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서 출발한 인간의 역사는 이야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듭니다. 즉, 인격과 구체성, 단순한 인과관계를 배제하는 대신 객관적이며 보편적이고,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합당한 진리를 찾게 된 것이죠.

이야기에 의존하는 생각은 어린아이의 사고와 비슷합니다. "크리스마스에 받는 선물은 어디서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이들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상을 주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믿습니다. 아이의 관점에서 이러한 말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른이라면 "그렇다면 산타클로스가 24시간 안에 전 세계에 다니면서 수십억 명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줘야 할 텐데, 이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고, 따라서 사실일 리 없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이는 언뜻 생각하기에 맞는 말처럼 보이는 말을 믿지만, 어른은 논리적으로 따져서 보편적인 상황에 맞는 말을 믿는 것이죠. 결국, 사고력이 자라면 아이도 산타클로스라는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죠. 어쩌면 인류가 이야기를 벗어나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게 된 것도 인류의 사고력이 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야기를 배제하고 이성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면서, 수학의 중요성도 커졌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숫자는 세상이 논리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자,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논리와 수학의 결합은 수(numbers)를 만물의 근원으로 본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고, 근대에 들어선 "세상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다"고 말한 갈릴레이에서 보듯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신념이 되었으며,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책에서 물리현상이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뉴턴에서 완성이 됩니다. 이러한 숫자의 세계엔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고, 오직 메마르고 건조한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죠.

이처럼 이야기 중심의 사회가 논리와 숫자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인간관계도 변하게 됩니다. 과거에 인간들을 묶어 주었던 이야기가 사라지면서 숫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인간을 숫자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라는 불평은 이러한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이죠. 이야기로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지 배웠던 우리 조상과 다르게, 우리는 숫자(연봉, 통장 잔고,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TV 인치 수, 그리고 트워터 팔로윙 수)에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에서 보듯, 인간은 숫자를 통해 세상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도 숫자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합리론의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인간도 세상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세상이 숫자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인간도 숫자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을 분석하고 연구한다면, 결국 인간의 본질을 숫자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인간을 숫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의 독특성을 부인하는 위험한 주장으로 들립니다. 인간은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의 어떤 부분(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숫자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논리와 숫자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원인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성 파괴는 단순히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대에 들어서 자주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특히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가 뛰어난 과학기술을 대량살상 무기 만드는 데 썼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라는 이념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뛰어난 기술로 가스실을 건설한 독일인들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상실한 채 기술과 지식만 의존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주는 예죠. 또한, 선진국일수록 정신질환자가 많다는 사실은 현대 문명이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은 목적을 "어떻게" 이루는지 잘 알지만,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고, "왜" 그런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수학은 이처럼 인생의 목표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영혼의 영역이고, 영혼은 수학이 아닌 이야기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고 느끼는 사람 늘어날수록, 이야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거에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이야기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새롭게 부활하게 됩니다. 다음번엔 이야기의 부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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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야기는 지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이야기의 인격성과 구체성 때문입니다. 역사의 초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이 지역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다."라는 인격의 구체적인 활동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세상을 통합해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 있는 별을 묶어 만든 별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인류는 별자리를 통해 무질서해 보이는 하늘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별들을 인격 단위로 무리지어 묶어놓고 나니, 하늘에는 수많은 연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난무하였고, 이러한 별들의 움직임을 총괄하는 질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상을 통합하는 지식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했고, 결국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비인격적, 물질적 실체가 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본 탈레스나 공기라고 본 아낙시메네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리토스 등은 이러한 좋은 예죠. 이렇게 인격이 없는 물질에서 세상의 근본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과학의 발달을 낳습니다. 과학은 연구의 대상이 비인격적이어야 하는데, 만약 연구의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라면 변덕을 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죠. 또한, 과학은 보편적인 법칙을 찾고자 노력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과학에서 하나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이 대상이 기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므로 새로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단서로 작용할 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인과관계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직관에 반하지만, 논리적인 결론을 더욱 중요시합니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는 이유는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하늘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오고, 따라서 직관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지구가 해 주위를 돈다는 것이 과학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인 인격성, 구체성, 직관적인 인과관계와 대척점에 서 있고, 그래서 대부분 민족은 전통적인 이야기에 얽매여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물론 그리스인들도 하루아침에 이야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이야기의 전통은 철학계에서조차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탈레스만 해도 "만물은 신들로 가득하다."라고 말했고, 초기 철학자 중 한 명인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격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였기에 전형적인 이야기의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적 가르침을 이야기(예화)를 통해 설명함으로 이야기와 철학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과 이야기를 결합했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철학에 종속시킨 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역사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였고,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인간을 만든 셈이죠. 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동원했고, 그가 창조한 이야기는 이성에 의해 창조된 도구라는 점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이야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인(당시의 시인은 서정시인이 보다는 이야기꾼에 가깝습니다)을 추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은 그가 이야기와 철학이 공존할수 없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플라톤에서 발견되는 철학과 이야기의 불안한 동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이야기의 완벽한 소멸로 끝이 납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야기는 분석의 대상(그의 저서 시학이 잘 보여주듯)이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을 나누는 동반자는 아니었고, 결국 합리적인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은 이야기와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에서 시작된 합리성의 전통은 서양의 철학과 과학을 낳았고, 이 둘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서양문명의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유럽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제거하고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니 사람들은 이야기가 그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이야기를 다시 찾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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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인간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세상에 질서를 부여해야 세상을 이해하고, 그럴 때에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세상에서 짧은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죽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죠.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인간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 점차 세상을 이해하였고, 이는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도왔습니다.

이야기가 이처럼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 때문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비인격적인 현상이나 존재에 인격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person)이기 때문에, 인격을 지닌 존재를 잘 이해하고, 그에 비해 인격이 없는 존재에 대해선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이진법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컴퓨터가 모든 데이터를 이진법으로 바꿔서 처리하듯,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은 모든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로 바꾸어 놓을 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격이 없는 지구가 해를 바라보면서 24시간에 한 바퀴 돈다는 설명보다는, 태양신이 불마차를 끌고 종일 하늘을 가로질러 여행을 한다는 설명이 인간에겐 훨씬 이해하기가 쉽죠. 견우성과 직녀성이 지구의 움직임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서로 가까운 듯 보인다는 설명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떨어져 지내다가 1년에 한 차례 까마귀와 까치가 놓아준 다리 위에서 만난다는 설명은 훨씬 매력적입니다. 이러한 인격화의 과정을 통해 비는 하늘이 내리는 눈물로 바뀌고, 천둥은 죄인에 대한 하늘의 심판, 태풍은 바다의 분노로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됩니다. 이러한 수많은 이야기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죠.

또한, 이야기는 세상에 구체성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추상적인 설명보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훨씬 잘 이해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듣기 원했고, 이야기는 이러한 필요를 잘 채워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닷물은 왜 짠가?"라는 질문에 대해, "강물에 녹아 있는 소량의 소금이 바다로 계속 모여들고, 물은 계속 증발하기 때문에 짜다"라는 설명은 구체성이 부족합니다. 그에 비해 "먼 과거에 바다를 알기 원했던 소금 인형이 바닷속에 뛰어들어 녹았고, 그래서 짜다"라는 설명은 "소금인형"이라는 구체적인 존재가 이야기의 중심이기 때문에 훨씬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구체성은 특히 민족의 기원을 설명할 때 중요합니다. 대부분 민족은 한 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독특한 정체성을 얻을 때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구체성이 없기에 대부분 민족은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한국의 단군, 이스라엘의 아브라함, 스위스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의 영구동맹, 미국의 Pilgrim Fathers)에서 기원을 찾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세상을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해줍니다. 철학에서 인과관계라는 개념은 매우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불을 관찰할 수 있고, 연기를 관찰할 수 있지만, 불 때문에 연기가 난다는 인과관계를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대부분 사람은 인과관계를 철석같이 믿고,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일이 발생한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이야기는 이처럼 인과관계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청개구리는 왜 비가 오면 울까?"라고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청개구리는 어머니 말씀을 반대로 하다가 오해가 생겨 어머니를 강가에 묻었는데, 비가 오면 어머니 무덤이 걱정돼서 운다."라는 설명이나 "인종마다 피부색이 다른 원인"이 궁금한 사람에게 "신이 도자기 굽듯 인간을 구웠는데, 굽는 시간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많은 사람에게 만족스러웠습니다. 복잡하고 논리적인 해답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A라는 존재가 B라는 행동을 했기에 C라는 결과가 생겼다."라는 해답은 훨씬 받아들이기가 쉽기 때문이죠.

이렇게 이야기는 인격, 구체성, 인과관계라는 틀을 제공함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세상을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이야기 중심의 문화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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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조사가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나면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강경한 표현을 쓰기 좋아하는 북한은 연일 공격적인 말투로 한국 정부를 비난 중이고, 우리 정부도 이번엔 밀리지 않겠다는 식으로 강하게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곧 전쟁이 난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북한 전쟁 선포설, 예비군 동원령 등 잘못된 정보를 담은 문자 메시지까지 돌아다니면서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소유한 지금, 남북 간의 전쟁은 한반도 전체의 파괴를 의미하기에 작은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온 국민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실제로 전쟁이 날 가능성은 극히 적습니다. 우선, 주가와 환율의 변동을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주가와 원화가치가 대폭 떨어졌는데, 그 원인은 남북관계의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가 다시 찾아오면서 한국을 비롯한 고수익 고위험 시장에서 저수익 저위험 시장인 미국으로 돈이 옮겨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난 며칠간 원화뿐 아니라 유로화도 가치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변동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한반도의 위기가 반영된 주가, 환율 변동 폭을 생각해 본다면 별로 크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계에선 이번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작다고 본다는 뜻이죠.

아마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상황을 기억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물리적인 변화가 원인이 아닌, 시스템상의 문제가 원인이었습니다. 외환위기가 닥쳤다고 공장이 사라지거나 원자재가 증발하는 것은 아니죠. 단지 경제활동에 어려움이 새기면서 상품이나 부동산의 경제적 가치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전쟁은 이와는 다릅니다. 전쟁이 나면 경제활동이 둔해질 뿐 아니라 물리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서울 시내에 있는 거대한 빌딩이 폭격으로 무너지면, 그 빌딩의 가치는 완전히 사라집니다(이론상으로 땅의 가치는 남긴 하겠지만). 어느 회사의 공장과 연구소, 본사가 모두 파괴된다면 그 회사의 주식은 휴짓조각이 됩니다. 따라서 전쟁으로 말미암은 주가와 환율의 변동은 경제위기로 말미암은 변동보다 훨씬 커야 마땅합니다. 1997년 당시 외화부족 사태를 맞아 환율이 두 배 반 정도 오르고, 주가가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생각할 때 지금이 전쟁의 위기를 앞둔 상황이라면 이보다 큰 수준의 변동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 변동폭은 이보다 훨씬 적습니다.

제가 전쟁의 가능성이 작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남북 지도자들이 전쟁을 원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나서, 전쟁이 일어날 뻔 한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전쟁이 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은 남북 지도자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이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전쟁의 위험에 대해 떠들면서 내부적 결속을 다졌고, 반대파를 탄압하였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회만 되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관계 개선이 남북의 대치 상태보다 정치적으로 이득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도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정치적 목적을 이룬 후 슬그머니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꼭 전쟁을 피하는 쪽으로 끝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치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한쪽에서 실수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아니면 실무착오로 무력이 행사된다면 이는 곧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 죽일 마음은 없지만(그러다가 자신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옆에서 갑자기 소음이 난다면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서 둘 다 죽을 수 있죠.

이러한 비극은 평상시에는 상대방에게 연락함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사고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고 인정한다면 우선 사태를 확인할 동안만이라도 대응을 자제하면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치상태에서 적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우리 군도 즉시 반격에 나서고, 일단 쌍방 무력사용이 시작된다면 전쟁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냉전 시대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핫 라인을 열어 놓고, 혹시나 상대방의 실수로 말미암은 무력 사용이 전쟁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막았습니다. 남북한도 1971년 부터 남북 연락관 통화용 직통전화를 설치하여 만약에 발생할지 모르는 실수로 말미암은 충돌을 피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결국 2008년 직통전화선이 끊겼습니다. 지금 북한군이 박격포라도 쏜다면, 우리 군은 이것이 실수인지, 상부의 의지와 다르게 말단 지휘관 하나가 문제를 일으켰는지 알 길이 없기에 반격을 해야 하고, 우리가 반격하면 이는 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말이 안 통하니 주먹질이 시작되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셈이죠.

어쨌든 저는 어렵게 마련된 한반도의 평화 기조가 한순간 날아갔다는 점에서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과연 이렇게 언제 전쟁이 시작될지 몰라 불안에 떠는 상황이 많은 국민이 원하는 상황일까요? 부디 이번 사태가 무사히 끝나고, 다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랍니다. 다음 세대에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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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명시하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합조단은 이러한 결론을 내린 근거로 사고 지점에서 발견된 북한 어뢰 잔해 등을 증거물로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우리 정부는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책임으로 몰고 가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밝힌 셈이 되었고, 미국 등 우방국도 이에 동조한다는 사실을 볼 때 한반도의 긴장은 당분간 풀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조사가 끝났으니 더는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의혹은 없어야 하는데, 저는 발표를 보며 전보다 더 많은 의혹이 생겼습니다. 합조단이 증거라고 내 놓은 자료가 너무도 엉성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인 어뢰 잔해를 봅시다. 이 어뢰는 형태가 너무도 잘 보존되었기에 한눈에도 어뢰 잔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어뢰가 1,200톤급 초계함을 두 쪽 냈다면 대단한 폭발을 일으켰는데, 남은 폭발하면서 자신은 고스란히 형태를 보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를 들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히로시마 중심부에서 원자 폭탄의 잔해가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라는 발표가 나온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도시 전체를 파괴한 폭탄이 자신은 모양을 보존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죠. 마찬가지로, 천안함을 파괴한 어뢰도 파편 일부분이 발견될 수는 있어도 껍데기만 빼고 알맹이는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군사전문가인 김성전 국방정책연구소장도 미디어 오늘과 인터뷰에서 "그 어뢰 수거물은 250kg 폭발력을 가진 어뢰 본체에 붙어있는 장치인데 과연 이렇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라고 회의적인 견해를 밝혔죠.

물기둥이 100미터 솟았다는 증언의 신빙성도 떨어집니다. 천안함에 타고 있던 사람 중에서 물기둥을 보았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군은 물기둥이 없다는 사실을 "버블 제트가 터지는 위치에 따라 물기둥이 옆으로 퍼지면 안보일 수도 있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물론 밑에서 떠오르는 버블 제트가 배에만 위 방향을 작용하고 물에 대해선 옆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지만, 중요한 사실은 과거엔 군이 "물기둥은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기둥을 본 증인이 있다니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합조단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하루 전, 군은 유실되었다고 알려졌던 가스터빈실을 인양했습니다. 가스터빈실은 큰 충격을 받고 떨어져 나간 부위로, 만약 천안함이 어뢰로 침몰했다면 화약흔이나 어뢰 파편이 많이 발견될만한 중요한 부위입니다. 그런데 합조단은 가스터빈실에 대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고 준비한 자료만으로 예정대로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합조단이 얼마나 성의없이 조사를 마무리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정말 한 점의 의혹이 남지 않는 조사를 발표하려면 예정된 날짜를 연기하고 가스터빈실을 조사해야 마땅합니다. 또한, 그 작은 어뢰 잔해도 찾아내면서 사고 지점에 그대로 가라앉은 40톤이 넘는 거대한 물체를 지금에야 인양했다는 사실 자체도 의혹의 여지가 많습니다.

이번 합조단의 발표는 남북관계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정부가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고 믿는다면 이는 최소한 남북관계 경색과 이로 말미암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일으키고(벌써 하루 만에 원화 가치와 주가가 크게 떨어졌죠), 만약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면 전쟁으로 말미암은 국가적 재앙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띄는 발표치고는 너무 의혹이 많이 남습니다.

북한을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려면 한 점의 의혹이 남지 않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줘야 마땅하죠. 부디 앞으로라도 국민의 의혹을 없앨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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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시대

사회 2010/05/04 02:45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는 Status라는 칸이 있습니다. 사용자들은 이 칸에 자신이 지금 하는 일, 자신의 감정 상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 등을 자유롭게 쓸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각 사람이 Status를 올리면 나는 이를 News Feed 페이지에서 모아서 볼 수가 있습니다. 길게 글을 쓸 필요 없이 간단하게 친구 간에 의사소통하기 좋은 장치죠. 한국에서 이와 유사한 장치로는 메신저 대화명을 들 수 있습니다만, 대화명은 지금 로그인해서 내 대화명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전달되기에 과거에 쓴 내용도 모두 기록이 되는 페이스북의 Status와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페이스북의 Status는 간단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지만, 페이스북 내의 작은 서비스이기 때문에 페이스북을 쓰지 않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과거엔 페이스북 상의 친구만이 Status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Security option에서 공개여부를 선택할 수 있죠) 유용성이 제한되었습니다. 그런데 Twitter라는 회사가 생기고, Facebook의 Status 기능을 독립 서비스로 제공하면서 이러한 소통방법이 갑자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사진 올리기부터 채팅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강력하지만, 때로는 번잡하게 느껴지는 Facebook과 달리, Twitter는 140자를 쓰고 읽는 기능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훨씬 단순합니다. 하지만, 이 단순함을 무기로 트위터는 탄생한 지 4년 만에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은 한 달에 10억 개의 메시지가 올라올 정도로 사용자가 많습니다.

트위터가 성공을 거둔 원인은 간단한 아이디어의 잠재성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단문으로 세상과 소통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Facebook의 Status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단한 기능을 독립해서 제공하려고 생각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복잡한 아이디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했을 때 어떠한 결과가 생길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지금도 많은 사람은 트위터로 무엇을 해야 할까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트위터의 설립자들은 단문 서비스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상상력의 힘만으로 인터넷을 움직이는 거대한 회사를 만든 것이죠.

최근에 상상력이 중요해진 원인은 각 분야를 구분하는 벽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한가지 영역의 지식이 그 영역에서만 쓸모 있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 지식은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 다른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제약분야의 예를 들자면, 지금 세계적인 제약회사들은 유전자 공학의 성과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공학은 제약과 직접 관련 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유전자 공학으로 획기적인 약효를 보이는 신물질이 개발된다면 제약업계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이죠. 피터 드러커는 이처럼 지식이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면서 전통적인 기업의 연구소들이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정 영역을 열심히 연구하는 기업 보다, 다른 분야에 대해 다양하게 알고, 이러한 지식을 창조적으로 자신의 영역에 적용하는 기업이 더 발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애플은 컴퓨터용 운영체제인 OS X을 개발했지만, 이를 휴대전화에 적용해 iPhone을 만들었을 때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수십년간 휴대전화만 개발해온 휴대전화 제조사들은 애플의 뒤를 쫒느라 난리가 났죠. 이처럼 하나의 지식을 다양한 영역에 활용할 수 있는 시대엔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상상력은 인터넷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입니다. 과거엔 돈과 권력이 사회를 움직였지만, 대부분의 활동에 큰돈이 들어가지 않는 인터넷 세상에선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음악공유 서비스인 냅스터를 세운 션 패닝은 상상력의 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입니다. 90년대 말 고등학생이던 패닝은 쉽게 음악을 찾는 방법을 원했습니다. 당시 음악 공유는 인터넷 서버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특정한 서버에 음악 파일을 올리면 저작권 침해로 고소를 당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접속하면 서버가 다운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용자를 Peer-to-Peer 방식으로 연결한다면 각 사용자가 파일을 전송하기 때문에 서버 부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파일을 주고받는 개인이 법적인 책임을 지기 때문에 저작권 문제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인터넷으로 다른 프로그래머들과 나눴지만, 오직 "사람들이 뭣 하러 익명의 대중과 음악 파일을 공유하겠느냐?"라는 회의적인 반응만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은 기꺼이 음악을 공유할 것이다"라고 믿고 서비스를 개시했습니다. 그가 냅스터 서비스를 개시하자 사람들은 그의 예상대로 무료로 음악을 주고받았고, 결국 냅스터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물론 냅스터를 통한 음악 공유는 불법이었고, 이 서비스는 2년 만에 문을 닫게 됩니다. 하지만, 션 패닝은 다른 사람이 예측하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익명의 대중에게 음악을 공유함)을 상상함으로써 인터넷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결국, 냅스터가 대중화한 P2P 기술은 오늘날 인터넷의 중요한 한 요소로 자리 잡았죠.

20세기 이후로 기술의 발달을 통해 물질적 한계가 극복되면서 우리는 상상력이 인간의 한계를 결정짓는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상상력만 무궁하다면, 물질적인 한계는 쉽게 극복되기 때문이죠. 오사마 빈 라덴은 상상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입니다. 그는 이미 90년대에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미군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주도해서 경계의 대상이 됩니다. 그가 테러리스트로 성공(?)할 수 있던 비결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돈과 무기와 병력을 다양한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대의 교통, 통신 기술을 활용해 테러 활동을 벌인 것이죠. 그가 현대 기술을 활용해 혼자서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기에 토마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그를 "Super-empowered individual"의 예로 들기도 했죠.

하지만, 그의 활동은 외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극히 한정되었고,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고자 초대형 테러 계획을 세웁니다. 이를 위해 그는 거대한 폭탄을 만들거나, 수만 명의 군대를 조직하는 대신, 몇 명의 테러리스트를 미국으로 보내 비행기 조종법을 배우게 합니다. 그는 이들이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다면 비행기를 무기 삼아 중요한 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당시 미국은 이러한 공격을 상상도 못하였기에 이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프리드먼은 9/11사태에 대해 "미국이 상상력 싸움에서 졌다."라고 한탄했죠. 한쪽은 미국을 공격하려고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미국은 이러한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이처럼 상상력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상상력을 쓰는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빈곤을 퇴치하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실제로 빌 게이츠가 세운 재단은 세계의 보건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사람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누군가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길 기대한다는 말이죠. 과거라면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거대한 금액을 투자해 체계적인 연구부터 했겠만, 지금은 엄청난 자료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누군가가 뛰어난 아이디어를 내놓기만 해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은 아프리카에서 열병 환자가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담은 설명서와 약이 들어 있는 상자를 나눠주기만 해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간단한 아이디어가 수 많은 생명을 구하는 예입니다. 앞으로 우리 주변에도 현실에 얽매여 상상력이 갇힌 사람 보다는, 상상력으로 현실을 바꾸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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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아이폰이 들어온 지 6개월도 안되었지만, 이미 사회 곳곳에 이로 말미암은 변화가 눈에 띕니다. 지금까지 윈도우/인터넷 익스플로러/액티브 X라는 삼박자가 맞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는 웹 사이트가 많았던 한국에 아이폰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어떤 플랫폼에서나 접근 가능한 웹사이트나 서비스가 늘어난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트위터나 foursquare 등 외국 서비스의 사용자가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이폰의 영향이 크겠죠(트위터는 김연아양의 계정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지만, 실제로 사용자가 많이 늘어난 것은 작년 말 부터입니다). 그리고 아이폰이 예상외로 많이 팔리면서 "한국엔 토종 제품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깨진 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폰의 인기는 단지 아이폰의 디자인이나 기능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많은 한국인에게 아이폰은 새로운 문화와 사고방식의 상징이고, 한국 문화를 바꾸는 촉매입니다. 이렇게 아이폰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은 오늘날 한국을 지배하는 문화를 싫어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찾기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겠죠.

지금 한국엔 정경유착을 통한 독점기업의 특권, 창의성을 말살하는 군대식 획일화, 기성세대의 기득권에 숨막혀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이폰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분위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폰은 대기업의 특권이 잘 유지되는 이동통신 분야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한국의 이동통신사들은 자사에 등록된 휴대전화만 통신망에 연결을 허락하기에(이른바 White list 제도) SKT, KT, LGT라는 세 기업이 인정한 제품만 시장에서 유통됩니다. 이처럼 큰 권력을 누리는 이동통신사들은 제품의 스펙을 제한하는 등 수많은 횡포를 부렸고, 소비자는 이를 알고도 이러한 회사가 출시를 허용한 제품만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폰이 나오면서 소비자들은 통신사의 간섭을 받지 않은 제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폰은 애플의 제품이기에 애플 마음대로 만든 제품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소비자가 세 통신사의 간섭 없이 나온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거의 혁명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애플이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을 지배하는 구조를 깨고 들어왔기에 통신사와 함께 시장을 좌우하던 삼성은 큰 위기의식을 느꼈고, 아이폰을 들여온 KT와 관계가 멀어지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공고했던 이익의 공동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죠.

또한, 아이폰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획일성을 무너뜨리는 기능도 합니다. 한국사회는 하나의 "주류 문화"를 만들어 놓고, "너도 인간답게 살고 싶으면 여기 끼어들어라."라고 모든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맥사용자가 맥에서 방문하지 못하는 웹 사이트가 많다고 불평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너도 윈도우 써라."죠. 즉, 주류 문화에 편입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불편은 모두 주류 문화를 거부한 사람의 몫이지, 사회가 이런 아웃사이더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한국인의 기본적인 의식입니다. 그런데 아이폰은 외국에서 들어왔기에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기기지만, 워낙 인기가 높기에 아무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즉, 비주류지만 인정받는 흔치 않은 예죠. 만약 아이폰 같은 제품이 많이 늘어나고, 한국을 지배하는 주류 문화가 수 많은 하위문화(sub-culture)로 해체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비주류이기에 주류로부터 당하는 설움도 없어지고, 남들과 똑같아야 한다는 압력도 사라지겠죠. 아이폰은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한국에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심리적 간격이 큰데, 정치, 경제권력을 기성세대가 갖고 있기 때문에 신세대는 그저 기성세대의 논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생산비를 낮춰야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기성세대의 논리는 마음껏 놀면서도 창의성 발휘해서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신세대의 논리를 완전히 압도하죠. 그래서 한국은 여전히 대기업, 부동산, 학벌이 작지만 창의적인 기업, 소프트웨어, 인터넷상의 영향력을 압도하는 나라죠. 하지만, 아이폰은 창의적이고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끄는 제품이 세계무대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예를 보여준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아이폰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지 아이폰이 디자인이 좋거나 기능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아이폰은 이 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의 의미가 강합니다. 아이폰이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모델을 따르지 않고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죠.

아이폰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단지 아이폰이라는 기계만 바라본다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이폰을 싫어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휴대전화면 휴대전화지 거기에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깊게 부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발심이 강합니다. 만약 아이폰이 정말 문화적 상징성을 지닌다면, 내가 아이폰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몰릴 수 있고, 이는 매우 불공정하게 느껴지겠죠. 또한, 세계적으로 "Cool하려면 애플 제품을 써야 한다."는 압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애플이야말로 시장을 장악하고 소비자를 쥐고 흔드는 독점기업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마치 한국에서 삼성의 과도한 시장 장악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듯, 애플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어쨌든 현재 한국에서 아이폰의 시장 점유율은 낮은 편이기 때문에 아이폰은 여전히 주류에 맞서는 비주류의 상징성을 지닙니다. 아이폰의 도입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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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ve you"의 의미

사회 2010/04/22 19:58
한국인과 미국인의 차이점을 말할 때 "미국인은 애정 표현에 적극적이다."라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요즘은 많이 변하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남녀관계가 밋밋한 한국인에 비해 미국인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도 애정을 표현하는 수위가 높아서 이러한 차이점을 말하면 대부분 쉽게 수긍하죠. 그런데 애정표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놓고 본다면 미국인들은 뜻밖에 인색하기 때문에 놀라게 됩니다. 물론 미국인들도 일상생활에서는 사랑(love)이라는 말은 자주 쓰지만, 실제로 연인끼리는 사랑한다는 말은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미국인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트콤을 봐도 이러한 상황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인펠드에서 조지 코스텐자는 애인인 시에나에게 용기를 내어 "I love you"라고 말하지만, 시에나는 "배고프다. 식사하러 가자"며 그를 외면합니다. 프랜즈에서 챈들러는 애인인 모니카가 머리에 칠면조를 얹고 춤추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무의식중에 "I love you"라는 말을 하고, 모니카가 "뭐라고?"하고 묻자 정색을 하며 "아무 말도 안했다"고 부인합니다. How I Met Your Mother에서 테드는 처음 만난 로빈과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나는 너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I think I am in love with you)라고 말했다가 분위기가 깨지고, 결국 로빈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남녀간에 "love"라는 쉽게 쓰지 않는 상황은 남녀관계의 변천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DNA를 후대에 전파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여자와 육체관계를 많이 맺기만 하면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는 남자와 다르게, 여자는 자손을 낳을 뿐 아니라 기르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 혼자서 자녀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따라서 여자는 자신과 자신의 자녀를 돌볼 능력과 마음이 있는 배우자를 찾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남자는 수많은 여자를 쫓아다니고, 여자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남자 중 누가 유능할 뿐 아니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조심스럽게 판단해서 배우자를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게 되어 임신하였는데, 남자가 자신과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죠.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 피임약(the pill)이 개발되면서 남녀관계는 획기적으로 전환됩니다. 임신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여성들이 과거와 다르게 남녀관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변화는 60년대에 미국인의 성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는데, 이를 성 혁명(Sexual revolution)이라고 부르죠. 이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남녀의 관계도 바뀌게 됩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선 여자가 남자와 거리를 두고 관계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60년대 이후론 남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여성이 늘었습니다. 과거에 "남자에게 꼬리 친다"며 부정적으로 보던 태도가 이제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은 것이죠. 이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거리를 두던 관습이 사라지면서 남자와 여자가 심각한 연애 감정 없으면서도 연애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flirting이 보편화하게 됩니다. Flirting은 지극히 새로운 개념이기에 다른 언어로는 아직 번역이 안되었고, 불어나 독어에서도 그냥 영어 단어를 씁니다. 한국은 아직 전통적인 연애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flirting이 덜하지만, 미국 젊은이들에겐 flirting이 보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60년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변화 때문에 이제 남녀는 서로 쉽게 접근하고, 쉽게 연애하고, 쉽게 육체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 때문에 남녀가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상대방이 나를 그냥 쾌락을 위해 만나는지,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즉, 가벼운 만남이 일상화한 시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진지함이 그리운 법이죠. 그래서 미국에서는 그냥 사귀는 관계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관계를 "I love you"라는 말로 구분합니다. "I love you"라는 말을 한다면 이는 곧 "나는 너를 그냥 즐기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이 등장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서로 어떤 의도로 만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쪽이 "I love you"라는 말을 하고 난다면 전통적인 사회에서 결혼을 전제로 매우 진지하게 맺던 관계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의 고백은 곧 결혼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I love you"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I love you"라는 말은 두 사람이 연애를 할 때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띄지만, 이를 제외한 관계에서는 쉽게 써도 되고, 실제로도 많이 씁니다. 음식에 대해 쓰는 "I love pizza"부터 친구 사이의 "I love you", 부모 자식 간의  "I love you, son" "I love you, daddy" 집단을 향한 "I love you, guys"등은 모두 오해의 여지가 없기에 써도 괜찮죠.

한국은 아직도 전통적인 연애관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연애는 곧 진지한 일이고, 따라서 연애를 하는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정도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미국인에게 연애하고 싶다고 "I love you"라고 하거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I love you"라고 했다간 엄청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애인에게 "I love you"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정보의 전달이 아닌 데 비해, 미국인은 "I love you"라는 말을 "나는 진지하게 너만을 사랑하고, 너랑 결혼할 마음도 있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이는 역사적 배경이 다른 문화가 같은 표현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P.S. 이번 주엔 이탈리아에 와서 회의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며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원래 이탈리아 내 여행이 계획되었는데, 화산재 때문에 비행편이 취소돼서 밀라노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내일 기차 편으로 독일로 돌아갑니다.

P.S.S. 저도 트위터를 합니다. 별로 글을 많이 올리지는 않는데, 어쨌든 주소는 @cimi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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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사고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청와대와 군이 사고를 보는 시각이 달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북한의 공격이란 증거가 없다."라는 입장인 데 비해, 군은 "북한의 공격일지도 모른다."라는 태도입니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청와대는 북한을 원인에서 제거하려 하고, 군은 북한을 원인의 하나로 남겨 두려고 하는 점에서 차이가 큽니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김태영 국방장관이 국회에서 북한 어뢰 공격 가능성을 언급하자 청와대에서 "VIP"의 의견을 언급하는 쪽지를 보내 이를 수정하도록 지시한 데서도 드러납니다.

북한 관련 의혹은 군만이 아니라 보수 언론에서도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보수 언론은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에 의해 침몰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보수 언론과 죽이 잘 맞던 청와대는 이러한 가능성을 극구 부인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청와대와 군, 보수언론의 의견 충돌을 이해하려면 한국의 보수층을 구성하는 두 가지 흐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국의 보수는 해방 이후 친미,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이승만 정부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보수층은 6.25를 겪으면서 반공의 중요성을 뼛속까지 느꼈고, 공산주의가 아니라 콩사탕만 빠는 사람도 빨갱이로 몰 정도로 경직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들에게 육영수 여사 피살, 아웅산 사건, 칼기 폭탄 테러, 서해 교전 등은 북한이 여전히 우리의 철천지원수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처럼 반공, 반북한을 중요한 이념으로 생각하는 보수층은 박정희 정권의 출현을 반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고,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죠. 이들에게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고문을 해서라도 간첩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함께 경제발전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합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한국에서 유일하게 경제를 이끌 능력이 있던 것은 정부뿐이었죠. 따라서 60-70년대의 경제발전은 정부가 끌고 기업이 따르면서 진행되었습니다(이러한 경제발전 방식에 대해선 장하준 교수가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잘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경제적 성과를 내고, 세계적인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구도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기업은 정부와 맞먹는 힘을 발휘하게 되면서 정부가 주도권을 잃은 것이죠. 특히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재벌이 정부에 맞설 이론적 근거가 생깁니다. 신자유주의는 쉽게 말해 시장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해선 정부를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미국에서 레이건-클린턴 정부, 영국에서 대처-블레어 정부의 경제 정책의 바탕이 되었고, 한국에선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90년대에 세계적으로 금융자본이 성장하면서 정부 대 기업의 관계는 기업이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됩니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죠.

현대그룹에서 CEO를 지낸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제 정부는 국민의 정부도, 국민이 참여하는 정부(참여 정부)도 아닌 "비즈니스 프랜들리 정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부라면 저소득층 지원 예산을 깎아서라도 4대 강 사업을 벌여 대기업에 새로운 수익원을 공급해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대기업 회장이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이 특별 사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줘야겠죠. 권력은 시장이 쥐고, 시장은 몇몇 대기업이 독점하니 이러한 대기업들이야말로 진정한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죠.

기업이 수익을 많이 남기려면 사회가 안정돼야 합니다. 사람들이 불안감이 없어야 돈을 많이 쓰기 때문이죠. 특히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외국에서 돈 빌리기도 어렵고, 주가도 내려가기 때문에 매우 안 좋습니다. 그렇다면 비즈니스 프랜들리 정부는 남북관계를 안정되게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최소한 남북 관계는 좋아지리라는 예상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의외로 북한을 자극하는 태도를 보이며 남북관계를 긴장상태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정말 북한과 대치하기 원해서가 아니라, 툭툭 말을 내뱉는 이명박 대통령의 특성상 의도와 다르게 북한의 자존심에 상처주는 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요즘은 잘못을 깨달았는지 북한과 관계 정상화에 나선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안함이 침몰했습니다. 비즈니스 프랜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를 북한과 연결되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만약 북한이 우리 군함을 공격했다면 이는 전쟁에 준하는 사태이고, 곧 주가의 폭락과 환율의 폭등,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말미암은 경제의 붕괴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최소한 완전한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북한의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보수층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들은 "북한은 우리의 철천지원수"라는 시각으로 모든 사태를 보기 때문에 이번 일도 당연히 북한이 저지른 일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라면 이런 사태에서 북한에 대해 "무력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의 연계 가능성을 언급한 국방장관의 입조차 막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보수"이기에 대통령으로 뽑아준 이들로서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이죠.

이처럼 한국의 보수층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북한을 보는 태도에서 이념 보수와 경제 보수가 뚜렷이 구분됩니다. 이념 보수는 경제가 파탄 나도 북한을 공격하기 원하고, 경제 보수는 북한이 무슨 짓을 하든 경제를 위해 덮고 넘어가기 원합니다. 이번 천안함 사고는 두 세력 간의 간격을 확인하게 해준 중요한 계기죠. 이러한 두 집단 간의 차이가 다음 대선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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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정부와 군이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하는 상황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천안함 침몰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기된 침몰 원인 중 여전히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가설은 북한의 공격설뿐이고, 새로운 가능성으로는 피로파괴설이 등장하였습니다.

북한의 공격설은 북한이 잠수함을 보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공격으로 보기엔 북한의 반응이 너무 침착할 뿐 아니라 북한 잠수함이 북방한계선 훨씬 남쪽으로 넘어와서 공격하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물론 잠수함보다 훨씬 작은 반잠수정이나 인간 어뢰를 보냈다는 주장도 나오긴 했지만,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장비로 남한 해역으로 몇 킬로미터나 들어와 정확하게 천안함을 공격하고 떠났다고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천안함 수색을 위해 투입된 잠수부들이 몇 분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바다 속에서 인간 어뢰가 작전을 벌였다고 믿기는 더욱 어렵죠. 하지만, 사고 당시 천안함 근처에 있던 속초함이 "세 때를 향해 발포했다"는 기이한 설명이나, 사고가 난 날 북한 잠수정이 출현했다는 보도 등 때문에 북한의 공격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피로파괴(Fatigue Fracture)설은 노후한 천안함에 구조적 문제가 발생해 가라앉았다는 설입니다. 특히 바다 속에서 천안함을 직접 본 잠수부들이 절단면이 깨끗하다고 증언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습니다. 피로파괴설이 맞는다면 "화약 냄새가 나지 않았다"라는 증언도 말이 되고, 폭발로 다친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설명됩니다. 실제로 아고라에는 균열로 말미암은 침수 가능성을 주장하는 전문가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도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공격이 아닌 사고로 분석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또한 YTN과 조선일보도 피로파괴설을 보도하면서, 점차 주류 언론도 피로파괴로 인한 침몰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만약 피로파괴설이 사실이라면 정부와 군은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선박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수많은 생명을 잃는 사고가 났다면 감독, 관리를 책임지는 이들의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죠. 게다가 피로파괴설이 사실이라면 정부와 군은 사고 원인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무선 교신 내용 및 목격자 증언만 분석해도 쉽게 상황파악이 되겠죠), 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잘못도 작다고 할 수 없겠죠. 따라서 관계 당국이 이번 일을 "원인불명"으로 몰고 가리라는 예측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어떤 조사결과가 나오든 지방선거가 끝나기까지 발표를 늦출 가능성이 크죠.

사고가 나자 이명박 대통령은 사고 직후 "철저하게 조사하고 내용이 나오는 대로 한 점의 의혹없이 모두 다 공개하라."라고 명령했다는데, 의혹은 너무 많고 정보 공개는 되지 않는 상황이니 국민들로선 매우 답답한 심정입니다. 빨리 사건 당시의 무선 교신 내용을 비롯해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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