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뢰의 파편이 발견된 것도 아니고, 선체에 화약의 흔적이 남은 것도 아니지만, "절단면이 너덜너덜하다."는 한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놓고, 북한을 이번 사건의 원인으로 보는 군 지휘부의 심증에 수많은 보수인사의 인터뷰를 더한 기사를 융단폭격식으로 내보내기에, 이런 보도만 접하는 사람이라면 3인승 반잠수정에 올라탄 13인의 북한군이 악천후를 뚫고 디귿 모양으로 감시망을 피해 남한 영해에 진입한 후, 그 중 인간 어뢰로 선발된 한 명이 어뢰를 몰아 천안함 밑에서 버블제트를 발생시켰고, 쇠로 된 배를 두 쪽 낼 만큼 강력한 이 버블제트는 물에는 작용하지 않아 감시병은 물기둥을 보지 못했다는 설명을 믿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때맞춰 잡혀준 간첩들은 황장엽 씨를 암살하기 위해 북한에서 파견되었다고 증언하니, 이것만 놓고 봐도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확해 보입니다(물론 곰곰이 생각하면 북한이 암살을 위한 간첩을 파견했다는 사실이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했다는 가정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편집의 묘미를 살린다면 독자에게 A=B라는 방정식을 주입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북한의 어뢰 공격설은 그야말로 하나의 설일 뿐입니다. 물론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고, 북한이 과거에도 무력 도발을 했던 전력이 있기에 이번 사태도 북한이 저지른 짓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는 말과, "분명한 사실이다."라는 말 사이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합니다. 보수 언론이 실수하는 부분은 전자와 후자를 구분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무조건 후자를 믿게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쓴 글에도 북한 공격설이 나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북한이 공격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기에 이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언급했습니다. 이는 내 생각과 상관없이, 객관적인 가능성은 열어둬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수 언론의 보도를 보면 이러한 객관적인 태도가 완전히 사라지고, "북한이 한 짓이 분명하다."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 가더군요. 이는 객관적인 관점을 잃지 말아야 할 언론의 사명을 망각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의 공격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북한을 무력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국제 관계에서 공격을 당하면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관례이자 피해국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우리가 안 했다"고 부인하는 가운데 우리가 북한을 공격한다면, 북한은 이를 도발로 받아들이고, 결국 무력 대응에 나설 것입니다. 이는 곧 한반도에 전면전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실제로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이 기회에 북한과 전쟁을 벌여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쟁을 사랑하는 분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북한과 전쟁은 당분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우선, 북한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 할지라도, 이를 증명할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 어뢰 파편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이 파편이 분명한 북한의 어뢰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이를 북한이 공격한 증거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증거가 없다면 무력 대응을 할 명분조차 얻을 수 없겠죠.
또한, 전에도 썼듯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 보수보다는 경제 보수에 가깝고,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주변엔 경제 보수계 인사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최악의 대통령은 전쟁을 일으켜 경제를 붕괴시키는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전쟁이 아니라 무력 대응 가능성을 대통령이 언급만 해도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됩니다. 그러니 정부가 실제로 무력 대응에 나설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또한, 한국이 전쟁하려면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미국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물론 "우리가 원하면 전쟁하면 되지, 왜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라고 묻는 분도 있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연기하겠다고 말함으로 남한이 단독으로 군사력을 사용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러니 군대를 동원하려면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죠). 한반도의 전쟁, 특히 북한의 핵무기가 등장하는 전쟁은 곧 동아시아 경제의 붕괴를 의미하고, 이는 세계경제가 대재앙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미국으로선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죠. 실제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북한의 어뢰공격설이 나오고 나서, "북한은 도발행동을 하면 안되고, 6자회담으로 나와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국내 언론은 이를 북한의 도발에 대한 미국의 경고라고 해석했는데, 진정한 의미는 그게 아니라 "빨리 6자회담으로 돌아와라."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관심은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천안함 침몰에 있지 않다는 말이죠. 만약 미국이 북한과 일전을 불사한다면, 6자회담으로 나오라고 촉구했겠습니까?
이렇게 장황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주가와 환율만 봐도 전쟁이 나지 않으리라는 전망은 쉽게 내릴 수 있습니다. 현재 주가는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 중이고, 환율은 1,100원대로 떨어졌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무력충돌의 징후가 나타났다면 주가와 환율의 널뛰기가 시작되었겠죠. 즉, 가장 정보력이 좋고 가장 정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제계가 보기에 전쟁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조사결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에 침몰했다고 밝혀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한참 전에 심증만 가지고 전쟁 분위기로 몰고 가는 일부 언론의 태도는 언론의 본분을 저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증 가지고 글 쓰는 일은 블로거들에게 맡겨주시고, 언론은 언론답게 사실에 바탕한 객관적인 보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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