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주 금요일부터 회의 참석차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다녀왔습니다. 벨파스트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영국(UK)으로부터 독립하기 원하는 주민과 영국에 남기 원하는 주민들 사이의 충돌이 벌어진 지역이죠. The Crying Game이나 The Devil's Own 등 수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북아일랜드의 갈등은 1998년 성금요일 평화협정(Good Friday Agreement)를 계기로 진정이 되었고, 지금 벨파스트는 곳곳에 남아있는 희생자 기념비를 제외한다면 완전히 평화로운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북아일랜드 갈등은 20세기 말에 서유럽에서 진행된 무력충돌이라는 점에서 흔치 않습니다(물론 아일랜드 외의 지역에서도 코르시카나 바스크 등 특정 지역의 독립을 추구하는 단체가 일으킨 테러는 있긴 했지만, 규모가 북아일랜드보다 훨씬 작죠). 서유럽인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무력 사용의 폐해를  절실히 깨닫고 무력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였고, 실제로 대부분 지역에서 무력충돌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만은 IRA가 주도하는 테러를 중심으로 아일랜드계 주민과 영국계 주민 사이의 무력충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북아일랜드의 특수상황은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개의 다른 공동체가 한 지역에 모여 사는 북아일랜드의 상황은 주민들에게 뚜렷한 정체성을 심어주었고, 이러한 정체성은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는 적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분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적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을 낳았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거대한 무력충돌이 발생한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집단은 내부 결속력이 좋지만, 그만큼 공동체가 처한 어려움을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무력 충돌이 한 번 발생하면 문제가 계속 악화합니다. 민족끼리 전쟁할 때, 이익 집단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느 정도 싸우다가 멈춰야 하지만,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 구성원 전체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이죠.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상황도 아프리카인들의 공동체 의식과 관련이 깊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이익집단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봅니다. 문제는 아프리카인이 생각하는 공동체가 오늘날 국제사회의 기본 단위인 국가라는 개념과 다르다는 점이지요. 오늘날 대부분 지역에서 국가는 가장 중요한 이익집단이고, 구성원은 국가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열광하는 심리도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죠).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부족(tribe)이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한 집단이고, 부족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한다면 부족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내 정세가 안정이 돼야 국익에 도움이 되지만, 부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부족이 우리 부족을 괴롭힌다면 그 부족을 무력으로 응징해야 합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선 부족 간의 싸움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 간에도 적용이 됩니다. 전쟁은 거대한 자원을 소모하기 때문에 이익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전쟁하는 것 보다 거의 늘 유익입니다. 특히 대량 살상 무기가 사용되는 현대전에서는 전쟁의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명예, 복수심 등의 이유로 전쟁을 택할 수 있습니다. 국경지역의 황무지를 놓고 몇 년 간 전쟁을 벌여 결국 함께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가 좋은 예죠.

아프리카가 특별히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국가 의식이 약한 것은 아프리카의 독특한 역사적 특성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고대 4대 문명(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 기원을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4대 문명은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주변 지역으로 퍼졌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유럽인들이 호주와 남북미로 퍼지면서 결국 세계의 대부분이 고대 문명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고대 문명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글자를 바탕으로 한 행정조직과 바퀴를 바탕으로 한 교통수단입니다. 이러한 행정과 교통의 발달은 인간을 지역이라는 한계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유로워진 인간은 혈연, 지연을 넘어서는 거대한 조직을 구성하였고, 이는 결국 근대국가의 건설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이러한 고대문명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여전히 지역에 근거한 혈연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이들에게 유럽의 지배국가가 마음대로 설정한 국가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 뿐이죠. 물론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가 독립 한지 50년이 넘어서면서 아프리카인들도 점차 국가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의 마음에서 부족을 향한 사랑이 애국심으로 대체되기 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 보입니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한쪽에선 로봇이 렉서스를 만드는데 한쪽에선 올리브 나무 한 그루를 놓고 다투는 지구의 모습을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첨단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선 관련자들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이익집단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올리브 나무를 놓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은 올리브 나무가 생산할 경제적 이익이 아닌, 가족과 집단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공동체의 모습이지요. 이익 집단의 개념이 공동체를 파괴한 서양에선 공동체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지만, 공동체의 개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공동체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아프리카를 보면 깔끔한 이익집단의 관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볼 때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끝난 90년대는 영국이 블레어 총리의 주도 하에 New Britain으로 거듭나고, 아일랜드가 경제개발에 나서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이 약해지던 시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인간은 렉서스나 올리브 나무 어느 한 쪽으로만 살 수는 없고, 둘 다 필요하며, 상황에 따라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 이어 다음 주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강의를 다녀오게 됩니다. 블로그 업데이트가 늦어져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녀와서 다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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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전통적인 사회에서 집단을 묶는 근거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뭉친 유대인들이나 고조선을 세운 단군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는 한국,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를 프랑스의 시조로 보는 프랑스 인들은 인물에서 집단의 정체성을 찾는 좋은 예죠.

하지만, 혈연과 정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으로 바뀐다면 이러한 상징적 인물의 중요성은 대폭 감소하게 됩니다.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누구의 자손이든, 누가 수천 년 전 이 나라를 세웠든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유럽이 공동체(Gemeinschaft)의 개념을 버리고 사회(Gesellschaft)의 개념으로 넘어오면서 유럽인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토대를 찾게 됩니다. 이러한 토대를 제시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바로 장 자끄 루소였습니다. 그가 쓴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과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토대를 마련한 책이죠.

그는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머릿속에서 재구성해봅니다. 그의 생각 속에서 인류는 원래 자유를 즐기며 사는 독립적인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서로 비교하게 되고, 결국 강한 사람은 남을 지배하고, 약한 사람은 남에게 지배됩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모든 사회에 존재하게 된 불평등은 자유를 즐기기 원하는 인간의 본성과 반대라고 할 수 있죠(그래서 "L'homme est né libre, et partout il est dans les fers"). 그렇다면 이렇게 불평등한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만약 대부분 사람이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한다면 불평을 품은 사람이 너무 많아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유지되려면 인간은 사회 속에서 손해만 보면 안 되고 이익도 얻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이익을 적절하게 조율하기 위해선 사회적으로 계약을 맺어야 하죠. 이렇게 맺은 계약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가 됩니다.

이처럼 루소의 사상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는 영역이고, 이러한 충돌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막으려면 모두가 객관적인 계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관계를 사회의 기초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과 전혀 다르죠. 개인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이 내 가족을 해한다면 내가 찾아가서 가해자를 처벌해야죠. 지금도 서양의 영향을 덜 받은 지역(아랍권 국가, 아프리카 등)에서는 피해자 측이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는 일이 많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A Study of History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란 말이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사회 계약론에 기초해 사회를 본다면, 처벌도 사회적 계약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처벌에 대한 사회적 계약이란 곧 법이죠. 따라서 문제가 발생해도 법에 따른 처벌에 의존해야지, 개인이 처벌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만약 개인이 복수하려고 하면 법은 그 또한 범죄자로 보고 처벌을 하겠죠. 물론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직접 복수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많지만(찰스 브론슨의 Death Wish나 리암 니슨의 Taken 등), 선진국에서 법을 무시하고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사회 계약의 개념은 권력자의 권력을 제한할 때도 유용합니다. 전통적인 집단에서는 권력자가 법 위에 군림하면서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큽니다. 하지만, 계약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라면 아무리 통치자라 할지라도 사회 계약의 표현인 법을 넘어서는 권력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영국 신민(subjects)의 법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중세의 문서인 대헌장(Magna Carta)이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왕이라도 이러한 권리를 함부로 빼앗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리 보호의 개념은 사유 재산의 보호로 이어졌고, 유럽에선 이미 18세기에 이르면 지적 저작권을 보호받게 됩니다. 이처럼 법률에 의한 재산 보호의 전통은 현대에 들어 복잡한 경제 체제가 완성되도록 하는 밑바탕이 됩니다. 만약 법률이 개인의 재산을 잘 보호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재산인지 모호한 사각지대가 생기고, 이는 경제의 비효율을 낳죠. 데소토가 The Mystery of Capital에서 지적한 법의 영역 외에 존재하는 제3세계 국가의 재산은 이러한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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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이나 관계에 기초한 집단(Gemeinschaft)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이익을 넘어서는 집단이고, 건강한 가족이라면 가족 구성원이 가족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Gemeinschaft)의 개념이 사회(Geselschaft)의 개념으로 대치되는 흐름 속에서 가정의 의미도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죠.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들은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겨루고, 딸은 아버지를 놓고 어머니와 겨루는 관계 속에 삽니다. 이는 개인은 가족 속에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는 뜻이죠. 이러한 관점은 가족을 이상적인 사랑과 질서의 공동체로 보는 유교의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가족을 모델로 사회를 재구성하기 원했던 유학자들은 사회의 모범이 될 가족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고, 그에 비해 구성원의 이익 추구를 집단의 존재 이유로 보는 시각이 강한 서구 문화에서 자라난 프로이트는 가족조차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죠.

가족을 이익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결혼에 대한 일반의 의식도 바뀌게 됩니다. "결혼을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유교의 관점에서 답하자면 "가족을 위해서"입니다. 부모가 나의 결혼을 원하고, 결혼을 함으로 가족 구성원의 숫자를 늘려 가문의 세력을 키워야(농경 사회에서 노동력의 향상은 곧 부의 증가를 뜻했습니다) 하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결혼을 해서 행복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젊은이들은 부모가 짝을 지어준 사람과 얼굴도 안 보고 결혼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만약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행복이 줄어든다면 결혼할 이유가 없죠. 그러니 요즘은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행복한 결혼을 하자면 준비해야 하는 것도 많고(학력, 직장, 돈 등), 따라서 결혼 연령이 점차 높아집니다.

결혼이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결혼을 했다가 행복하지 않다면 결혼을 취소해야겠죠. 따라서 서양이나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는 이혼율이 높습니다. 또한,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한다면 감정적, 재정적으로 손해가 크기 때문에 아예 결혼이라는 부담감을 제거하고 관계를 즐기기만 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유럽에는 결혼한 커플 만큼이나 동거만 하는 커플이 많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동거(concubinage)가 정상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 잡았기에 사회적으로 완전히 용납이 됩니다(예를 들자면,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사르코지와 대결을 펼쳤던 세골렌 루와이알이 또 다른 정치인인 프랑수아 올랑드와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살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혼과 동거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동거를 하거나 이혼을 한다면 가정의 재생산이 안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동거나 이혼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으로 보이겠죠.

자녀출산도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가족관에서는 자녀출산은 부모의 의무였지만,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녀를 낳았을 때 얻는 유익이 낳지 않았을 때 얻는 유익보다 커야 자녀를 낳겠죠.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자면 자녀를 낳았을 때 얻는 유익이 자녀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수고보다 더 값지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출산율이 점차 낮아지는 것이죠. 출산을 나의 이익이 아닌, 자녀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즉, 자녀를 낳았을 때 과연 자녀가 행복할 만한 환경을 내가 제공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묻는 것이죠. 물론 이 힘든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그렇게 보자면 자녀를 낳지 않을 이유만 하나 늘어날 뿐입니다. 그에 비해 옛날 사람들은 출산할 때 자녀의 행복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습니다(물론 피임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사회에서 자녀 출산은 부부의 의무였고, 자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든 아니든 부모에게 효도할 의무가 있었을 뿐이죠.

이처럼 가족이 이익 집단으로 바뀌면서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많이 변했습니다. 문제는 이익의 관점에서 가족을 보면 결혼을 할 필요도 없고, 자녀를 낳을 필요도 없는데, 그렇다고 합리적 판단에 따라 가정생활을 거부한다고 꼭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해질 가능성이 크죠. 영화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에 나오는 "가정을 꾸리면 불행할 것 같아 결혼하지 않았는데, 아이와 함께 있는 부부의 모습을 보니 부러워서 눈물이 나더라"는 멕 라이언의 대사는 현대인의 고민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느라 자녀를 낳지 않으니 국가 전체의 출산율이 낮아져서 결국 국가적 위기 상황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익만 추구하는 태도가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지금 미약하게나마 "공동체 회복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을 이익 집단에 속한 존재로 보는 관점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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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부터 이익 집단의 개념을 물려받은 유럽은 이익에 따라 작동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근대 국가가 그것이죠. 근대 국가는 부족이나 민족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부족이나 민족은 혈연 공동체이고, 집단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가 전제됩니다(흑인들은 이러한 공동체 개념에 익숙하기에 처음 만나도 서로 "brother, sister"라고 부르죠. 백인들은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국가는 혈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구성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인위적인 조직이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국가를 예술 작품에 비유한 것(Der Staat als Kunstwerk)은 이러한 국가의 인위적 성격 때문입니다.

국가는 인위적 조직이기에, 국가는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이 부족한 독일은 터키인을 많이 받아들였고, 결국 독일에 사는 터키인은 독일인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터키인이 독일인이 될 수는 없지만, 국가의 관점에서는 가능하죠. 또한, 국가의 개념을 쓰자면 같은 민족도 손해를 끼치면 관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던 한국인들이 90년대에 들어오면서 통일에 따르는 비용을 이유로 통일을 꺼리게 된 것이 좋은 예죠.

이처럼 국가의 개념이 공동체에서 이익 집단으로 발전하는 현상은 유럽 역사의 독특한 산물이고, 다른 지역에선 국가를 이익 집단이 아닌 공동체의 연장으로 보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중국이 좋은 예죠. 중국의 정치사를 지배한 유교 이념은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봅니다. 유교에 따르면 가족에서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듯 사회에서도 남에게 예의를 갖추고, 친척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 행동하듯,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이처럼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보면 가족이 구성원에게 하는 요구를 국가도 개인에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의 요구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효도이죠. 효도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부모님께 잘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를 국가에 적용하면 충성이 됩니다. 충성은 국가를 위해 나를 희생하려는 태도이죠.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을 묶은 충효사상은 가족의 개념을 국가로 확대하는 열쇠였고, 유교문화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충효사상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의 모델에 기초한 국가의 개념은 국제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로 보자면 두 나라 사이에 부자 관계나 형제 관계가 성립합니다. 특별한 경우라면 군신 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성립이 되겠죠(군신 관계의 핵심인 충은 곧 효와 병행하는 개념이기에 군신 관계도 일종의 가족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군사부일체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의 모델로 이해하면 가족 관계의 덕목이 국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어버이처럼 섬겨야 하고,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효심 깊은 아들이 칭찬받듯, 큰 나라를 섬기려는 태도(이른바 사대주의)는 유교에서 마땅히 칭찬받아야죠.

하지만,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가 아닌 이익 관계로 본다면 나라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이로움을 끼치는 나라는 좋은 나라, 해로움을 끼치는 나라는 나쁜 나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나라를 가까이하고, 해로운 나라를 멀리하면 될 뿐이죠. 이러한 관점은 유교에선 지극히 불손한 태도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용 노선을 추구하던 광해군의 정책은 유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이들이 보기에 중국을 지배하는 명나라는 우리에게 형과 같은 나라이고, 명나라를 돕지 않으려는 태도는 가족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적용됩니다. 많은 사람은 미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은 미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미국은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을 대할 때 손익의 관계에서 보는 태도는 매우 불손하기 때문이죠. 이들이 보기에 한국은 "미국이 감동할 정도로 미국을 도와야" 마땅합니다(물론 이와는 다르게 한국이 미국을 돕는 것이 한국에게 이익이기에 미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앞의 주장과 결론을 같지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다르기에 다른 입장으로 봐야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국이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충격 그 자체였죠.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자란 젊은 세대 중에는 국제 관계를 이익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들은 명분에 얽매어 실리를 잃는 외교는 어리석어 보일 뿐이죠. 이처럼 국가라는 집단을 보는 관점의 차이는 국제관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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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국토가 광대하고 지하자원이 많은 이 나라는 모슬렘과 기독교인이 각각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두 종교 간의 권력 분할이 쉽지 않은데, 최근에 모슬렘 대통령이 신병 치료를 이유로 장기간 외국에 체류하면서 장기간 국가원수가 업무수행을 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국회의 결정에 따라 기독교도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과연 권력 이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질지 주목됩니다. 이러한 제도권 내부의 혼동과 함께, 모슬렘권과 기독교권이 함께 사는 조스(Jos)시에는 두 세력 간에 무장충돌이 벌어져 400명 이상이 사망하였습니다. 2월에 들어서면서 긴장이 완화하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이미 비슷한 사태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나이지리아의 종교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무력 충돌의 소식을 자주 듣기에 이제는 이에 대해 둔감할 지경이지만,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끊임 없는 비극의 뿌리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종교갈등이나 민족갈등이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프리카에선 왜 이러한 갈등이 즉각 폭력으로 이어질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사람들의 집단을 보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서로 사랑하거나 인간적인 정을 느끼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모여 사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집단의 예로는 가족을 들 수 있고, 두 번째 집단의 예로는 회사를 들 수가 있죠. 독일어로는 전자를 Gemeinschaft, 후자를 Gesellschaft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구분은 독일의 사회학자 Ferdinand Tönnies가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죠.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전자는 공동체, 후자는 사회입니다(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를 영어로 번역한 책이 Community and Society라는 점을 볼 때 큰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로도 정확한 구분을 할 때는 독일어 단어를 빌려서씁니다).

내가 속한 집단이 공동체(Gemeinschaft)라면, 나는 마치 가족을 대하듯 내 집단을 대합니다. 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 나의 형제, 자매요,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나도 그들의 사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극한 상황에서 가족을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듯, 나도 공동체를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법이죠. 하지만, 내가 속한 집단이 사회(Gesellschaft)라면, 나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집단 속에서 활동합니다. 만약 내가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더는 이 집단에 속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새로운 집단으로 옮겨가야죠. 하지만, 나는 내가 이 집단에 속한 이상, 이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힘씁니다. 이 집단이 잘 되어야 내게도 이익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집단을 유지하는 힘은 법과 규칙에서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모두 같은 규칙을 따라 움직여야지 불만이 없고, 집단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인류는 공동체, 즉 관계 중심의 집단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가족, 부족, 민족 등의 집단이 그러한 예죠. 이러한 집단에서는 관계를 잘 맺는 사람들이 인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는 점차 이익 중심의 집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변화의 중심엔 res publica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세워진 로마가 있죠. 로마는 작은 도시에서 출발했지만, 곧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합니다. 수많은 종교, 민족을 포함한 로마가 하나의 정체성을 지닌 집단으로 수백 년간 유지된 비결은 로마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아닌, 이익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res publica(공공의 일, 공공의 사업이라는 뜻)였고, 이는 로마가 잘 되는 것이 로마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익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공화국을 뜻하는 영어 republic은 여기서 온 말이죠.

로마보다 앞서 지중해 지역을 지배했던 그리스인에게 삶의 중심은 도시 국가, 즉 폴리스(polis)였습니다. 폴리스는 한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그리스는 산이 많아 이동이 쉽지 않고, 따라서 이동이 원활한 작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 끼리는 유대감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바로 폴리스죠. 물론 폴리스가 잘 되는 것은 폴리스에 속한 사람들에게 유익이고, 따라서 폴리스는 사회(Gesellschaft)의 성격도 띠지만, 폴리스의 규모가 작고, 특히 노예를 제외한 자유시민의 숫자가 매우 작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폴리스는 관계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지역 공동체를 넘어섰기에 관계가 아닌 이익으로 뭉친 집단으로 거듭나야 했습니다(물론 Dulce et decorum est pro patria mori나 Pater Patriae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로마에도 관계 중심 집단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로마가 법률체계를 개선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이러한 원인 때문입니다. 관계가 중심인 집단에서는 법률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익이 중심인 집단에서는 규칙이 엄격해야 집단이 유지가 됩니다. 로마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했고, 이는 유럽의 법치주의 전통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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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변화

사회 2010/01/12 23:20
롤랜드 에머릭 감독이 1996년에 만든 인디펜던스 데이(Independence Day)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입니다. 지구를 점령하러 온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미국인들의 활약을 그린 이 영화는 예술적 가치를 찾기는 어렵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전통적인 미국인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정부를 영화의 중심부에 놓는다는 점에서 최근에 나온 외계인 소재 영화와 다릅니다. 정부가 영화의 중심이라면 영화는 사태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룰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개인의 이야기는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2005년에 나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 전쟁(War of the Worlds)은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외계인의 침공을 개인의 경험으로 축소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와 다릅니다. 2008년에 나온 맷 리브스 감독의 클로버필드는 아예 상황에 대한 거시적인 이해를 완전히 배제한 채(우주 전쟁은 거시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나레이션 이라는 장치를 동원하지만, 클로버필드는 그러한 장치가 없죠), 주인공의 관점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물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외계인이 지구를 파괴하는 영화에서 외계인은 지구인의 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주 전쟁이나 클로버필드는 인류의 적인 외계인에 맞서 싸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영화에서 주인공은 외계인과 맞서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적에게서 도망가려고 노력하는 소시민일 뿐입니다. 그에 비하면 평범한 소시민부터 대통령까지 전투기를 몰고 출동해 외계인과 싸우는 인디펜던스 데이의 영웅주의(heroism)는 완전히 다른 시대의 정신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90년대까지 헐리우드 영화에서 세계적 재앙에서 인류를 구하는 것은 늘 미국인이었습니다. 미국은 가장 위대한 나라이기에 세계를 지키는 중요한 임무도 당연히 미국인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지구로 다가오는 소행성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인들이 우주로 출동하는 1998년 작 아마겟돈은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죠. 물론 인디펜던스 데이에서도 외계인을 무찌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미국인들이 도맡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미국은 외계인과 벌이는 전쟁에서 다른 나라들을 이끌고, 다른 나라들은 순순히 미국을 따릅니다. 이는 미국은 세계의 지도자이고,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지도력을 받아들이리라는 생각의 표현이죠.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9/11 사태에서 보듯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미국인들은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자신을 잃게 됩니다.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나온 영화에서조차 미국은 선의 화신이 아니라, 그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평범한 한 나라로 묘사됩니다. 미국과 아랍권의 충돌을 그린 2007년 작 The Kingdom에서 미군 병사들과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동일한 말로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은, 결국 이 분쟁에서 어느 한 쪽이 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2006년에 이오지마 전투를 두고 미국의 시각과 일본의 시각에서 각각 영화를 만들었는데(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이 영화들을 보면 미국이나 일본 어느 한 쪽의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인간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리죠. 심지어 전통적인 관점에서 만든 마지막 대작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는 2001년 작 진주만(Pearl Harbor) 조차 일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즉, 이 영화는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적을 악당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새로운 태도에 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인류가 다른 행성을 착취하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아바타(Avatar)에 이르면 미국인의 자기부정이 극에 달했다고 볼 수 있죠.

 미국이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포기하면서, 영화 속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맡는 국가나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우주 전쟁에서 외계인은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지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패배하고, 클로버필드는 외계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지 패배하는지를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인류가 집단적으로 눈이 머는 상황을 그린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는 이러한 위기에서 인류를 구해내려는 노력을 다루지 않고, 인류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점차 시력을 회복하면서 영화가 끝나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가장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잘 반영한 인디펜던스 데이를 만든 롤랜드 에머릭 감독이 미국인이 아니라 독일인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인디펜던스 데이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으로 보이지만, 그가 고질라에서 핵실험이 낳는 재앙에 대해 다루었고,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에서 지구 온난화를 방치한 미국 정부의 잘못으로 환경재앙이 닥치는 모습을 그리는 등 liberal한 정치색을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투모로우는 영화의 중심에 정부가 아닌 가족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개인들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인디펜던스 데이와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죠. 그가 최근에 만든 2012에서 미국 중심의 영웅주의에서 얼마나 멀어진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해집니다.

미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자신감을 상실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거시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블록버스터 영화들조차 자신감을 잃고 애매하게 끝을 맺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21세기에 가장 성공적인 슈퍼영웅 프랜차이즈라고 할 수 있는 배트맨에서 배트맨은 검은 옷을 입고 밤에만 활동하는 어두운 영웅일 뿐 아니라, 다크 나이트에선 대의를 위해 대중에게 거짓말을 하는 도덕적으로 애매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과거의 슈퍼영웅 영화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죠. 결국,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이상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들은 계속 자신 없고, 연약하며, 도덕적으로 모호한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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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사면복권 소식을 듣고 나니 정말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군요. 이로서 한국에서 삼성은 법 위에 존재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입만 열면 강조하던 "법치"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원칙은 민주주의와 함께 싹튼 개념이 아니라 왕정시대부터 존재하던 오래된 전통입니다. 사회를 법으로 다스리려면 일부에게만 법을 적용하고 일부는 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지몽매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옛사람들 조차 당연하다고 인정한 바입니다. 그런데, 만민이 평등하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재벌 총수는 죄를 지어도 제대로 댓가를 치르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특정한 계층이 법의 처벌을 늘 피할 수 있다면, 법치는 그야말로 서민을 억압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고, 정의는 힘있는 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이렇게 명분 없는 사면을 해놓고 정부는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사람들이 차도로 진출했다고 잡아 넣는 일을 계속하겠죠. 과연 이런 나라에서 정부와 경찰의 권위가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전 "국민들에게는 법을 지키라 하고 정작 위에서는 범죄가 저질러지면 국민들이 어떻게 보겠나"고 말했고, "내 임기 중에 일어난 사회지도층의 권력형 부정과 불법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많은 국민은 이러한 약속 때문에라도 이건희 전 회장을 사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분명히 "내 임기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사면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건희 전 회장이 저지른 일은 그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죠. 청와대는 이에 대해 “국익을 고려해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부폐가 처벌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정말 평창 올림픽 유치가 법치의 근간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일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권에 실망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정말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번 결정은 한국이 정의가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정의가 무너진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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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을 보다 보니까 "미소금융"이란 생소한 표현이 보이더군요. 찾아보니 은행 및 기업이 나서 저소득, 저신용 계층에 창업자금을 빌려주는 제도였습니다. 미소금융은 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인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을 모델로 하는데, 이 운동은 유엔이 2005년을 세계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의 해로 정했을 만큼 영향력이 큽니다. 특히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은 많은 방글라데시 서민들에게 가난을 탈출하는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이 은행을 시작한 무함마드 유누스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정도로 성공하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운동을 한국에도 도입한다니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것도 당연하죠.

그런데 그라민 은행과 미소금융은 비슷해 보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그라민 은행은 공동체 중심의 대출 방식입니다. 무보증으로 돈을 빌려주는 그라민 은행의 원금회수율이 98%에 달하는 까닭은 방글라데시 서민들이 특별히 양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어떻게 사는지 뻔히 아는 처지에, 돈을 떼 먹기엔 남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라민 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돈을 빌려가는 사람이 한 공동체에 살기 때문에 대출자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평소에 게으르고 무책임하던 사람이 돈을 빌리러 온다면 그라민 은행은 그에게 대출을 거부하겠죠. 따라서 그라민 은행은 현대적인 은행이라기보다는 공동체 의식에 기반을 둔 "조합"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미소금융은 철저하게 공동체나 인간관계를 배제한 채, 서류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존의 은행 조직을 모델로 합니다. 미소금융이 시작한 첫날의 모습을 담은 어떤 신문의 기사 제목은 "안동서 수원까지 온 사람도...'미소금융' 첫날부터 북새통"입니다. 수원에 있는 미소금융 관계자들인 안동에서 온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가 없고, 따라서 무조건 "서류를 해오라."라고 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서민을 위한 창업 자원 제공"과 함께, "공동체의 회복"을 이상으로 하는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의 정신이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을 선진국으로 가져오려는 노력은 대부분 실패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공동체가 해체되었기에 공동체의 압력에 의존해 대출을 상환하기도 어렵고,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 사람을 보고 대출을 하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공동체가 사라진 사회에서 "무담보 대출"은 떼먹어도 되는 눈먼 돈으로 보일 뿐이죠.

한국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이 성공하기 쉽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자영업의 포화상태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빈곤한 나라에서는 돈이 없어 자영업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많고, 따라서 자영업자가 부족해 자영업을 시작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생계 해결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자영업 포화상태가 몇 년째 지속 중이고, 자영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곧 망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미소금융에서 돈을 빌려 치킨집을 차렸는데, 장사가 잘 안 돼 폐업을 한다면 아무리 빌린 돈을 갚고 싶어도 갚을 길이 없겠죠. 실제로 지금처럼 자영업자의 폐업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는 미소금융의 원금 회수율이 낮을 수밖에 없고, 결국 몇 년 안에 미소금융의 자본이 바닥나 위기에 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미소금융으로 말마암아 자영업자가 증가한다면 자영업 전체의 어려움이 심해질 가능성이 크죠.

미소금융은 전형적으로 언론에 보도하기 좋은 이벤트성 행사처럼 보입니다. 미소금융을 신청하려면 각 기업 사무실로 찾아가야 한다니, 미소금융에 대한 언론 보도마다 기업의 이름 한 번씩 나오고, 기업의 입장에선 "우리는 사회를 위해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다"고 홍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소득층을 도우려는 기업의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러한 화려한 행사만으로는 저소득층을 장기적으로 돕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을 한국에 들여오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려면 "외국에서 성공한 모델을 그냥 들여오자"는 발상의 수준을 뛰어넘어서, 진정으로 서민들을 사랑하고,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들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진정으로 돕는 방법을 찾아야겠죠.

어쨌든 이번 미소금융사업에 기업들이 적게는 몇백억 원에서 많게는 몇천억 원까지 내놓았다는데, 이렇게 많은 돈이 낭비되지 말고, 진정으로 서민을 돕는 방향으로 잘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선 기업 홍보에 그치는 장치가 아닌,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방법을 찾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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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자질

사회 2009/11/16 06:00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팔레스타인 군대를 대표하는 골리앗은 이스라엘군에게 "한 명이 나와 싸움을 벌여 내가 이기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고, 그가 이기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기로 하자!"고 제안합니다. 골리앗은 키가 큰데다가 청동 갑옷으로 무장하였기에 이스라엘군 중에선 아무도 그와 맞대결을 펼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중 다윗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군사지도자끼리 싸움을 벌여 전쟁의 승부를 가리자는 제안이 얼마나 황당한지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약 2차대전 때 처칠이 히틀러에게 "레슬링 매치로 전쟁의 승패를 가리자"라고 했다거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사담 후세인이 조지 W. 부시에게 "팔씨름으로 승부를 결정하자"라고 제안한다면 우습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고대 전쟁사를 보면 장수끼리 승부를 겨루는 장면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는 그리스군의 장수 아킬레스와 트로이군의 장수 헥토의 싸움이 나옵니다. 삼국지에는 여포가 적장들과 차례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지도자 간의 무력 대결"이라는 개념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거의 사라졌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주먹들의 세계에선 조직의 우두머리끼리 겨뤄 승부를 가리는 풍습이 존재했죠. 문명이 파괴된 미래의 모습을 다룬 포스트맨이라는 영화를 보면, 군사조직의 지도자와 대결을 펼쳐 그를 꺾는 사람은 그 조직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한다는 규칙이 나옵니다. 이는 영화 속의 사회가 과거의 상태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장치죠.

옛날 사람들이 조직 지도자 간의 힘 대결을 정당한 승부로 간주한 것은 당시 인류가 지도자의 육체적인 힘을 대단히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인간이 직면한 중요한 과제는 몸을 통한 에너지의 효율적인 변환이었습니다. 인간은 음식을 먹음으로 열량을 섭취하고, 이를 힘으로 바꿔 농사를 지음으로 다시 열량을 생산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농사 기술로는 먹는 열량 만큼 식량을 생산하기가 어려웠고, 많은 사람은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힘이 센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생존에 유리했고, 따라서 사람들은 힘이 센 사람을 대단히 우월한 존재로 존경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대 사회엔 힘이 센 사람에 대한 전설이 많고(이스라엘의 삼손,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중국의 항우 등), 이처럼 힘이 센 사람은 곧 영웅으로 칭송되고, 심지어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죠.

하지만,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힘은 중요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음식을 먹어 에너지로 바꾸기보다는 석탄이나 석유를 에너지의 원료로 해서 기계를 움직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과거엔 큰 돌덩이를 옮기려면 많은 힘이 들었지만, 기계를 쓰면 힘이 약한 사람도 쉽게 옮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산업 사회가 되면 힘이 센 사람을 존경하는 풍습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 대신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자원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존경받게 되죠. 자원 관리는 다양한 자원을 조합해 결과물을 생산해야 하는 산업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만들어 팔려면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생산하고, 판매하는 파트를 각각 관리해야 합니다. 이 중 생산 파트를 살펴보면 재료를 수급하고, 품질을 유지하고, 인력을 관리(사원 복지 문제도 포함)하며, 다른 파트와 의견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활동이 조화롭게 진행되려면 각 부분의 필요를 이해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흐름을 잘 파악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산업사회엔 이처럼 자원을 잘 관리해서 결과물을 내놓는 매니저가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습니다.

산업사회 지도자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들은 바로 군사 지도자입니다. 군사지도자들은 다양한 자원(음식, 의복, 무기, 병사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어야 합니다. 군사 지도자가 군대를 잘 관리하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저러한 관리자가 나라를 관리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기가 쉽겠죠. 그래서 미국인들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 장군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또한, 군인 자신도 "내가 군대를 운영하듯 국가를 운영하면 잘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군사지도자가 정권을 탈취한 것은 이러한 논리 때문입니다.

하지만, 효율을 강조하는 산업사회는 비인간화라는 문제를 낳고, 사람들은 단지 자원을 잘 관리하는 지도자가 아닌, 삶에 방향을 제공할 지도자를 찾게 됩니다. 21세기 사회는 물질적 풍요보다 의미의 부재가 더 큰 문제로 부각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올바른 삶의 모범을 보여줄 지도자를 찾고, 그러한 지도자를 따름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지도자가 되려면 능력 뿐 아니라 삶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지난 대선에서 불거진 대통령 후보의 도덕성 문제는 산업사회에서 자란 세대와 그 이후 세대가 지도자를 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줍니다.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관리자형 지도자"의 덕목 중 도덕성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만약 공장장이 공장의 생산성을 올리기만 한다면, 그가 공장 밖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날 젊은 세대는 지도자를 곧 내 이상의 표현으로 보고, 따라서 양심적이지 않은 지도자를 뽑는다면 이는 곧 내가 타락한 인간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대는 "도덕성과 상관 없이 유능한 사람을 뽑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혐오하기 마련이죠. 그에 비해 산업사회에서 자라난 사람은 유능한 후보를 도덕성 문제로 거부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판단하겠죠.

21세기형 지도자의 또 다른 중요한 자질은 의사소통 능력입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카리스마, 강한 의지력, 조직관리 능력 등을 요구했지만, 오늘날엔 지도자의 의사소통 능력이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지도자의 자질로 인정됩니다. 미국에서 무명의 정치인이었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중요한 원인은 그가 Dreams from my Father와 Audacity of Hope라는 책을 쓰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효과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연설 때문이었죠. 그의 연설은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 넣었고, 이로 인해 그는 일약 전국에서 유명한 정치인이 됩니다. 결국 그의 의사소통 능력은 그가 대통령이 되도록 길을 만든 셈이죠.

시대가 바뀌면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격이 바뀌는 것도 당연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각이 나뉘는 원인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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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위기의 남성

사회 2009/09/19 04:42
과거에 남자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남자답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들이 직장생활에 쫓기게 되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남자들은 TV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남자답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전통적인 남성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델은 슈퍼맨과 같은 슈퍼 히어로였습니다. 괴력을 발휘해 악당을 섬멸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애인과 친구를 구해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소년들은 "그래, 나도 나중에 저렇게 멋있는 남자가 되야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죠. 하지만, 슈퍼맨처럼 초인적인 능력은 현실성이 떨어졌기에 슈퍼히어로는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을 한 근육질 남자(80년대의 실버스타 스텔론과 아놀드 슈왈제네거, 90년대의 장클로드 반담과 스티븐 시걸)로 대치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남자는 유능하고, 똑똑하고, 힘세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위 사람을 보호하는 존재다."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죠.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미디어에 등장하는 남자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1994년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가 보여준 주인공은 다양한 모험을 하며 주변 사람들을 구해낸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남성상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똑똑하고 유능한 영웅이 아닌, 지능이 보통사람보다 떨어진다는 점에서 새로웠습니다. 같은 해에 나온 덤앤 더머는 지능이 떨어질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주인공들이 실패뿐인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2000년대 미국 영화계를 휩쓰는,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남자들의 인생 실패기(The 40-Year-Old-Virgin이 대표적인 예죠)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TV의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도 팬이 많은 The Big Bang Theory는 감정적으로 너무나 미성숙해 이성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남자와 이성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이를 성숙한 관계로 발전시킬 능력이 결핍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들은 과학 영역에서는 뛰어나지만, 관계, 가정, 사회생활 등 진정한 어른의 삶을 살지 못하고, 만화책과 비디오 게임으로 현실의 불만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The Flight of the Conchords는 뉴욕에서 자리 잡으려고 노력하는 뉴질랜드 출신 2인조 밴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들의 노래는 너무도 썰렁해 관중은 반응이 전혀 없고, 이들의 매니저는 너무나 무능해 밴드를 망치는 존재이고, 이들을 따르는 유일한 팬은 팬이라기보다 스토커에 가깝습니다. 또한, 이들은 감정적으로 미성숙하기에 이성에게 접근하기조차 어려워합니다. 그러니 이들이 정상적인 이성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이러한 영화나 TV 쇼가 인기를 끄는 것은 남성들이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 사회에서 남성은 자신이 영웅이 될 수가 없다고 느끼고, 따라서 영웅이 나오는 영화보다 자신과 비슷한 loser가 나오는 영화가 더 재미있는 것입니다(물론 21세기에도 배트맨 등 슈퍼히어로가 나오는 영화가 나오기는 하지만, 배트맨은 슈퍼맨과 비교한다면 훨씬 어둡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전통적인 남성상은 남성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의 남자들이 보이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자들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창조성, 인간관계 능력 등을 요구하는 21세기 사회는 근육량이 많은 남자에게 절대 유리했던 농경사회와는 매우 다르고, 남자들은 이러한 사회에서 생존하기조차 벅차다고 느낍니다. 물론 지금도 남자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미 많은 영역에서 여자는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남자는 여자들과 경쟁에서 밀려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니 남자들은 이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여성적인 특징을 익혀서 섬세한 존재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 것이지요. 즉, 생긴 대로 거칠고 투박하게 살면 되던 과거와 다르게, 새로운 모습을 보이도록 요구하는 사회에 살면서 남자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죠.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남자의 반응은 감정적인 미성숙입니다. 감정적인 미성숙은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심리의 표현이죠. 남자가 어른이 되길 싫어하는 것은 어른이 되어 봤자 좋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졸업하면 취직하기도 어렵고, 취직해봤자 직장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으며, 결혼하면 존경은 기대하기 어렵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 일생을 바쳐야 하고, 여성들은 알파걸로 진화해 남자를 지배하려고 드니, 이렇게 복잡한 어른의 삶을 포기하고 어린 아이로 남아 남자를 위한 영화(스타워즈부터 매트릭스까지)나 보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면서 동성 친구들과 만나 영원한 어린아이처럼 사는 편이 더 낫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하죠.

오늘날 남자들이 처한 상황은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처했던 상황만큼이나 구조적인 문제라 쉽게 바꿀 수가 없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한, 20세기 초반까지 보편적이었던 강하고 멋있는 남성의 모습을 실생활에서 찾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P.S. 전에 썼듯 다음주 부터는 이곳에서 훈련과정이 시작되고, 제가 이 과정의 책임자기 때문에 매우 바쁠 것으로 예상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글을 올리려고 노력하겠지만, 일주일에 몇 번을 올리겠다고 미리 약속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일단 3개월간은 글을 자주 올리지 못하더라도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연말부터는 다시 한가하질 테니 그때부터 다시 글을 정기적으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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