 드레퓌스는 독일인들이 즐기던 애국 영화를 끊고 화면에 등장해 복수를 선언하고, 핍박받는 또 다른 인종인 흑인의 도움으로 필름 더미에 불을 붙임으로 영화관에 있던 나치 지도부의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현실에 종속되던 영화(=필름)이 현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격상하는 순간입니다. 현실에 대한 영화의 저항 선언으로 이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영화의 독립을 선언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 영화가 역사를 바꿔 썼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1945년 베를린에서 죽는 히틀러는 이 영화 속에서 그보다 훨씬 전 파리에서 죽습니다. 대부분 관객은 이를 보며 "에이, 말도 안된다."라고 했겠죠. 하지만, 영화가 진정으로 현실에서 독립했다면 현실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영화의 필요를 따라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창조할 수도 있죠.

여기까지만 본다면 타란티노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명백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에서 나치 장교 한스 란다는 연합군과 거래를 통해 독일 제3제국의 붕괴를 돕는 대신 유대인 사냥꾼이라는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고 세계를 구한 전쟁 영웅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왜곡을 위해서 그는 독일 군복을 벗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의 평상복을 입을 생각이죠. 하지만, 영화에서 한스 란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알도 레인(브래드 피트 분)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한 현실 왜곡을 참지 못하고 란다의 이마에 나치 문양을 칼로 세깁니다. 이제 란다는 나치일 뿐 아니라, 나치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죠. 이처럼 현실과 이미지를 통일하는 작업의 주체는 당대 가장 유명한 배우라고 할 수 있는 브래드 피트입니다. 사생활을 보나 영화 속의 이미지를 보나 가장 영화배우 다운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는 곧 영화라는 매체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죠. 즉, 이 장면에서 영화는 현실과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앞 장면에서 등장한 "현실을 지배하는 영화"와는 다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영화"라는 개념의 표현이죠.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두 개의 다른 영화관을 이 영화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이 두 개념은 영화사를 지배한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한 영화에서 두 전통을 하나로 묶는 대담한 시도를 한 셈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꼭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앞으로 이 영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분명히 이와 유사한 해석이 나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영화는 타란티노를 진정한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는, 말 그대로 걸작으로 인정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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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독서의 3단계

문화 2010/04/14 18:29
제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얻는 가장 큰 유익은 독서량의 증가입니다. 블로그가 없다면 한동안 책읽기를 등한시해도 별문제가 없지만,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책을 안 읽는다면 글 쓸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연재물 같은 긴 글을 쓰려면 여러 권의 책을 읽거나 참고해야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글을 쓸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글을 쓰다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잦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이 주제에 대해 잘 정리해 놓은 책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기 마련이고, 이럴 때는 옛날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다닐 때 얼핏 들었던 책의 제목이 큰 도움이 됩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정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토머스 홉스의 레비아탄 등은 제목과 요점만 기억나지만, 이러한 정보만 가지고도 글을 쓸 때 큰 도움을 얻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 공부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시험 준비 과정으로 변질하였만, 원래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정보를 얻을 기회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렇게 얼핏 들은 책 제목과 내용만으론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글을 쓰려면 직접 책을 읽게 됩니다. 물론 글 한 편 쓰려고 수백 페이지가 되는 책을 읽기는 어렵고, 중요한 부분만 뽑아서 읽거나 요약된 글을 읽게 됩니다. 이는 대학교 때 보고서를 쓸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보고서를 쓰려면 좋은 책을 많이 언급해야 하는데, 모든 책을 읽을 수가 없으니 관련된 부분만 읽던지, 아니면 요약본을 읽게 됩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읽거나 요약본을 읽고 전체를 읽은 듯 보고서를 쓴다면 매우 부정직한 행위겠지만, 책을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국부론을 다 읽지 않아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분업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고 주장했다."라는 말을 쓸 수는 있겠죠).

글을 다 쓰고 여유가 생기면 글을 쓸 때 참고했던 책을 다시 읽게 됩니다.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내용을 음미하면서 읽는 것이죠. 물론 글을 쓸 때 언급한 책을 모두 읽는 것은 아니지만(그랬다간 일 년에 수백 권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 비중 있게 소개한 책은 꼭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 책의 내용이 완전히 파악되고 깊이 있는 지식이 늘기 때문이죠. 요약본만 많이 읽은 사람과 원전을 찬찬히 읽은 사람의 차이는 크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독서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첫 단계는 "이런 책이 있다."는 아주 간략한 정보의 습득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무시하기 쉽지만, 실제로 공부를 하는 사람에겐 어떤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큰 자산입니다. 이러한 정보가 없는 사람은 좋은 책을 놔두고 엉뚱한 책만 읽다가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이죠. 전에 어떤 사람이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다가 나중에 학자가 되어서 큰 업적을 남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1단계 독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책의 대략적인 내용이나 부분적인 내용을 읽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는 단계입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만난 어느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백과사전의 중요한 항목을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며 "이것만 읽어도 공부가 많이 된다."고 강조하셨는데, 백과사전 읽기는 원전 읽기 만큼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대학생이 빠르게 좋은 정보를 얻는 중요한 방법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이러한 단계에만 머문다면 전체적인 이해가 부족하기에 연결되지 않은 단편적 지식만 많은 "찢어진 백과사전"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마지막으론 풍부한 지식을 담은 좋은 책을 정독하는 단계입니다. 이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이러한 독서의 3단계를 인정하지 않고 "정독"만을 독서로 받아들이는데, 이는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습니다. 인터넷에서 글을 읽다 보면 책에 관한 언급을 많이 접하기 마련이고, 인터넷 서핑을 많이 하는 사람은 어떤 책이 영향력이 있는지 잘 알기 마련입니다. 이는 벌써 독서의 1단계에 이른 것이죠. 또 어떤 사람은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요약된 형태의 정보를 많이 얻습니다. 이는 독서의 2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분야에 대해 정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책을 주문하거나, 고전이라면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등에서 무료로 내려받아서 봅니다. 이는 독서의 3단계인 것이죠. 이제는 갈수록 독서의 3단계가 적어지고, 독서의 1단계와 2단계가 늘어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과거보다 정보를 적게 획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정보의 특성이 변했을 뿐이죠.

이렇게 본다면 교육가들이 인터넷을 독서의 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터넷을 독서와 연결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면 독서의 정의도 바뀌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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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암스테르담을 갔다가 시간이 나서 반 고흐 박물관에 갔습니다. 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몇 년 만에 다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니 감동이 더 크더군요. 19세기로부터 20세기까지 서양 미술의 전환기에 수많은 천재 예술가가 등장했지만 반 고흐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드뭅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진실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만화 주인공 스누피가 그러했듯 반 고흐의 작품을 방에 걸어 놓고 위안을 받는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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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위대성은 그가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얼굴 없는 서민이 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고대 시대엔 왕족과 귀족이 사회를 지배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론 중산층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늘 남에 의해 착취를 당하기에 무식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던 서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부를 창조하는 것은 노동이고, 따라서 경제의 주체는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은 이러한 변화한 분위기의 반영이었죠. 하지만, 예술계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고귀한 귀족들과 그들의 일상을 주제로 한 작품만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흐는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땀 흘려 일하며 자기 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큰 애착을 느꼈고, 가난한 자들을 모델로 한 작품을 많이 그립니다. 그가 농민의 삶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남긴 밀레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도 이처럼 추구하는 방향이 비슷했기 때문이죠. 그의 예술에서 가난한 자들은 인간의 순수성을 보존한 고결한 존재로 새롭게 해석되었고, 그들이 곡식을 가꾸는 밭, 그들이 신는 신발, 그들이 앉는 의자조차 새로운 영적인 의미를 얻었습니다. 주류 예술가들이 이러한 그의 작품을 조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민주주의가 전파되며 대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은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죠.

반 고흐는 다양한 문화의 충돌 속에서 예술적 에너지를 얻었다는 점에서도 현대 사회의 선구자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반 고흐 이전에도 유럽 내에서 다양한 문화의 혼합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감수성에 이탈리아의 멜로디를 혼합한 모차르트가 대표적인 예죠. 하지만, 반 고흐는 아시아, 특히 일본이라는 전혀 다른 예술 전통과 만나면서 전통적인 서양 미술의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서구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인쇄 기술의 발달로 대중이 다른 대륙의 예술을 쉽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정제된 예술에만 익숙한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과격한 색상, 자연을 보는 새로운 시각 등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예술가들이 자연의 요소들을 마음대로 조종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비해, 일본의 화가들은 인간이 만든 틀을 거부하는 자연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별 의미 없는 나뭇가지가 화면을 지배하는 일본의 판화를 반 고흐가 모사한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일본의 새로운 미학에 영향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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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다양한 문화의 혼합은 20세기 말에 들어 세계적인 조류로 자리 잡습니다. 특히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에 사는 미국인들은 점심은 피자(이탈리아음식)을 먹고, 저녁은 스시(일본 음식)을 먹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흑인들이 지배하는 미식축구 중계를 보다가 라티노 음악을 들으며 잠드는 식으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이는 정도는 다를지언정 많은 나라 사람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바입니다. 반 고흐는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를 혼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전통만 고수한 예술가들보다 훨씬 현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반 고흐는 미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그의 실력을 무시한 교수들에 의해 입학이 거절당하고 혼자서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카데미즘에 물든 예술가들의 매너리즘을 피할 수 있었고, 오랜 연구 끝에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합니다. 이러한 그의 개성은 자아를 찾기 원하는 현대인에게 큰 영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현대인들은 숨이 막힐 듯 개인을 억누르는 조직 속에 살면서 나만의 색깔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물론 나만의 색깔을 발견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많은 사람은 남들을 따라 삶으로 안정감을 누리기 원하죠. 그렇기에 반 고흐처럼 치열하게 인생을 살며 남과 다른 나의 모습을 완성한 사람은 현대인이 보기에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반 고흐는 기독교 사역에서부터 예술까지 평생 하는 일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예술계의 멸시를 받으며 외로이 살다가 결국 정신병 때문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의 삶은 비극적인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람이 불행을 경험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증가하는 우울증은 이러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성공한 인생을 산 위대한 영웅보다는, 비극적인 인생을 산 예술가를 훨씬 더 좋아합니다. 흑백영화 시대의 코미디언 중 20년대의 신분 상승 정신을 표현한 해럴드 로이드가 거의 잊히고, 30년대 대공황 시대를 대표한 찰리 채플린이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원인도 이러한 대중의 심리 때문일 것입니다. 예술에선 천재로 태어나 천재로 대우를 받으며 즐거운 인생을 산 피카소 보다, 천재적인 재능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괴로운 인생을 산 반 고흐가 현대인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반 고흐는 삶과 예술로 현대 사회의 특징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 예술가입니다. 비록 살아생전엔 무시를 당한 그이지만, 죽은 후에라도 재발견되어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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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의 역사

문화 2010/01/26 06:22
아바타의 역사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천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심지어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한 괴물의 벽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전망까지 나오더군요. 이로써 카메론 감독은 타이타닉과 아바타로 역대 흥행 영화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화제를 모으는 현상이 있으면 이와 연관된 정책을 만들기 좋아하는 관료들은 이번엔 한국에서도 아바타 같은 영화를 만들도록 지원하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아바타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세계 모든 나라 정부가 영화 산업에 돈을 쏟겠지요. 아바타는 미국 정부가 지원했다고 탄생한 것이 아니듯, 한국 정부가 디지털 영상 산업을 지원한다고 꼭 제2의 아바타가 한국에서 탄생하리란 보장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아바타의 성공을 본받으려면 할리우드가 아바타를 만든 원동력을 이해하려면 할리우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할리우드는 50년대까지 할리우드를 지배하던 "가족중심의 영화"라는 개념에 반발하면서 탄생하였습니다. 지극히 보수적이고 순진한 미국인들은 영화도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기 원했고, 따라서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오락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를 이루죠(대표적인 예가 사운드 오브 뮤직). 그런데 60년대로 넘어오면서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고민, 불안 등을 반영한 영화가 없다는 점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이러한 스트레스는 단지 온 가족이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봐서는 풀리지가 않기 때문이죠. 이처럼 어른을 위한 영화를 원하는 관객과 전통적인 가족 영화를 만드는 할리우드 사이에 틈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틈새를 비집고 로버트 알트만(올트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피터 복다노비치, 윌리엄 프리드리킨 등의 새로운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들어옵니다. 유럽 영화와 60년대 감수성의 세례를 받고 새로운 미학을 익힌 이들은 엑소시스트, 대부, 라스트 픽쳐 쇼, MASH 등을 내놓으며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둡니다. 이들의 등장으로 감독을 소모품 취급하던 스튜디오들은 영향력을 급격히 상실하고, 미국도 유럽처럼 감독 중심의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작가주의 영화의 황금기인 70년대가 탄생하게 되죠.

하지만, 이렇게 감독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감독은 사업가라기보다는 예술가이고, 따라서 예술만 고려한 작품을 만들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감독이 스튜디오의 간섭 없이 마음껏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었다가 흥행에 실패하게 되면 뒷감당이 안되기 마련이죠(스튜디오 중심의 작품이라면 스타 배우 기용 등 최소한의 흥행 안전장치를 두기 마련이고, 또한 제작비를 어느 선에서 제한하기 때문에 사업적인 면에서 감독이 혼자 만든 영화보다 안정성이 높죠). 또한, 거대한 권력을 누리게 된 감독들은 권력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마약에 중독되거나 정신이상이 나타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70년대 말에 이르면 과거에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감독들의 작품이 흥행에 줄줄이 실패하고, 70년대식 감독 중심의 제작방식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조스를 만들고, 조지 루커스가 스타워즈를 만들면서 할리우드는 또 다른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제는 10대가 열광할만한 주제에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할 볼거리를 많이 집어 넣은 블록버스터가 할리우드의 주류로 자리 잡는 것이죠. 이와 함께 지극히 개인적이고 성인을 위한 영화를 만들던 70년대의 거장들은 대부분 사라지게 됩니다(그 중 알트만과 코폴라는 90년대에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오죠. 스콜세즈는 8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을 하지만, 그가 과거의 명성을 회복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였죠). 이제 스튜디오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저렴한 가격에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젊은 감독을 대거 기용하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제임스 카메론입니다. 캐나다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카메론은 스타워즈 등 할리우드 영화를 동경하다 결국 영화계에 입문하고,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주연으로 내세운 터미네이터로 흥행감독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는 70년대 말부터 할리우드를 지배한 블록버스터 정신의 가장 뛰어난 계승자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관객을 매료할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잘 알죠. 그가 아바타를 디지털 3D로 만든 것도 "대중을 즐겁게 할 최고의 눈요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흥행성공에서 보이듯, 그의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죠.
 
결국, 아바타는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가족 오락 영화->이에 대한 반발인 작가주의 영화->이에 대한 반발인 블록버스터로 이어지는 할리우드의 흐름 속에서 탄생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지 않고, "영화 산업이 돈 된다더라." 하는 소리만 듣고 영화에 투자한다면 돈도 못 벌고 영화도 망칠 뿐입니다(실제로, 한국 영화계의 한가지 특징은 "블록버스터"를 내세운 영화가 거의 늘 흥행에 실패한다는 점이죠). 진정으로 한국 영화가 발전하려면 아바타를 흉내 내지 말고, 한국 영화 고유의 흐름을 이해하고, 이러한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지를 먼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도서- Easy Riders, Raging Bulls: How the Sex-Drugs-and-Rock 'N' Roll Generation Saved Hollywood by Peter Bis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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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온 씨름은 1983년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생기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씨름은 힘만이 아닌 기술이 중요하고, 기술이 좋다면 자신보다 덩치가 큰 선수를 넘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죠. 실제로 큰 인기를 끈 이만기 선수는 초기에 한라급 체중이었지만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백두급 선수들을 꺾고 천하장사에 여러 번 올랐죠. 이러한 씨름의 특성 때문에 씨름을 보다가 스모를 보면 억지로 몸무게를 늘린 선수들이 힘으로 상대를 밀어내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현실을 살펴보면 한때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한국의 씨름은 완전히 쇠퇴하였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스모는 여전히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 왜 씨름은 높은 인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몰락하게 되었을까요?

씨름이 인기를 상실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씨름이 현대적 스포츠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원래 씨름은 단오, 추석 등 특별한 명절 때 동네 사람들이 모여 즐기던 놀이였습니다. 따라서 씨름은 명절의 한 부분이었고, 명절이면 빠지지 않고 즐기는 행사였기에 사랑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천하장사대회도 처음엔 설날 등 명절에 열렸습니다. 그런데 씨름이 인기가 높아가면서 씨름은 "명절의 한 부분"이 아닌, "힘과 기술로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로 변신합니다. 이렇게 씨름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씨름은 명절로부터 독립하였고, 다른 스포츠, 즉 역도나 권투처럼 효율적으로 승리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올림픽이 아니면 역도 중계를 TV로 보는 사람이 적고, 권투도 인기를 잃은 지 오래되었는데, 씨름만 인기를 끌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요즘 시청자는 극도로 사실적인 일본의 이종 격투기, 또는 잘 짜진 연극인 미국의 프로 레슬링을 원하지, 어정쩡하게 둘이 규칙에 맞춰 경기를 치르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스포츠로 변신한 씨름이 인기를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이죠.

스모는 전통 의식을 그대로 보존함으로 21세기까지 인기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씨름과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보기에 우스워 보이는 스모의 여러 가지 요소(기저귀 같이 보이는 마와시, 상투 튼 머리 모양, 경기 전 천천히 다리를 드는 모습)는 관중에게 '당신은 시간을 초월한 의식(儀式, ritual)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도구입니다. 즉, 스모는 스포츠로서는 별 의미가 없지만, 일본인에게 역사를 뛰어넘는 일본의 문화에 참여하도록 해주는 통로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띄죠. 그렇기에 스모엔 여러 가지 불합리한 요소가 있음에도(예를 들어, 스모선수의 등급은 객관적 성적에 따라 자동으로 결정되지 않고, 스모 협회의 판단에 따라 결정 됩니다), 여전히 인기를 유지할 수 있죠.

인간은 의식을 통해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자신의 주권을 확립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 시간대는 잠에서 깨서 출근할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바쁘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깨자마자 하는 일련의 행위(기지개를 켜고, 세수를 하고, 신문을 먹으면서 아침을 먹고, 시계를 힐끔 보고 지하철 시간에 맞춰 집에서 나가는 등)를 통해 아침 시간대를 다스립니다. 이러한 의식을 확립하고 나면 매일 "오늘은 어떻게 출근 준비를 해야 하지?"라는 고민을 피할 수 있죠.

의식은 쉬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에 박자를 표시하는 역할도 합니다. 과거에 인간이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던 시절엔 계절을 따른 의식을 지냄으로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유럽인들은 봄의 기운이 가득한 5월 초가 되면 메이데이를 즐겼고, 한국인은 더위가 극에 달하는 복날이 되면 보양식을 먹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인이 설을 쇠거나 미국인이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과거에 계절에 따른 의식이 현대에도 살아남은 예라고 할 수 있죠.

의식은 평범한 행위에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도 합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이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 고수레(고시래)라고 하며 음식을 땅에 던지는 풍습도 음식을 먹는 행위를 영적인 행위로 바꾸는 의식이었습니다. 마법의 술이라고 알려진 압생트를 설탕 위에 부어서 압생트의 색이 바뀌는 모습을 보고 마시는 사람은 "이 술은 정말 신비한 술이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마련이죠.

이처럼 의식은 어떤 행위의 특정한 의미를 강조하거나, 없는 의미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에 의식을 결합하면 중요한 행위로 바뀔 수 있습니다. 테킬라의 본고장인 멕시코 사람들은 테킬라를 그냥 마십니다. 그런데 멕시코 밖에서는 테킬라를 마시기 전 손등에 묻은 소금을 핥고, 테킬라를 마신 후에는 라임을 빠는 방식으로 마시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작은 의식은 이미 수백 가지 술이 존재하는 세계 주류 시장에 뒤늦게 진출한 테킬라가 자리를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이 없이 마시는 테킬라는 그냥 술일 뿐이지만, 소금을 핥고 라임을 빠는 행위를 추가함으로 테킬라는 의식의 한 부분이 되기 때문이죠.

마틴 린드스트롬이 쓴 Buyology에 따르면 기업들은 의식이 인간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자사의 제품을 의식과 연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팟 터치나 아이폰을 잠글 때 나는 "철커덕" 소리는 다른 제품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소리입니다. 이러한 소리를 들으며 제품을 쓰던 사람이 다른 제품을 쓰면 무언가 허전하게 느끼겠죠. 그러고 보면 맥의 시동음이나 윈도우의 시동음도 사용자를 자사 제품에 묶어 두기 위한 작은 장치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이 리듬을 잃을수록 사람들은 의식을 통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정말 이러한 의식이 내게 의미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의식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만, 올바르지 못한 의식은 인생을 낭비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죠.

P.S. 저는 지난주부터 엇그제까지 이탈리아에 강의차 다녀왔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글을 쓸 수 있을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일정을 소화하는데 벅차 글을 못올렸습니다. 사실 정해진 날자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도 하나의 의식이라 그냥 건너뛰고 나니 매우 찜찜하더군요. 어쨌든 약속을 못지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음주엔 베를린과 프라하를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다녀오는데, 돌아와서 주말엔 글을 올리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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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미국인은 선과 악을 뚜렷이 구분하고, 선이 무력으로 악을 응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미국인의 세계관은 잔인한 인디언에 맞서 싸우는 서부 개척자들, 악랄한 나치를 무찌르는 미국군 등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잘 드러나죠. 하지만, 베트남전을 겪으면서 미국인들은 선과 악의 분명한 구분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이러한 고민은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낳았는데, "무고한 백인 개척자를 공격하는 인디언"이 사실은 "자신의 땅에 침범한 적을 내쫒기 위해 사투를 벌인 피해자"라는 새로운 역사적 인식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미국인들이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해 생각을 바꾸면서, 미국인들이 만드는 영화도 새로운 세계관을 반영하게 됩니다. 따라서 요즘 나오는 미국 영화에서는 과거 리셀 웨폰의 멜 깁슨이나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화끈하게 악당을 무찌르는 정의의 주인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21세기를 대표하는 슈퍼영웅 배트맨은 검은색 복장을 입고 밤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등 어두운 면을 특징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밝은 이미지만 강조하는 전통적인 슈퍼영웅(대표적인 예가 슈퍼맨)과 차별된 점을 보입니다. 아이언맨은 "악의 세력과 대항해 싸우는" 미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자신의 사업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가를 깨닫고 업종전환을 꿈꿉니다. 헐크는 주인공의 억눌려진 원초적 욕망의 표현이기에, 헐크의 행동은 늘 선과 악의 혼합일 수밖에 없습니다. 벤 애플릭의 감독 데뷔작 Gone Baby Gone은 아동납치라는 주제를 통해 "정의의 집행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한다면, 정의의 구현이 꼭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클로버필드와 우주 전쟁(The War of Worlds)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다루었는데, 주인공들이 적과 싸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를 보호하는데 그칩니다. 어차피 거대한 악은 내가 나서봤자 해결이 되지 않으니 내 주변사람이나 보호하자는 태도죠. 이러한 영화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하는 과거의 영웅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할리우드 주류영화가 전통적인 미국인의 변화한 가치관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비해, 프랑스 출신의 뤽 베송은 여전히 선악의 구분이 분명한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트랜스포터 시리즈는 주인공이 멋있는 자동차를 몰며 악당을 때려눕히는 뻔한 줄거리로 나름대로 많은 팬을 확보하였습니다. 그가 각본과 프로듀싱으로 참여한 테이큰(Taken)은 단순한 선악 구도를 바탕으로 악을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리암 니슨은 딸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절대 선이고, 그의 딸을 납치한 범죄자들은 절대 악입니다. 리암 니슨은 단지 딸을 찾을 뿐 아니라 악을 응징하는데, 이는 만나는 모든 악당을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딸을 인질로 잡은 아랍인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총으로 죽인 것은, "말이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말을 하고, 협상을 하다 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악당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지금 죽여버리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가 너무도 분명하기에 범죄자에 대한 잔혹 행위까지 정당하게 보입니다.

이 영화가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반영한 또 다른 예는 악당이 모두 외국인이라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딸을 납치한 이들은 알바니아인이고, 부패한 경찰은 프랑스인, 그리고 납치된 처녀를 사들이는 사람은 아랍인입니다. 사실 나와 외모가 비슷하고,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사는 사람을 절대적인 악당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낯선 외모에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은 악당으로 상상하기가 훨씬 쉽죠. 문제는 이렇게 외국인을 악당으로 묘사한다면,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성이 걷잡을 수 없이 표출되면서 매우 끔찍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즘 미국 영화는 외국인조차 함부로 "절대 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중동문제를 다룬 The Kingdom이 그러한 예인데, 이 영화는 모슬렘 테러리스트 세력을 소탕하는 줄거리를 담았으면서도, "결국 그들이나 우리나 복수를 원한다는 점에서 같지 않나?"라는 질문을 던짐으로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죠. 그에 비해 테이큰의 주인공은 "이 나쁜 외국 놈들을 깡그리 죽여버림으로 복수하겠다"는 식으로 단순 과격한 태도를 보임으로 관객 속에 잠자던 공격성을 일깨웁니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Chris Tookey에 따르면 이 영화는 평론가들로부터 10점 만점에 3.25점을 얻었는데, IMDB.com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7.9점입니다. 즉, 평론가들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관객(특히 젊은 남성관객)에게는 확실한 호응을 이끌어낸 것이죠. 이처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덕분에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2억 2천만 달러나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고 앞으로도 이러한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미국인들은 전통적인 세계관의 문제점을 직접 목격하며 자발적으로 전통적인 선악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관점을 버렸기에, 이러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과거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장기적인 인기를 끌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테이큰이 생뚱맞게 20세기 미국인의 세계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프랑스인들(프로듀서 뤽 베송과 감독 피에르 모렐이)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은 역사적인 원인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길 꺼리지만, 프랑스인은 그러한 금기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를 만들 수 있죠. 단순한 대결 구도를 바탕으로 한 폭력성을 코믹한 수준까지 밀어붙인 Hot Fuzz가 영국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즉, 20세기 중반까진 유럽 영화가 미국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이제는 미국 영화가 유럽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입니다.

미국 영화가 보이는 선악에 대한 고민의 모습은 단순한 미국문화가 좀 더 복잡해지는 중이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대외관계에서 많은 실패를 맛본 미국이 이제 좀 더 성숙하고 현실에 걸맞은 생각을 하는 국가로 변화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P.S. 내일 밀라노로 출발해 열흘 후에 돌아옵니다. 가서도 가능하다면 블로그에 글을 하나쯤 올리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일정이 워낙 바빠 글이 자주 못나옴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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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코스트너는 80년대부터 90년대 사이에 수많은 히트 영화의 주연을 맡은 인기 배우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였을 뿐 아니라 늑대와 춤을(Dancing with the Wolves)이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맡을 만큼 재능 있는 영화인이었죠.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 그의 인기는 하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은 왕년의 스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톰 크루즈가 아직도 세계적인 스타로 군림한다는 사실과 비교한다면 그의 인기하락은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인기를 끌었던 원인은 그가 헨리 폰다나 그레고리 펙처럼 미국인의 긍정적인 모습을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은 언터처블(The Untouchables),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보디가드(The Bodyguard) 등에서 양심적이고, 예의 바르고, 정의를 추구하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무력을 쓰는 케빈 코스트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인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에게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1993년에 나온 퍼펙트 월드(Perfect World)를 기점으로 그는 훨씬 어둡고 복잡한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합니다. 클린턴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이 영화에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범죄자로 나옵니다. 물론 그가 유괴한 아이와 애정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전형적인 악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블록버스터 주연을 맡던 배우의 배역치고는 지나치게 어둡고 폭력적이었죠. 1995년에 나온 워터월드(Waterworld)는 코스트너의 변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입니다. 육지가 거의 사라진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매우 차갑고 계산적인 인물을 연기합니다. 그는 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죽일 생각을 하고, 아이를 보호하는 여자를 학대합니다. 물론 나중엔 여자와 아이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이러한 변화는 너무 늦게 나오기에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가 극 중간까지 보인 차가운 인물의 이미지를 떨쳐내기 힘들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의 선한 이미지를 버리고 차갑고 어두운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흥행배우로서 그의 가치는 크게 손상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한 모습은 약자를 보호하고 악당을 징벌하는 정의의 심판자인데, 그는 지나치게 어둡고(Mr. Brooks에서 그는 살인충동에 시달리는 역할로 나옵니다), 약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Open Range에서 그는 총에 맞아 쓰러진 적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다가 주변 사람의 만류로 포기합니다. 도덕심이 보통사람만도 못한 것이죠), 때로는 완전히 악의 편에 서기도 하니(3000 Miles to Graceland에서 그는 악당을 등치는 악당으로 나옵니다) 대중이 그가 나오는 작품을 외면한 것은 당연했죠.

지난 10년간 그가 나온 영화 중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는 Thirteen Days를 들 수 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의 역할을 하는데, 정치적 판단력이 매우 뛰어나면서도 가정을 걱정하는 마음이 끔찍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가 이 영화의 흥행성공을 결정지었다고 말하기는 무리지만, 어쨌든 그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선한 주인공의 이미지를 다시 보인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케빈 코스트너의 문제는 그가 어두운 역할을 주로 맡는다는 점이 아니라, 그가 어두운 역할을 맡을 때 무언가 어색하다는 점입니다. 톰 크루즈는 매그놀리아나 Tropic Thunder 등에서 전혀 블록버스터 주인공 같지 않은 어둡고 기괴한 역할을 맡아도 나름대로 잘 어울립니다. 이는 아마도 톰 크루즈라는 사람 자체가 기괴하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 케빈 코스트너는 어떤 역할을 맡아도 무언가 착한 면이 숨어 있는 듯이 보이고, 따라서 그가 영화 초반에 조금 삐딱하게 나와도 "저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착한 사람으로 돌아올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죠. 이러한 기대가 이루어지려면 처음에 보이는 불량한 모습이 어느 수준을 넘지 말아야 하는데, 퍼팩트 월드에서 다른 탈옥수를 죽이는 장면이나 Open Range에서 어린 동료를 발로 차 물에 빠뜨리는 장면은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기에 매우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장면이 나오고, 나중에도 주인공의 삶이 대단히 변하지 않는다면 관객은 실망하고 속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1997년 에어포스 원의 주연을 맡을 예정이었는데,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 포스트맨을 만들기 위해 이 역할을 포기합니다. 결국, 이 영화의 주연은 해리슨 포드가 맡았고, 이 영화는 대 히트를 기록했죠. 그가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을 포기하고, 암울한 인류 종말상황을 그린 영화를 만든 것은, 과거와 같은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의 반영으로 보입니다(결국, 포스트맨은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그의 인기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하락합니다). 그는 또한 속편을 만들지 않는 배우로 유명한데, 이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제작과 주연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둔 톰 크루즈와 비교되는 태도입니다.

결론적으로, 케빈 코스트너는 나름대로 주관을 갖고 새로운 방향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영화에서 그가 보인 이미지는 대중의 기대와 너무도 달랐기에 갈수록 대중에게서 외면을 당한 것입니다. 하긴 존 웨인처럼 대중이 사랑하는 배우도 추격자(The Searchers)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내뱉는 어두운 역할을 맡았다가 흥행에 실패했으니, 대중의 기대에 어긋나는 어두운 역할만 계속 맡는 배우가 인기를 잃는 것은 당연하겠죠. 하지만, 케빈 코스트너는 최근에도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는 등 영화에 대한 애정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좋은 영화를 내놓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이 재능있는 배우가 그냥 그저 그런 배우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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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에 자주 방문하는 분은 제가 쓰는 글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형식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사실을 이미 아실 것입니다. 글의 분량이나 시작하고 끝맺는 방식이 마치 틀에 찍어낸 듯 유사하죠. 이는 우연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의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훌륭한 작가라면 주제에 맞게 어떤 글은 길고, 어떤 글은 짧게, 어떤 글은 충격적인 내용으로 시작하기도 하고, 어떤 글은 애매하게 끝내기도 하면서 변화를 주겠지만, 이렇게 형식을 바꿔가면서 글을 쓰려면 너무 고민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글쓰기에 편한 형식을 정해놓고, 글의 내용만 바꿔가며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해놓은 형식 중 하나는 시작할 때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되는 일화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는 DNA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를 낳는다는 내용이었는데, 글의 시작은 유럽에서 구입한 비타민C가 너무 커서 몇 쪽으로 나눠 삼켰다는 일화입니다. 글의 주제는 추상적이지만, 도입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라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전통적인 글쓰기였다면 "세계에는 많은 민족이 존재하고, 각 민족은 문화뿐 아니라 신체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서양인은 체구가 클 뿐 아니라 목구멍도 큽니다..."라는 식으로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글은 과거에는 글쓰기의 모범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이렇게 썼다가는 구독자들이 다 떠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글은 지루하고, 답답하고, 지나치게 객관적이라 더 읽을 엄두가 안 나기 때문이죠.

현대인은 정보범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엔 돈을 많이 줘야 정보를 구할 수 있었기에 정보가 귀중했지만, 오늘날엔 인터넷에서 이미 엄청난 양의 정보를 무료로 얻을 수 있기에 누가 막연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정보가 구체적인 사람의 삶에 연결된 모습입니다. 특히 사람들이 인터넷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터넷에는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인간의 땀이 느껴지는 진실한 글이 많기 때문이죠. 만약 정말 귀중한 정보만 원한다면 무료로 고전을 다운로드 받아서 보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독자가 원하는 글이 바뀌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도 좀 더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진솔한 글을 써야 독자와 교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저자들은 글을 가면 삼아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가린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글을 썼기에 플라톤의 글에 나오는 철학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지 플라톤의 생각인지도 알기가 어렵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교과서 같은 책을 썼기에 그의 책을 아무리 읽어도 그의 사생활은 알 수가 없습니다. 칸트, 헤겔 등 위대한 사상가들도 사생활과 분리된 글을 쓰는데 능했습니다. 당시의 독자들은 이러한 저자가 평소에 어떻게 사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고, 오직 발표되는 책을 통해 저자와 만났을 뿐이죠.

하지만, 점차 정보가 많아지고, 특히 보편교육이 도입되어 국민 대부분이 정규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과거에 생활고에 쫓겨 국민학교도 나오기 어려웠던 시절엔 혼자서 밤에 공부하면서도 희열을 느꼈지만, 억지로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을 끝내게 된 사람은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많은 정보가 있기에 더 많은 정보를 얻는 일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인간관계가 점차 약화하고, 인간-인간의 만남이 인간-미디어-인간의 만남으로 대체되면서, 사람들은 꾸미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보길 갈망했습니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대부분 철저한 연출을 따른 꾸며진 모습이기에 현실과 달랐기 때문이죠.

이러한 대중의 갈망은 스포츠와 리얼리티 쇼의 인기를 낳았습니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처럼 꾸미지 않아도 극적입니다. 선수들이 승리하고, 패배하며, 실수를 저지르고, 그러한 실수를 만회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진실성(authenticity)을 보았고, 여기서 매력을 느꼈죠. 인류의 역사에서 20세기처럼 스포츠가 인기를 끈 적은 없었다는 사실과 20세기는 미디어가 대중의 삶에 침투한 시기라는 사실은 분명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모습을 보기 원하는 대중의 심리는 리얼리티 쇼의 인기를 낳았습니다. 리얼리티 쇼로는 미국의 American Idol, 영국의 Big Brother, 프랑스의 Star Academie 등이 대표적인 예죠. 엄밀히 말해 리얼리티 쇼도 연출이 없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드라마처럼 완전히 작위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현실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국형 리얼리티 쇼인 "우리 결혼했어요"는 유명인 중심이고, 실제 상황(상을 받기 위한 경쟁 등)이 아닌 가상의 결혼생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외국의 유명 리얼리티쇼와 다릅니다. 어쩌면 이는 한국이 서양 국가들보다 미디어가 생활에 들어온 역사가 짧고, 따라서 서양인처럼 "진실한 모습을 보고 싶다"라는 욕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진실한 모습을 보기 원하는 현대인의 갈망은 "리얼리티 쇼 같은 드라마"라는 기이한 장르를 낳았습니다.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룬 The Office(원래 영국에서 만들었지만 미국판이 더 유명해짐)나 뉴질랜드 청년들의 뉴욕 적응기를 다룬 The Flight of the Conchords(오자 아님), 사인펠드 쇼를 만든 래리 데이비드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Curb Your Enthusiasm 등이 그러한 예죠. 리얼리티 쇼의 매력은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인데, 리얼리티 쇼 같은 드라마는 드라마이기에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리얼리티 쇼를 좋아하는 현대인은 드라마조차 리얼리티 쇼 같기를 원합니다. Lost 등을 만든 J.J. Abrams 감독의 영화 Cloverfield도 현실을 보여주는 듯한 영화라는 점에서 리얼리티 쇼 같은 드라마와 공통점이 보이죠.

미디어의 현실왜곡에 질식된 현대인이 미디어를 통해 진실한 모습을 보기 원하는 모습은 매우 모순적입니다. 정말 현실을 보고 싶다면 TV를 끄고 가족,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죠. 하지만, 현대인은 미디어 없이는 살 수가 없기에 미디어를 통해 현실의 환상을 찾습니다. 과연 현대인이 TV와 영화, 인터넷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을지 고민해 보게 됩니다.

P.S. 전에 썼듯 다음 주엔 스위스에 회의를 다녀오느라 글을 못올릴 것 같습니다. 많은 양해 바라고, 9월 14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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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DNA

문화 2009/09/04 06:17
어제는 몸이 안 좋아 비타민C를 먹었는데, 평소에도 목에 잘 걸리더니 몸이 안 좋아 그런지 반쪽으로 쪼개도 넘어가질 않아 결국 네 쪽, 다섯 쪽으로 쪼개서 먹었습니다. 제가 목구멍이 좀 작긴 하지만, 한국에서 만든 비타민C는 기껏해야 두 쪽으로 쪼개면 넘길 수 있었는데, 역시 유럽 알약이 크긴 크더군요. 인터넷에도 미국이나 유럽 비타민C가 너무 커서 목에 걸린다는 글이 올라오던데, 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미묘한 신체적 차이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전에 인도에 갔을 때 리바이스 청바지가 싸기에 입어보니 묘하게 허벅지가 끼는 것이 영 불편했습니다. 치수를 바꿔가며 몇 개 입어봤는데 모두 불편하게 느껴지기에 포기하고 안 샀는데, 나중에 인도에 사는 한국 사람에게 물어보니 원래 한국 사람이 인도에서 만든 청바지를 입으면 안 맞는다고 합니다. 면바지는 그럭저럭 입을 수 있지만, 청바지는 신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체형의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러고 보면 외국 사람이 한복을 입어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복은 한국인의 체형을 바탕으로 한 옷이기에, 외국 사람이 입으면 영 이상하게 느껴지죠. 그에 비해 한국 사람은 아무리 체형이 서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서양 사람보다는 한복을 잘 소화해냅니다. 이는 명절에 한복 입고 나오는 연예인만 봐도 알 수 있죠.

민족의 신체적 특징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에서 북미 원주민까지 몽골계통의 아시아인은 몽고반점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보입니다. 스페인과 프랑스 등에 사는 바스크인들은 겉으로는 유럽인처럼 보이지만, 언어가 다른 유럽인들과 전혀 다르고, 이를 볼 때 조상이 다른 지역에서 왔으리라고 추측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의 차이는 바스크인 중 Rh-형이 35%나 발견되는 등 유럽인과 혈액형 비율이 전혀 다르다는데서 확인할 수 있죠. 전통적으로 우유를 마시지 않은 한국인들은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Lactase deficiency)을 보이는 사람의 비율이 높습니다. 알레르기가 현대식 생활의 결과라고 하지만, 여기에도 인종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백인은 주로 음식 알레르기가 나타나는 데 비해, 한국인은 피부에 나타나는 알레르기 증상인 아토피가 많습니다(구글에서 영어로 atopy를 검색하면 50만 개의 결과가 나오는데, 한글로 아토피를 검색하면 2백만 개 이상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만큼 한국인이 아토피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말이죠).

민족 간의 신체적 차이는 남녀 간의 차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라틴계통의 민족들은 남자는 남성스럽고, 여성은 여성스럽게 보입니다. 이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각각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죠. 그에 비해 아시아인들은 그렇게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죠. 이러한 신체적 차이는 문화의 차이를 낳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라틴문화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치근덕대는 것이 매우 일상적입니다. 라틴계통의 여자들은 지극히 여성적으로 옷을 입고 여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그에 비해 남녀의 신체적인 차이가 크지 않은 문화에서 여자가 레이스 달린 꽃 치마 등 지극히 여성적인 옷을 입거나, 가정주부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가 성적 자극에 민감하기에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자극할 수 있는 몸매의 여성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은 한국에서는 쉽게 찾기가 어렵습니다. 남자도 남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면 턱이 각지고, 목소리가 굵고, 몸에 털이 많기 마련인데, 이런 남자도 한국에는 매우 드뭅니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가 한국인의 신체를 바탕으로 발전했기에 지금도 한국인이 좋아하는 이성의 모습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전통적인 미인은 단아하게 아름다운데, 지금도 한국 연예계의 대표미인 중에는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 많죠.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움은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여성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이러한 한국인의 미인관을 이해해야 왜 90년대에 맥 라이언이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있었고,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신디 크로퍼드나 파멜라 앤더슨은 한국에서 인기가 전혀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자도 남성 호르몬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부담스러운 느끼한 남자일 뿐입니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남자는 지나치게 남성성이 강하지 않고 친근한 느낌의 꽃미남이죠.

문화는 환경을 만들지만, 환경도 문화를 만듭니다. 그리고 환경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고, 인간의 몸은 DNA가 결정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DNA가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다양한 문화를 DNA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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