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애플 II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었고, 매킨토시로 오늘날 컴퓨터 사용환경의 기본인 GUI를 대중화한 회사입니다. 80년대 말 이후로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인텔에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면서 고전하던 애플은 90년대 말 일체형 컴퓨터 iMac을 내놓으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애플은 2000년대에 들어선 Unix를 기반으로 한 Mac OSX가 안착하고 인텔 CPU로 이주에 성공하면서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특히 컴퓨터 시장의 중심이 데스크톱에서 랩톱으로 옮겨오면서 뛰어난 디자인과 편리한 사용환경이라는 강점이 두드러지며 컴퓨터 판매량이 급증합니다. 게다가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등 개인용 제품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iTunes Store를 통해 미디어 유통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둠으로 이제는 컴퓨터라는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 IT, 미디어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애플이라는 회사의 역사를 잘 설명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애플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그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세운 컴퓨터 회사로, 이들은 최초의 대중적인 개인용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애플 II를 내놓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중이 컴퓨터를 좀 더 쉽게 쓸 수 있도록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기 원하던 스티브 잡스의 꿈은 매킨토시의 개발로 이어졌지만,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그에게 부담을 느낀 애플 이사회는 결국 그를 회사에서 몰아냅니다. 잡스가 떠난 애플은 정체성을 잃고 특징 없는 제품을 내놓다가 점차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결국, 회사의 문제를 깨달은 애플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스티브 잡스가 세운 넥스트 컴퓨터를 인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스티브 잡스는 애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iMac을 내놓으며 애플이 부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2000년대 들어선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놓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CEO일 뿐 아니라 대중을 열광케 하는 비저너리이고, 많은 사람은 그가 일 년에 한 두 번씩 진행하는 키노트에서 애플의 새로운 제품이 발표는 모습을 보며 열광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나 두 번째 이야기나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두번째 이야기엔 스티브 잡스라는 인간이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수만 명이 일하는 회사이고, 애플의 소유주라고 할 수 있는 주주의 숫자는 그보다도 많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회사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애플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라는 식의 표현은 매우 모호하기 마련이죠(주주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이사회가 결정을 내렸다? 경영진이 결정을 내렸다? 담당 엔지니어가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야기의 중심을 요구합니다. 애플의 경우엔 스티브 잡스가 그러한 역할을 하죠. 이러한 관점에서 애플의 특징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특징으로 환원됩니다. 매킨토시가 컴퓨터 폰트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잡스가 대학생 시절 calligraphy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고,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은 것은 잡스가 음악이 대중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던 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식이죠. 이러한 해석은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도 적용이 됩니다. 아이폰 4의 안테나 문제도 "스티브 잡스의 독선, 고집,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러한 예입니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관계는, 이해를 위해선 대상에 인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아무리 복잡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중심에 인격체가 있다면 쉽게 이해하는데 비해, 간단해 보이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인격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서 없는 인격을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기계를 자주 다루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기계에 인격을 대입해서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기계가 잘 작동 안 하면 "어,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네"하겠죠).
인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수많은 세포가 결합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세포들은 유기체의 생명을 연장하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죠. 그런데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세포 중에 어떤 세포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활동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몸속에 침투한 병균과 싸우는 백혈구가 그러한 예인데, 백혈구가 병균과 싸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때 세포의 단위로 이해하지 않고 꼭 인격의 단위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세포를 묶는 "인격"(person)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은 인격을 영혼(soul)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몸에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백혈구가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움직이는 것 같아도, 영혼이 통제하는 몸속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 백혈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영혼은 "내가 나 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세포는 늘 파괴되고 새로운 세포로 대치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영혼을 소유하기에 "나"일 수가 있죠. 이처럼 영혼은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줄 뿐 아니라, 나와 남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에 나오는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라는 질문도, 영혼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죠.
물론 근대 이후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늘었고, 결국 오늘날 대부분 철학자와 과학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문제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죠. 나를 "내 몸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의 집합"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나를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가 다른 사람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영혼을 제거하고 설명을 하려면 간단한 관계조차 설명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또한, 인간의 몸이 몇 년을 주기로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오늘의 나와 몇년 전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물론 인간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인 유전자"), 그렇다면 이기적인 유전자와 다르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은 유전자는 설명해도 유전자가 구성하는 "인간"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인 대니얼 데넷(Daniel Dennett)은 이처럼 물질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아(self)를 "이야기의 무게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가 쓴 이야기의 중심인 자아(The Self as a Center of Narrative Gravity)에서 그는 인격이 없지만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만들어내듯,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두뇌에서 이야기(narrative)를 만들어내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고 주장합니다. 즉,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라는 말이죠. 조금 황당한 주장이지만, "영혼"이라는 가정이 없이도 "자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아"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지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내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내 영혼이 필요하다."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인간은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영혼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대니얼 데넷이 말한 바로는 인간이란 자신에게 "나는 물질을 넘어서는 존재다"라는 환상을 늘 심어주며 사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로봇과 마찬가지로 기계일 따름이지만, 영혼을 지닌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A.I. 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은 바로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로봇이 어떻게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처럼 단순한 두뇌에서 어떻게 자신을 속일 정도의 복잡한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이는 Douglas R. Hofstadter가 Gödel, Escher, Bach에서 제시한 모델(무의미한 기호가 의미를 낳는 과정)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혼도, 자아의 실체도 부인하는 이 철학자가 이야기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자아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핵심이라는 말이죠. 그러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으로 이야기를 쓰며 삽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생으로 쓴 이야기가 내가 인생의 이야기를 쓰는데 영감을 불어넣게 때문이겠죠.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기 원하는 것도, 이야기를 접해야 자신의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기 때문이죠. 부모가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을 깨닫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숫자와 논리로 가득한 교과서만 읽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를 충분히 접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라면 할 수 있는 능력은 풍부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기가 쉽겠죠.
지금 서점에 가면 "이야기를 활용해 프리젠테이션하는 법" "이야기를 통해 마케팅하는 법" 등의 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이 가르치는 내용은 대부분 "이야기를 이용해 남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야기 위에 군림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야기가 인생의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의 남용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인생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이성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쓰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로부터 인생의 진리를 배워왔습니다. 전통적인 기준과 가치가 무너져 인생의 방향을 찾기 어려워진 오늘날 사람들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야기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야기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이야기를 통해 남을 조종(manipulation)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줄 이야기를 찾아, 그 이야기에 맞춰 내 인생의 이야기를 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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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설명은 애플이라는 회사의 역사를 잘 설명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애플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그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세운 컴퓨터 회사로, 이들은 최초의 대중적인 개인용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애플 II를 내놓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중이 컴퓨터를 좀 더 쉽게 쓸 수 있도록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기 원하던 스티브 잡스의 꿈은 매킨토시의 개발로 이어졌지만,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그에게 부담을 느낀 애플 이사회는 결국 그를 회사에서 몰아냅니다. 잡스가 떠난 애플은 정체성을 잃고 특징 없는 제품을 내놓다가 점차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결국, 회사의 문제를 깨달은 애플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스티브 잡스가 세운 넥스트 컴퓨터를 인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스티브 잡스는 애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iMac을 내놓으며 애플이 부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2000년대 들어선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놓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CEO일 뿐 아니라 대중을 열광케 하는 비저너리이고, 많은 사람은 그가 일 년에 한 두 번씩 진행하는 키노트에서 애플의 새로운 제품이 발표는 모습을 보며 열광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나 두 번째 이야기나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두번째 이야기엔 스티브 잡스라는 인간이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수만 명이 일하는 회사이고, 애플의 소유주라고 할 수 있는 주주의 숫자는 그보다도 많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회사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애플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라는 식의 표현은 매우 모호하기 마련이죠(주주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이사회가 결정을 내렸다? 경영진이 결정을 내렸다? 담당 엔지니어가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야기의 중심을 요구합니다. 애플의 경우엔 스티브 잡스가 그러한 역할을 하죠. 이러한 관점에서 애플의 특징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특징으로 환원됩니다. 매킨토시가 컴퓨터 폰트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잡스가 대학생 시절 calligraphy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고,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은 것은 잡스가 음악이 대중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던 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식이죠. 이러한 해석은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도 적용이 됩니다. 아이폰 4의 안테나 문제도 "스티브 잡스의 독선, 고집,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러한 예입니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관계는, 이해를 위해선 대상에 인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아무리 복잡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중심에 인격체가 있다면 쉽게 이해하는데 비해, 간단해 보이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인격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서 없는 인격을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기계를 자주 다루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기계에 인격을 대입해서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기계가 잘 작동 안 하면 "어,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네"하겠죠).
인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수많은 세포가 결합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세포들은 유기체의 생명을 연장하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죠. 그런데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세포 중에 어떤 세포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활동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몸속에 침투한 병균과 싸우는 백혈구가 그러한 예인데, 백혈구가 병균과 싸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때 세포의 단위로 이해하지 않고 꼭 인격의 단위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세포를 묶는 "인격"(person)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은 인격을 영혼(soul)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몸에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백혈구가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움직이는 것 같아도, 영혼이 통제하는 몸속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 백혈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영혼은 "내가 나 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세포는 늘 파괴되고 새로운 세포로 대치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영혼을 소유하기에 "나"일 수가 있죠. 이처럼 영혼은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줄 뿐 아니라, 나와 남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에 나오는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라는 질문도, 영혼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죠.
물론 근대 이후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늘었고, 결국 오늘날 대부분 철학자와 과학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문제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죠. 나를 "내 몸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의 집합"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나를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가 다른 사람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영혼을 제거하고 설명을 하려면 간단한 관계조차 설명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또한, 인간의 몸이 몇 년을 주기로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오늘의 나와 몇년 전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물론 인간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인 유전자"), 그렇다면 이기적인 유전자와 다르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은 유전자는 설명해도 유전자가 구성하는 "인간"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인 대니얼 데넷(Daniel Dennett)은 이처럼 물질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아(self)를 "이야기의 무게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가 쓴 이야기의 중심인 자아(The Self as a Center of Narrative Gravity)에서 그는 인격이 없지만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만들어내듯,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두뇌에서 이야기(narrative)를 만들어내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고 주장합니다. 즉,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라는 말이죠. 조금 황당한 주장이지만, "영혼"이라는 가정이 없이도 "자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아"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지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내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내 영혼이 필요하다."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인간은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영혼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대니얼 데넷이 말한 바로는 인간이란 자신에게 "나는 물질을 넘어서는 존재다"라는 환상을 늘 심어주며 사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로봇과 마찬가지로 기계일 따름이지만, 영혼을 지닌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A.I. 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은 바로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로봇이 어떻게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처럼 단순한 두뇌에서 어떻게 자신을 속일 정도의 복잡한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이는 Douglas R. Hofstadter가 Gödel, Escher, Bach에서 제시한 모델(무의미한 기호가 의미를 낳는 과정)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혼도, 자아의 실체도 부인하는 이 철학자가 이야기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자아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핵심이라는 말이죠. 그러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으로 이야기를 쓰며 삽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생으로 쓴 이야기가 내가 인생의 이야기를 쓰는데 영감을 불어넣게 때문이겠죠.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기 원하는 것도, 이야기를 접해야 자신의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기 때문이죠. 부모가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을 깨닫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숫자와 논리로 가득한 교과서만 읽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를 충분히 접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라면 할 수 있는 능력은 풍부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기가 쉽겠죠.
지금 서점에 가면 "이야기를 활용해 프리젠테이션하는 법" "이야기를 통해 마케팅하는 법" 등의 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이 가르치는 내용은 대부분 "이야기를 이용해 남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야기 위에 군림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야기가 인생의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의 남용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인생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이성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쓰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로부터 인생의 진리를 배워왔습니다. 전통적인 기준과 가치가 무너져 인생의 방향을 찾기 어려워진 오늘날 사람들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야기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야기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이야기를 통해 남을 조종(manipulation)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줄 이야기를 찾아, 그 이야기에 맞춰 내 인생의 이야기를 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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